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30

[북리뷰] 미러링과 표현의 자유

진실유포죄
박경신, 다산초당, 1만5천원


오래 전에 구입해 책장에 꽂아만 두고 있었던 이 책을 꺼내든 것은 한 칼럼 때문이었다. <경향신문> 8월 2일자에 실린 "넥슨 여성운동 탄압사태, 눈치들 보지 마라"를 통해, <진실유포죄>의 저자 박경신은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논의의 방향을 바꿨던 것이다. 영어의 표현을 빌자면 "Game changer"였던 셈이다. 그 칼럼을 읽고, 내가 놓쳤던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이 책을 펼쳤다.

메갈리아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일베가 여성혐오를 즐기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메갈리아 역시 일베를 '미러링'하는 과정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고 퍼뜨린다는 식으로 항변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일베를 배척하듯 메갈리아 역시 배척해야 하며, 메갈리아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혐오 그 자체는 인간의 감정 중 일부일 뿐이다. 게다가 원론적으로 따져보자면 혐오를 드러낼 자유 역시 자유이기는 하다. 그 중에서도 굉장히 소중하고 민주주의의 유지를 위해 각별히 보호되어야 할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따라서 논점은 언제 어떻게 '혐오 표현'을 통제해야 하느냐로 넘어간다. 그 질문에 대해 박경신은 이미 넥슨 여성운동 탄압사태 이전에 답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모욕적 표현들이 혐오죄에 해당할 것인가? 결국 그 기준은 "혐오표현이 혐오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한 물리적인 폭력과 실체적인 차별로 이어질 위험이 얼마나 명백하고 임박한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76쪽)

법학의 용어를 빌자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발생시킬 위험이 "명백하고 현존"해야 한다. 혐오 그 자체는 그저 감정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를 향하는 혐오가 폭력과 차별로 이어진다. 여성혐오로 인한 범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넘쳐나지만, '남혐범죄'는 실체가 없다.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통제해야 할 대상은 전자이지 후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법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논리 전개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독자들은 법원의 판결에 분노할지언정 그 판결의 논리에 대해 따지는 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분명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법치국가인데,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법치주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필자는 매우 드물다. 박경신의 <진실유포죄>는 바로 그 어두운 영역에서 빛나는 결과물이다.

이 책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그가 신문에 기고한 칼럼, 블로그에 쓴 게시물, 이후의 사태 진행에 대해 덧붙인 뒷이야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실유포죄>는 그러므로, 이명박 정권 시기와 고스란히 포개지는 책이다. 민주정권 10년을 거친 후 권력을 되찾은 보수는 법치주의를 내걸고 '검치주의'(檢治主義)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무기는 바로 명예훼손과 모욕죄 등. 심지어 아직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따라서 거짓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검찰은 허위사실공표죄를 휘두르며 반대자들의 입을 다물게 한다. <진실유포죄>는 그 시기를 겪어낸 한 법학자의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개별적인 글 꼭지의 출처는 표시되어 있지만 정작 글이 다루는 판결의 사건번호가 빠져 있다. 적극적으로 이 책을 찾아볼 정도의 열의를 지닌 독자의 지적 수준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닐까. 권력이 법을 무기삼아 휘두르는 '검치주의' 시대다. 우리는 더 공부해야 한다. <진실유포죄>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2016.08.30ㅣ주간경향 1191호

2016-08-28

[별별시선] '몰카'의 윤리학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여자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알몸을 찍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남성 위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인 여자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누구일지 추측을 하며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훨씬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대한민국은 '몰카'의 왕국이다.

이토록 '몰카 범죄'가 만연한 것은 기술적 이유 때문인가? 다시 말해, 스마트폰과 초소형 녹화 장비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탓에 벌어지고 있는 불가피한 현상인가? 자동차가 보급되면 교통사고가 늘어나듯,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CCTV부터 뿔테 안경까지 온갖 일상적 사물로 위장한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몰카'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인터넷이라는 것이 이 땅에 도입된 후,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유포한 성관계 영상은 언제나 어딘가의 하드디스크 속에 존재해왔다. 모 연예인의 성관계 장면이 담긴 'O양 비디오'부터,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청소년들의 성행위가 찍힌 '빨간 마후라' 등, 한국의 네티즌남(男)들은 '몰카' 혹은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겨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적잖은 남자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카메라와 인터넷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주요 국가들 가운데 스마트폰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할 때 소리가 나도록 규제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뿐이다. 하지만 공공장소, 특히 대중교통에서 '몰카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 역시 한국과 일본이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특히 남자들의 문제다. '몰카를 찍는 것은 굉장히 비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그걸 본다면 그 죄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는 도덕적 기준이 작동하지 않는 일종의 아노미 현상인 것이다.

