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30

올해의 책 다섯 권

2017년에 발행되어 2017년에 읽은 책 가운데 특별히 다섯 권을 꼽아보았다.

  • 김용언, 『문학소녀』(서울: 반비, 2017)
김용언의 『문학소녀』는 전혜린이라는 문제적 작가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 문학계의 남근주의, 여성 작가에 대한 멸시, 여성 작가들이 주로 종사한다고 여겨지는 산문(에세이)에 대한 저평가 등을 다룬다. 특히 전혜린은 대다수의 동시대인들과 달리 일본의 프레임을 거치지 않고 독일어 문학을 접하고 향유하며 번역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의 눈으로 골라낸 책을 공들여 한국어로 옮김으로써, 지금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어떤 감수성, 한 남성 평론가의 언어를 빌리자면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전혜린을 (재)소개하는 대목이 책의 절정을 이룬다. 모질게 저평가당하고 매도당해온 작가/번역가, 그를 대상으로 한 국문학계의 연구 성과, 그리고 페미니즘에 목마른 독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책.

  • 김시덕, 『전쟁의 문헌학』(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7)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인 김시덕은 일본 유학 시절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異征伐記の世界)』라는 책을 썼다. 그 작업을 통해 40세 이하 고문헌 연구자에게 수여하는 학술상인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수상하였는데, 해당 학술상을 외국인이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국한 후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2015) 등으로 넓은 독자층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책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는 2016년 말 『일본의 대외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전쟁의 문헌학』은 그 후속편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동국통감』과 『신간동국통감』, 『징비록』과 『(조선) 징비록』 등 고문헌의 이름과 내용과 전래 과정이 오가는 가운데 독자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에스콰이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김시덕이 "김시덕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 바로 여기 있다는 것, 예나 지금이나 우리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타자에 모르면서 모르는 상태로 이기고 싶어한다는 것.

  • 주대환,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경기도 고양: 나무+나무, 2017)
주대환은 선거보다 정책을, 정치보다 세계관을 고민해온 사람이다. 그렇게 알려져 있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의장직을 역임하던 시절, 기존 진보 진영의 관성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실생활에 와닿는 정책을 고안하고 추진해왔다(고 한다). 그 민주노동당이 10여년의 세월동안 풍비박산나고 있던 과정에서, 주대환은 한국의 정치의 이면에 깔린 세계관 그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시작했다. 그 최초의 고민이 담긴 책이 『대한민국을 사색한다』(2008)였고,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는 그 문제의식에 구체적인 살을 붙이고 간명한 레토릭까지 추가한 작업이다. 그는 진보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물고 늘어지는 소위 '해방전후사의 인식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해방된 조국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판타지를 유지하려다보니 북한 정권의 폭압적 인권 탄압에 눈을 감고, 현실성 없는 대외 정책만을 외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방에' 혁명을 해서 세상을 뒤엎겠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나이만 먹은 채 그런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주대환은 거침없이 폭로하며, 새로운 진보를 위한 대안 서사를 제시한다. 문제는 그 서사가 기존의 것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무협지적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는 것. '사이다'에 중독되어 '적폐' 사냥에 맛을 들인 오늘날의 대중들을 과연 어떻게 설득하고 새로운 정치 지형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아직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김수빈 옮김, 박태균 해제,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서울: 산처럼, 2017)
자타공인 '지한파' 미국인이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한 마크 리퍼트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개량한복을 입은 남자에게 얼굴에 칼을 맞고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정말 알아야 할 지한파 미국인을 딱 한 사람 꼽으라면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이름을 답으로 내놓아야 하며,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바로 이 책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의 내용을 소개하고 일독을 권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책이고, 또, 예상 가능하다시피 국내 독서계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당하고 매장당한 책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은 비단 '주사파'나 'NL 운동권' 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의 모든 한국인이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역사의 피해자' 서사와 그에 기반한 반미주의를 외부인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반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로 잘 알려진 '미군 장의사 한강 포름알데히드 사건'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미국 내에서도 포름알데히드를 버릴 때에는 그냥 강물에 희석시킨다, 다시 말해 수돗물 틀어놓고 쏟아붓는다고 말이다. 해당 미국인 군무원은 일부러 한국민의 젖줄을 더럽힌 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하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포름알데히드를 처리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했고, 시위했고, 영화도 찍고, 이후에는 더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된 뉴스를 주로 접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한 번쯤은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내용이 전부 옳다고 주장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래야 '자기객관화'라는 것을 시작이라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로렌 R. 그레이엄, 최형섭 옮김,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경기도 파주: 역사인, 2017)
개인적으로 2017년은 뜻깊은 해였다.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권에서 기습적으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나는 수레바퀴에 맞서는 사마귀가 된 심정으로 반대의 뜻을 밝혔고, 그 결과 『경향신문』 칼럼니스트의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해당 매체에서 전화 통화를 통해 고지한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나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합리적이고 경제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에너지 정책에 대한 글을 연달아 썼으며, 블로그에 글을 쓸까 하다가 그냥 넘어갔는데 환경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마이클 쉘렌버거 대표와 두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적 맥락 속에서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을 읽었다. 1960년부터 소련을 방문해가며 소련 기술사를 연구해왔던 미국인 학자 로렌 R. 그레이엄이 천착하던 화두 중 하나가 바로 표트르 팔친스키였다. 소련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숙청 중 하나로 기억되는 '산업당(Industrial Party)' 사건. 그 주동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팔친스키는, 숙청 대상자가 대부분 그렇듯, 말소당한 기록 속에서 말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있었다. 그는 끈질긴 자료 추적과 해석을 통해, 제정 러시아가 교육시켰고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은 뛰어난 엔지니어가, 중후장대한 성과를 요구하는 볼셰비키와의 갈등 속에서 짓밟혀버리고 마는 역사를 추적해 나갔다. 짧지만 강렬하고 큰 여운을 남기는 저작으로, 북한 뿐 아니라 대한민국 내에서 발생한 유사 사례를 다룬 책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2017-12-29

