2016-04-09

[북리뷰] 웃음과 냉소의 경계, 혁명의 길을 묻는다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스르자 포포비치, 문학동네, 1만5천원.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저자 스르자 포포비치는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특별히 서문을 추가했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에이전시로부터 한국의 한 저명한 출판사가 이 책을 출간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맨 처음엔 한국의 북쪽에 있는 이웃--2,500만 명의 인구가 세계 최악의 독재 아래 고통 받고 있는 곳--때문이겠거니 했습니다."

물론 농담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북간의 격차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같은 소리는 한국인끼리 주고받는 '인사이더 조크'가 아닐까 싶었다. 어쨌건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의 무릎을 꿇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으며, 이후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니 말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누굴까 해서 책날개를 보니 옛 기억이 났다. 2000년대 중후반, 미국의 국제 정치 전문지 〈Foreign Policy〉의 한국어판을 만들 때 나는 이미 스르자 포포비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독재자를 '유쾌한' 방식으로 몰아낸 대중운동의 지도자. 나는 그가 쓴 글의 한국어 번역본을 편집했거나, 그것이 단신이었다면 내가 손수 한국어로 옮기기도 했을 것이다.

한동안 잊혀져 있던 스르자 포포비치는 단행본으로 내 책상 위에 돌아왔다. 미국의 리버럴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혁명'과 '저항'을 포장해주는 장사꾼이 아닐까 하던 의혹은 접어둔지 오래였다. 그는 실제로 독재 권력과 맞서 세르비아를 넘어 동유럽 전체의 정치적 변화를 견인해낸 중요 인사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표지와, 짐짓 유쾌한 척 하는 그의 말투에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SNS에 '웃기는 짤방' 몇 개 올린다고 세상이 알아서 바뀔 것처럼 떠드는 그런 종류의 책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이 책은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독재자를 그럼 대체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뭔가 사소한 것, 적절한 것, 그러면서도 성공적일 수 있는 것, 그것 때문에 죽거나 심한 폭력을 당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핵심이다."(34쪽) 엘리베이터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일이어도 괜찮다. '작은 성공'을 쌓아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독재자의 권위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한 작은 도전이 가장 큰 변화를 낳은 사례로, 저자는 간디의 '소금 행진'을 꼽는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꿈꾸었지만, '인도를 독립시키라'며 영국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단순하고 논란의 여지없는 대의를 위해 모든 인도인이,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어 싸울 필요가 있었다. 1930년, 간디는 결국 답을 찾았다. 소금이었다."(55쪽) 영국에 세금을 내는 대신 바닷가까지 걸어가 소금을 만들겠다는 간디의 행진은, 처음에는 77명의 추종자로 시작했으나, 결국 수만 명이 동참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고 말았다.

웃음을 잃지 말라, 독재자에게 겁을 먹지 말라. 모두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핵심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작은 비폭력 투쟁을 하나씩 승리로 이끌어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임계점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풍자에 힘을 쏟는다며 냉소만 퍼뜨리고, 모든 투쟁을 '이번 투표를 위한 것'으로 만든다면, 오히려 변화는 멀어진다.

쫄지 마? 그건 기본이다. 더 중요한 건 웃음을 터뜨리되 냉소하지 않는 것이다. 간디의 소금 행진 이후 인도의 독립까지는 17년이 걸렸다 


2016-04-07

마광수, "사도마조히스틱한 사회", 『한겨레21』, 1997년 3월 6일, 제147호.