그 남자들은 타인의 알몸, 성기, 항문, 성행위 장면, 심지어 배설 장면 등을 몰래 찍고 돌려보면서도 자신의 존엄성이 깎여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남의 치부를 훔쳐봄으로써 상대방을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쾌감을 느낀다. 성적 쾌감 이전에 모욕하는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몰카 범죄'의 본질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몰카'를 문제로 인식하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가령 <내부자들>은 결국 '몰카로 정의구현'하는 영화인데, 재개봉한 감독판을 포함할 때 대략 천만 명 가량의 관객이 그 작품을 보았지만, 문제의식은 커녕 대다수가 후련함과 통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최근 <뉴스타파>는 이건희 삼성그룹 명예회장의 성매매 현장이 담긴 '몰카'를 입수하여 공개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기업이 회삿돈을 '오너'의 성매매 비용으로 썼다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몰카' 공개가 과연 독립언론의 품격에 어울리는 일인지, 그 영상을 편집해서 공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지, 그런 도덕적 차원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성판매자가 아니라 성구매자를 처벌해야 성매매의 해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경한 수요억제론자다. 이건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를 옹호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쓰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하나인 그가 피해자가 되었는데도 '몰카'에 대해 이토록 무덤덤하다는 사실이 소름끼칠 뿐이다. 이건희가 당해도 다들 시시덕거릴 뿐이라면, 그 많은 '몰카'와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인가.

'몰카'는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들의 인간적 품위와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엄정한 수사와 처벌이 요구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도덕적 기준이 삐뚤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당위를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몰카'에는 우리 사회의 곯아버린 내면이 찍혀 있는 것이다.


입력 : 2016.08.28 20:44:02 수정 : 2016.08.28 20:46: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82044025&code=990100&s_code=ao122#csidxd58f4c73f0252b28b24c52e475ae150

구글 크롬에서 뉴욕타임즈 더블클릭, 텍스트 선택 안 되는 문제

사용중인 하드웨어가 터치스크린으로 인식될 경우, 파이어폭스와 달리 크롬은 뉴욕타임즈의 텍스트를 모바일용으로 인식하여 뿌리는 오류를 보여준다. 해결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주소창에 chrome://flags 입력 후 엔터.
  2. Enable Touch Events를 끈다.


말하자면 파이어폭스의 about:config 수정과 비슷한 것일텐데, 오늘 처음 알았음. 한편 이 버그는 꽤 유명한 것인데 왜 구글이나 NYT에서 수정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2를 시행하면 다른 웹사이트를 이용할 때에도 터치스크린을 쓸 수 없는 불편이 생기므로, 구글이나 NYT에서 버그를 잡는 편이 옳다.

2016-08-25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이 보이던 태도는 기존의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버리고 여성 활동가들에게 발언권을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여성 활동가들에게 넘어온 것은 발언의 권리가 아니라 발언의 의무였다. 이런 구도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돼?"라고 묻는 것은 남성 활동가들의 정치적 수동성과 무지를 변명해주는 편리한 알리바이가 되었고, "20여 년 동안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으로 사회화되어 온 무지한 남성"에게 여성주의적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은 여성 활동가들이 져야 했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겸허함을 칭찬하고, '배우려고 질문하는 자세를' 기특해 하고, 노력을 가상히 여기고, 실수를 용서해 주고, 계속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도록 보살피는 것은 이 구도 속에 있던 여성 활동가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버전의 노동이었다.