Alles wandelt sich - Bertolt Brecht

Alles wandelt sich

Alles wandelt sich. Neu beginnen
Kannst du mit dem letzten Atemzug.
Aber was geschehen, ist geschehen. Und das Wasser
Das du in den Wein gossest, kannst du
Nicht mehr herausschütten.

Was geschehen, ist geschehen. Das Wasser
Das du in den Wein gossest, kannst du
Nicht mehr herausschütten, aber
Alles wandelt sich. Neu beginnen
Kannst du mit dem letzten Atemzug.

- Bertolt Brecht

2017-12-02

82년생 김지영, 86년생 엄홍식

유아인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최대한 '유아인'에 집중하고 싶었다. 연기자로서의 인격에만 논의를 국한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 이름은 그가 공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따라서 비판을 받더라도 페르소나의 이면에 있는 인격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유아인은 스스로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자신의 이름 세 글자의 한자 풀이를 하며 기꺼이 선을 넘었고, 따라서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한다. 86년생 엄홍식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82년생 김지영들이 착취당해온 세상에 대해.

소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82년생 김지영』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아는 베스트셀러이며, 화제작이고, 문제작이다. 일단 이 '보편적'인 인물의 프로필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김지영 씨는 1982년 4월 1일,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키 50센티미터, 몸무게 2.9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김지영 씨 출생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위로 두 살 많은 언니가 있고, 5년 후 남동생이 태어났다. 방 두 개에 마루 겸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인 열 평 남짓 단독주택에서 할머니와 부모님, 삼 남매,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았다.

딸 둘에 아들 하나. 김지영 씨 어머니의 시부모 뿐 아니라 친정어머니도 아들을 낳으라고 성화다. 김지영 씨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실패한 복권이었다. 결국 5년 후 태어난 아들에게 모든 자원이 집중되었다. 밥, 옷, 혼자 쓰는 방, 용돈, 교육비, 기타등등. "우산이 두 개면 동생이 하나를 쓰고 김지영 씨와 언니가 하나를 같이 썼고, 이불이 두 개면 동생이 하나를 덮고 김지영 씨와 언니가 하나를 같이 덮었고, 간식이 두 개면 동생이 한 개를 먹고 김지영 씨와 언니가 나머지 한 개를 나눠 먹었다."(25쪽)

가족 내에서 시작된 차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누적된다.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이 급식을 먼저 받아먹고, 더 달라고 성화를 부려 맛있는 반찬을 거덜낸다. 대학에 가도 여학생은 동아리의 '꽃'일 뿐 '활동 주체'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김지영 씨는 2001년에 대학에 들어간 01학번인데, IMF의 직접적인 타격은 극복한 듯 보이는 시절이었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닫는다. 이름만 대면 아는 번듯한 직장 다니면서 '우리 회사 와라'면서 폼 잡는 선배들이 다 남자라는 것. 그 똑똑하고 잘난 여자 선배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 그런 '사라짐'이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이라는 것.