사도마조히스틱한 사회



마광수/ 연세대 강사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 머리 좋기로 이름 난 독일 국민들은, 어째서 히틀러를 자기네 지도자로 떠받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독재에 왜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히틀러는 군사쿠데타나 폭력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인물이 아니다. 여론조작을 통했든 감언이설에 의했든, 어쨌든 그는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히틀러에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접근한다. 우선 1차대전 뒤 패배감과 무력감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가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고, 또 경제발전을 위한 긍정적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영웅적 카리스마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는 언제나 난세에 출현하게 마련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때가 바로 그 ‘난세’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 뒤의 혼란기를 틈타 황제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경우다. 히틀러는 1차대전 뒤의 만성적 인플레이션과 민주정부의 무력한 통치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을 등에 업고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란기라고 해서 무조건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출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독재정치를 은근히 그리워하는 국민들의 집단적 정서가 있어야만 비로소 독재자가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히틀러의 집권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있는 이론으로 정평을 받는 것이 바로 에리히 프롬의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이다. 히틀러의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히틀러가 ‘권위’를 가진 인물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당시의 독일 국민들이 대체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이란 한마디로 말해 사도마조히스틱한 성격을 말한다.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절대 복종함으로써 마조히즘적 피학의 쾌감을 얻고,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는 가혹한 잔인성을 발휘함으로써 사디스틱한 가학의 쾌감을 얻는 심리가 사도마조히즘의 심리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홀로서기’를 도모해 보지 못하고 언제나 독재적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마치 평생 동안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식과도 같다. 종교적 가부장제도가 확립돼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나 성적 억압이 심하고 관념 우월주의가 강한 나라의 국민들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되기 쉽다. 나치즘 출현 당시의 독일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히틀러가 집권 뒤 에로틱한 내용의 서적들을 몽땅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 한 증거다. 관념 우월주의는 또한 극기주의나 금욕주의와 통하는데, 히틀러가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는 것도 그 역시 지독한 권위주의적 성격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히틀러는 ‘국가와 민족’을 섬기며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맛보았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부림으로써 사디스틱한 쾌감을 맛봤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섬기며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맛보았고, 유태인들을 학대하면서 사디스틱한 쾌감을 맛봤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곧바로 관료주의적 성격과 통한다. 윗사람에겐 약하고 아랫사람에 강한 것이 바로 관료주의적 성격인데 이는 개성없고 야심만 많은 출세주의자들이 흔히 갖고 있는 성격이다. 그들은 주체적 자아가 없기 때문에 지위에 의해서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받으려 한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가장 효과빠른 수단이 ‘보스에 대한 아첨과 절대 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력한 아버지’에 의지하는 봉건윤리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가 만연한 나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수구적 봉건 윤리가 여전히 판치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나 ‘자유화’를 아무리 소리높이 외쳐도 권위주의는 사라질 줄을 모른다. 예전에는 단순히 군사독재가 권위주의적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원흉이라고 생각하여 그 해결책의 제시도 쉬웠다. 그러나 외형상 군사독재 문화가 사라진 지금, 권위주의 문화를 없앨 수 있는 뾰족한 처방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저 ‘도덕성 회복’이니 ‘의식 개혁’이니 하는 투의 막연한 처방만 제시되고 있을 뿐 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다시 한번 금욕주의적 봉건윤리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강력한 아버지’의 관념에만 의지하려고 하는 정신편향의 봉건윤리는 자아상실을 가져오고, 성적 억압에 따른 ‘화풀이 문화’를 가져온다. 국민 각자각자가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권위주의 문화에 따른 상명하복과 복지부동의 풍조가 사라져 우리나라는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마광수, "사도마조히스틱한 사회", 『한겨레21』, 1997년 3월 6일, 제147호.

2016-03-16

[북리뷰] '알파고 쇼크', 인류의 미래를 묻는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만2천원.

'인공지능'(AI). 최근 우리 사회를 새삼스레 달구고 있는 화두다.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 대국에서 알파고가 첫 승을 거두기 시작한 후 사람들은 AI와 제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사라질 일자리 등에 대해 분분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구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던 '스푸트니크 쇼크'처럼, '알파고 쇼크'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대체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 대해, 혹은 '지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에 대해 축적되어 있는 선행 논의가 없다보니,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보도 혹은 '인문학적 통찰'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 다른가? 무엇이 우리를 유인원의 한 갈래에서 '인공지능의 창조주'까지 도달하게 한 것일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대담한 질문과 그에 답하는 서술로 인류 역사를 관통한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19쪽)

유발 하라리는 모든 논의에 앞서 '인간'이라는 범주를 탈신비화한다. 그 어떤 '인문적' 관점도 배제한 채, 오직 '호모 사피엔스'라는 유인원의 한 종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또 다른 유인원인 네안데르탈인과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을 통해 복잡하고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더욱 효율적이며 날카로운 무기와 발달된 사냥 체계를 얻었다.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로 자리매김한다.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낳았고, 잉여생산물은 그 생산물을 독점하는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이 이 시점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적 부족의 최대 규모인 150여 명을 넘어서는 사회를 구성하려면 윤리, 도덕, 법, 계급 등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원리가 필요하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질서라고 늘 주장해야"(169쪽)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되어 오던 인간의 역사는 과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었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357쪽) 과학혁명은 신, 과거의 현자, 기타 전승되는 문헌의 저자들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수천년 동안의 가정을 폐기했다. 그 결과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의 영역에까지 과학 기술의 힘으로 침범해 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농업혁명 그 자체가 장기간에 걸친 유전자 조작이었다. 알파고 등 다양한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여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는 것 또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파고 쇼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만들어왔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2016.03.29ㅣ주간경향 116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3-13

[별별시선]박근혜 vs 알파고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인공지능 알파고와 박근혜 대통령이 바둑 대결을 한다면? 당연히 알파고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세돌 9단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는 알파고인 만큼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판을 키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 전체를 무대로 삼아보는 것이다. 박근혜 대신 알파고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릇을 한다면 과연 누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나갈 것인가.

알파고가 화제라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이세돌 9단이 첫 고배를 마셨던 그 날부터 인터넷을 후끈 달군 주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이제 컴퓨터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인가?