그러나 사실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과 '가르쳐 달라는 남자들'은 동일한 성별 구도의 양면이다.[각주] 이 '오빠'들은 둘 다, 여성주의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고 조직과 이념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여성 활동가가 여성 문제를 '담당'하고 '전문가'가 돼 '해결사' 구실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여성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구색 맞추기"로 동원하고, 끊임없이 여성주의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면서 정답을 요구하는 남성의 행태는 여성 활동가들을 소진시키고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주] 질문하는 권력과 대답해야 하는 고통은 다양한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수없이 실천되는 권력관계의 한 양상이다. 내가 만난 여성 활동가들 중 특히 남성 중심적 조직 안에서 별다른 여성 연대나 지지 집단 없이 활동한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로 "찍히"거나 "커밍아웃"을 한 뒤 끝없는 질문에 끝없이 대답해야만 했던 고통을 토로했다. 여고은은 주변의 "맑스주의자들이 한 달에 한 번은 시비를 걸어" 왔다고 말하면서, "자기 생각은 절대 얘기 안 하"면서 "당신은 페미니즘 진영의 대표로서 대답을 해야 된다"고 말하는 맑스주의자들의 태도를 고발하기도 했다. 타자에게 끊임없이 대답을 요구하고, '내가 물으니 너는 당연히 설명해줘야 한다'는 식의 태도는 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공분을 샀다.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서울: 이매진, 2008), 233쪽. 강조는 인용자.

2016-08-16

[북리뷰] 여성 차별의 유구한 역사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강명관 지음·휴머니스트·1만3000원

숙종 30년, 서기로는 1704년이 되던 그해, 기계 유씨 가문의 후손 중 한 사람인 유정기는 예조에 문서를 올렸다. 자신이 이미 14년 전 쫓아내어 따로 살고 있는 부인 신태영과 완전히 법적으로 결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는 것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은 이 희한한 소송에 대한 책이다.

양 부부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혼인 관계를 청산하는 법적 절차가 조선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조선이라고 이혼이 없었던 나라는 아니다. “조선 건국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즉 조선 전기에는 이혼 사례가 <실록>에서 광범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그 이혼은, 즉 “<경국대전>의 이혼이라 함은 중혼(重婚)에 관한 처벌이며, 또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경우”(28쪽)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이혼은 여성에 대한 처벌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유정기는 이미 14년 동안 쫓아내고 있었던 부인 신태영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싶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밤에 혼자 돌아다녔다고, 즉 성적으로 일탈하였다고, 그리고 시부모에게 험한 말을 하고 제사용 그릇에 오물을 섞었다고 고발했다.

유정기의 가문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고, 널리 퍼진 인맥의 힘으로 처음에는 임금인 숙종에게서 이혼 허락을 받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예조판서 민진후가 반론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장기화된다. 유정기가 내놓은 증거들은 조작된 것이거나, 조작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증인이라고 해봐야 신태영 본인, 신태영의 몸종 등 ‘양반 남자’인 유정기에 비해 낮은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의 증언을 받아주면 ‘아랫것’이 ‘윗분’을 고발하는 셈이니 신분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며, 그 증언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남편의 주장만 듣고 법에도 없는 이혼을 허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태영의 이혼 소송>은 오해를 불러오기 딱 좋은 제목이다.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신태영이 먼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위자료를 청구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조선은 유교근본주의 국가였다. 신태영은 죄인, 혹은 피의자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힌 채 ‘이혼 소송’을 겪어야 했다. 남편 유정기에게는 사회적 신분, 가문의 권세, 심지어 아내를 내쫓은 후 함께 살고 있는 첩까지 있었다. 반면 신태영은 유정기의 사별한 전처가 낳은 큰아들의 집에 머물다가 옥에 갇혀 있었고, 석방된 후에는 그 행적을 알 수 없다. 신태영이 한글로 쓰고 누군가 한문으로 옮긴 항변서, 즉 공초만이 남아 그의 영민함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정기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 여성차별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모든 제도를 중국에서 베껴왔지만 여성과 노비를 차별할 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은 높은 신분의 부인들이 재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조선에서는 이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이혼한 부인의 아들들은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했다. 문제는 그 남자 양반들 역시 어떤 여자의 자궁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양반이 이혼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들의 출세길을 막는 꼴이 되어버린다. 여성의 목을 조르던 조선왕조는 이렇게 우스꽝스럽지도 않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여성차별의 역사가 유구하게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호주제는 2008년에 와서야 폐지됐다. 신태영‘들’의 이혼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