그렇게 김지영 씨는 계속되는 차별을 겪고, 참고, 입을 다문다. 말을 아끼고 (남자들이 보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고 세상이 나한테만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한다. 그러다가 결국 애를 낳기 위해 그 어렵게 들어갔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후,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자신을 보며 남자 직장인들이 '맘충'이라고 킬킬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김지영 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다.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65쪽)

이렇게 폭발해버린 김지영 씨의 분노는 '말문이 트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 죽은 사람이건 산 사람이건, 완벽하리만치 똑같은 말투와 표정으로 그 여자들의 말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애를 낳다가 죽은, 남편이 좋아했던 대학 시절 친구에게 그가 고백했던 내용까지도, 미쳐버린, 혹은 신들린 김지영 씨는 알고 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엄마이고자 했지만 '맘충', 즉 인간 이하의 존재로 비하당했기에, 세상의 모든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책에 붙은 해제에서 여성학자 김고연주가 잘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김지영은 언제나 '말'을 빼앗기는 존재다. 학교에서 급식을 받아먹는 것 같은 사소한 문제에서마저, 남학생이 여학생을 때리고 괴롭히는 것을 선생님에게 호소할 때마저, '너는 여자니까 부당함을 참아야 한다'는 당위적이지 않은 주장이 마치 당위 명제인 양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지영은 어처구니없고 부당한 상황에서 거의 입을 닫아 버"(184쪽)렸고, 결국에는 자신처럼 입을 닫아버렸던 수많은 여자들을 대신해 말하는 존재가 된다.

애석하게도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소설이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향후 겪게 될 사건을 무궁무진하게 펼쳐갈 수도 있었겠지만, 작가는 대신 그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간다. 정신과 의사(男)는 김지영 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175쪽)고 다짐한다. "내가 평범한 40대 남자였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것"(170쪽)이라며 김지영 씨가 겪어온 고통과 차별을 '특별한 나'를 꾸며주는 장식품으로 몽땅 소비해버리고 난 후에 말이다.

마치, 86년생 엄홍식이 그랬던 것처럼.

2017년 11월 26일 오후 12시 12분에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엄홍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구 출신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보수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에서 누나 둘을 가진 막내 아들이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으로 한 집안에 태어나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살았"다고.

앞서 인용한 『82년생 김지영』의 한 구절과 비교해보자. 86년생 엄홍식이 감당하셨다는 '차별적 사랑'이란, 자신의 누나 두 명이 간식 하나를 나눠먹을 때 본인은 한 개 다 먹는 것, 누나 두 명이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비에 젖을 때 본인은 제일 좋은 우산으로 비를 가리는 것 등을 의미할 것이다. 누가 봐도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백한데, 82년생 김지영 대신 86년생 엄홍식이 외친다. 내가 더 힘들었다고 말이다.

86년생 엄홍식의 '불행 배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을 원하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둘째 누나의 이름이 왜 '방울'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가 직접 공개한 내용이고, 나는 그것을 비판하려 하는만큼, 인용하겠다.

작은누나의 이름은 한글로 ‘방울’이다. 그때까지는 내 조부모들의 귀한 자식들인 내 부모가 가진 자식들이 딸 둘 밖에는 없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엄방울’ 불쌍하고 예쁜 이름.
https://www.facebook.com/hongsik.uhm.14/posts/1985718098308225

이러한 발화 행위를 통해 86년생 엄홍식은 '엄방울'이라는 여성에게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빼앗아갔다. '내 이름이 엄방울인 이유는 내 부모가 여자인 나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이제 전 국민이 엄홍식의 누이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안다. 이제 그 누이는 자신이 여성혐오의 극단적인 피해자라는 사실을 감출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다. 남동생 엄홍식이 누이인 엄방울의 비극을 약탈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86년생 엄홍식은 친누이로부터 빼앗아온 비극을 전시한 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마치 아프리카의 국립공원에서 불법 사냥을 한 이들이 맹수의 사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맹수인 척 하는 것처럼 말이다.

착취자가 피착취자를, 억압자가 피억압자를, 가해자가 피해자를 낭만적인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되어온 패턴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86년생 엄홍식은 바로 그것을 해냈다. 누이의 비극을 팔아, 그 누이가 자신의 비극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서사화하고 발화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버렸다. 누나의 비극까지도 남동생이 무대 장치로 소비해버리는 그런 모습을, 나는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