여기서 잠시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논문의 해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알파고는 기존의 게임용 AI와 마찬가지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에 의존한다. 혁신적인 자기학습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의 바둑 기보를 연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례를 놓고 볼 때 좋은 수’를 추려낸다. 그리고 남은 선택지를 두고 계산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은 게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창의와 직관이 어떠한 종류의 계산 과정이다. 다만 사람은 그 계산을 “승부수, 감, 두터움” 같은 식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그에 대해 서봉수 9단은 이렇게 말한다. “수 자체를 모르니까 그냥 감각에 의존해서 이런 정도면 무난하지 않으냐, 이런 식의 표현을 하죠.”

이번 대국에서 확인된 것은 바둑 역시 하나의 게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 포커, 화투, 체커, 체스, 오델로, 지뢰 찾기까지, 모든 게임은 규칙을 지닌 계산 과정에 의해 진행되므로,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룰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컴퓨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년층과 ‘여론 주도 세력’인 중장년층의 반응이 갈라진다. 컴퓨터가 인간의 고유 영역인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었다고 주류 언론은 연일 호들갑이다. ‘알파고 쇼크’에 우울증에 빠졌다는 시민의 목소리,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우려 등이 이어진다.

반면 청년들은 비교적 덤덤하다. 바둑은 게임이고, 언젠가는 컴퓨터가 최고의 프로 기사를 이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호들갑스러운 우려에 대해서도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천연지능’보다는 우리를 합리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우리 사장도 알파고로 바뀌면 좋겠는데?

자, 그러므로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박근혜 대 알파고. 과연 누가 더 대한민국을 잘 다스릴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확인한바, 알파고는 기존의 선례를 충실히 검토하고, 그중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던 사례를 따른다. 그 속에서 최선의 미시적 판단을 내린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훌륭한 의사결정권자의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합리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사람이 ‘인간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무서운가? 만약 당신이 의사결정권자에 가깝다면 인공지능이 두려울 것이다. 반대로 남의 의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계’가 나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시간과 데이터가 제공된다면, 알파고가 박근혜보다 더 나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심각하다며 기업들이 신입사원 초임을 삭감하도록 한다거나, ‘증세 없는 복지’를 운운하는 것 등은, 알파고의 눈으로 볼 때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난센스다.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국정 운영을 기대한다.


입력 : 2016.03.13 21:01:11 수정 : 2016.03.13 21:1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132101115&code=990100#csidxb0730909049cf82913583dcda5ddbf8

2016-03-03

[북리뷰] 정치의 계절, 지식인의 역할을 묻는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이학사, 8천원


내가 그에게 '지식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지식인이라니, 그런 구닥다리같은 용어를 사용하냐'며 되려 핀잔을 했다. 나는 그 대화를 나눈 후 문득 궁금해졌다. 지식인이라는 개념은 진정 오늘날 효용을 다한 것일까. 20세기의 중후반부, 21세기의 초반부와 달리, 2010년대에는 그 단어가 그저 오작동할 뿐일까. 이런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사르트르 뿐이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사르트르가 일본의 도쿄와 교토에서 1965년 9월과 10월에 세 차례 강연한 내용을 정리하여 묶은 책이다. 물론 사르트르 특유의 실존주의적, 다시 말해 휴머니즘적 관점을 투영하여 재해석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들이 제시되어 있긴 하지만, 애초부터 강연을 염두에 둔 원고였던 탓에 집중해서 읽으면 전제 지식이 없어도 어렵잖게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

첫째 날 하이데거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식인에 대해 사람들이 쏟아붓는 불만과 비판을 종합하여, 사르트르는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12쪽)이라는 가설적 정의를 끌어낸다. 가령 드레퓌스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레퓌스라는 한 군인과 군 참모부의 갈등이다.

그러나 자칭 타칭 지식인들은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 그 중 군인은 없었다. 소설을 잘 쓰는 사람, 시를 잘 짓는 사람, 법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과학자 등이 '참견'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얻은 명망을 바탕으로, 그러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분야의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개입하는 사람들이다.

강연은 다음날로 이어진다. "지식인의 기능"에서 사르트르는 어떻게 특정 분야의 지식만을 쌓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선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도전한다. 만약 그 지식인이 '기능적 지식인'의 위치에 머무르려고만 한다면 그는 부르주아라는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일 뿐 진정 보편적인 지식인이 되지는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영역 속에서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입니다."(64쪽)

사르트르는 노동계급을 '보편계급'으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이러한 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보편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지 않더라도, 보편성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는 그의 말은 여전한 울림을 지닌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호남 사람, 이주민 등 다양한 이름 하에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해석'은 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의 존재를 놓고 볼 때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사르트르는 오직 글을 쓸 뿐인 작가를 다른 분야의 지식인과 다르게 여긴다. 작가의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상의 보편성을 창조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작가와 갖는 진정한 관계는 비-지식으로 남는 것"(139쪽)이라는 말은, 작가의 작품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지식인에게 그 어떤 '보편성'도 기대하지 않는다. 화끈하게 '정치적 스탠스'를 밝히고 편을 드는 것이 더욱 정당하다는 인식 탓이다. 한때는 그게 옳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인은 '보편성'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의 편에 서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한 풍토가 되살아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