여성들은 이렇게 착취당하면서,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서사화할 기회까지도, 착취당한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속된 말로 '돌아버리게' 만든 방아쇠가 된 사건은 '맘충'이라는 혐오 표현이었다. 86년생 엄홍식 씨는 본인에게 동의하지 않는, 비판하는, 혹은 비아냥거리는 수많은 여성들을 향해 '폭도'라는 혐오 표현을 던졌다. 이건 실수라고 볼 수도 없다. 그가 흩뿌린 수많은 트윗들 뿐 아니라, 11월 27일에 올린 게시물에 선명하게 그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SNS를 통한 저의 외침은 세속적 가치를 내려 놓고 진정한 나의 가치와 관계를 찾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저의 노력이 언제나 처럼 폭도들에 의해 ‘인생의 낭비’로 조롱 당하고 매도 당한다 해도 저는 지금의 인생을 온 힘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나가고자 합니다. 부끄럽지 않고 진실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아! 내가 여기에 ‘댓글’의 기능을 기꺼이 남겨둔다. 너희의 존재를 모두가 확인할 수 있도록. 더러워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의 손이고 너희의 입이고 너희의 영혼이다. 너희가 감히 선량한 사람들과 내가 나눈 소통을 막아서는 일을 묵시하지 않을 것이다.
https://www.facebook.com/hongsik.uhm.14/posts/1986309071582461

혹시 모를까봐 하는 말인데, 오늘날 한국어의 용례에서 '폭도'가 지칭하는 대상은 명백하다. 5.18 광주민주항쟁 참여자들 및 광주 시민, 더 넓게는 전라도 사람들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김상경이 연기한 강민우는 외친다. "여러분,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폭도'는 바로 그런 어휘다. 약자를 향해 집어던지는 흉기와 같은 단어. 그런 표현을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엄홍식은 누이의 비극을 팔아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는 한 대구 남자에 대해 분노하는 여성들을 향해 외친다. "폭도들아!"

그의 의도는 명백하다. 상대를 '폭도'로 규정함으로써 '입을 닥치게' 하겠다는 것이다. 86년생 엄홍식이 그러고 있는 사이, 82년생 김지영'들'은 점점 더 할 말을 잃어간다. 대외적으로 온갖 멋진 모습을 다 보여주는 소위 '개념 연예인'이 처음에는 여성들에게 '메갈짓'을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폭도'라고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런 대구 출신의 한 남자를 어떻게든 두둔하려 드는 가부장적 체제의 구성원들을 보며.

86년생 엄홍식이 82년생 김지영을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할까. 차별받는 주체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하고 본인과 다른 여자들이 못 해왔던 말을 쏟아내는 이들을 향해 엄홍식이 선사한 어휘의 목록을 되짚어보자. '메갈짓', '익명의 폭력배', '온라인 테러리스트 집단', '조직폭력배', 그리고 '폭도'. 이미 그는 수많은 김지영'들'을 향해 이런 소리를 해왔다. 어떤 면에서 그는 『82년생 김지영』의 진짜 화자인 정신과 의사보다도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적어도 그 정신과 의사는 '나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난감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수많은 남자 독자들의 찬사를 받은 책이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 책을, 읽었건 읽지 않았건, 다른 남자들을 향해 권했다. 그리고 또 많은 남자 연예인들은, SNS에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다양한 페미니즘 서적을 올리고 소위 '인증'을 하면서 자신의 '개념'을 증명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그들 중 그 누구도, 내가 아는 한, 82년생 김지영'들'을 향한 86년생 엄홍식의 폭력적 언행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정작 현실 속에서는 이렇게 82년생 김지영'들'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방언이 그저 '익명의 폭력배'의 행패요 '온라인 테러리스트 집단'의 깡패 놀음 취급당하고 있는데, 이름값 있는 남자들은 현실 속의 김지영'들'을 위해 한 마디 하기보다는 그냥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알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전시함으로써 제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글은 허공에 흩어진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겉돈다. 그리고 수많은 김지영'들'은 다시 할 말을 잃는다. 그 자리를 86년생 엄홍식 같은 남자들의 뻔하디 뻔한 자의식 노출이 채워넣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충분히 '불쌍한' 존재로 전시하기 위해 여성의 비극이 동원된다. 여자들의 언어는 충분히 정련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폭발하고,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86년생 엄홍식'들'은 82년생 김지영'들'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나 같은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메갈짓'을 하는 '폭도'라고.

이 역겨운 역설 앞에 나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래도 길게 쓰고 기록으로 남긴다. 86년생 엄홍식과 같은 남자들의 폭력적 언행을 제지함으로써, 더 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이 자신의 언어를 잃고 방언을 내뱉는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여성들의 언어를 박탈했는지, 그 자리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의 함성을 어떻게 매도하면서 또 소비해버리는지, 우리는 더 정확히 알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2017-11-25

유아인, 빨갱이, 메갈짓

11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던 밤, 배우 유아인이 트위터에서 주고받은 설전 중 일부다. 여성 트위터 사용자에게 농담으로 '애호박으로 맞아볼테냐'고 말했다가 설화를 치른 지 한 주만의 일이다.

평소에 페미니즘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표명해온 소위 '개념 배우'였기에, 인터넷에서 여성주의적 의제에 동참해온 여성들의 실망이 특히 크다. 그런데 25일 보도되는 내용에 따르면 대체 왜 여성들이 유아인의 저 발언에 실망하는지, 그리고 저 발언 자체가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하는 내용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잠깐 '빨갱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단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라는 뜻이 아니다. 공산주의자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몰락과 북한의 한반도 무력 통일을 추구하는 극단 세력으로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한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용납해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함의가 깔려 있다.

한국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의 진보주의자가 존재한다. 나처럼 자유주의적 원칙을 최대한 고수하고 확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서유럽식 사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말은 안 하지만 레닌주의적 노동자 혁명을 꿈꾸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중심의 무력통일을 추구하는, 한국 정부를 폭력으로 뒤엎으려 하는, 다시 말해 저 '빨갱이'라는 개념 정의에 부합하는 사람이, 과연 단 한 명도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진보라고 넓은 의미로 불러왔던 사람들 중에는 진짜 '빨갱이'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실제로는 진보의 바탕에 깔린 자유주의적 이념과 제도(일당독재가 아닌 다당제, 자유투표, 사생활의 자유, 사유재산제, 기타등등)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는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면 손해라는 판단 때문에 민주적 가치에 입각한 진보주의자 행세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빨갱이'라는 표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과격한 폭력적 혐오발언은 진짜 '빨갱이'들이 숨게 만들고, 도리어 다양한 범주의 진보주의자들을 윽박지르는 효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절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가령 함석헌 같은 경우, 그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반공주의자였지만, 단지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낙인이 찍혔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서도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은 금새 따라붙었다. 세상에 천주교 주교가 어떻게 유혈혁명에 찬성하는 공산주의자일 수 있겠느냐는 이성적 반론은 용납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단 한 차례도 버리지 않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자유 선거를 원치 않고 자신들이 영원히 독재하고자 했던 세력에 의해 '빨갱이'로 매도당해 왔다.

진보주의자라면, 아니 민주주의자라면 '빨갱이'라는 표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그런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표현을 입에 담는 것 역시 적극적으로 제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수많은 진보 담론이 수면 위로 올라와, '담론의 자유시장' 속에서 어떤 것은 살아남고 어떤 것은 도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메갈짓'은 어떨까? 오늘날 여성주의의 토론에 있어서 '메갈'이라는 딱지는, 진보주의에 있어서 '빨갱이'라는 딱지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공산주의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동일임금 동일노동을 원하기 때문에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군사독재세력은 '너 빨갱이냐?'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렇게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가 OECD 최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여성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임금 격차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해법은 어떻게 구해야 할지 토론하는 대신, 남자들은 이죽거리며 묻는다. '너 메갈이냐?'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 사법 절차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멸시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그 여자들이 그냥 닥치고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질문 아닌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너 메갈이지?'

이 시점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정상적인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여자들에게 '메갈이냐', '메갈짓 하지 마라'는 식의 표현이 먼저 원천봉쇄되지 않으면, 여자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공포를 표출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마치 '너 빨갱이냐'라는 표현을 원천봉쇄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진보적 의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도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문자 그대로 체포 구금 고문 살해당할 수 있었다. 국가 권력의 직접적 폭력에 노출된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남성주의적 구조가 여성들이 늘 겪는 폭력과 불안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일부 남성'들의 성폭력, 강간, 폭행, 살인을 방관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메갈년이다'라는 표현을 '선량한 나는 그렇지 않겠지만 누군가 너를 강간하더라도 나는 수수방관하겠다'는 맥락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남자, 가령 유아인이 '메갈짓'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러한 야비한 협박의 언어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 같다.

나는 메갈리아에 찬성한다. 마치 1960년대의 백인들 중 누군가는 말콤 X의 급진적인 흑인 해방 운동에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던 것처럼. 여성들이 '여성'의 정체성을 걸고 벌이는 해방 운동에 대해 남자들이 찬반을 논하는 것 자체가 실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는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여성의 이름으로 울려퍼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유아인의 발언에 반대하고, 그에게 반성과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가 '페미인 척 메갈짓 하지 마라'고 하는 것은 '진보인 척 빨갱이짓 하지 마라'던 지난 시대의 군사독재 옹호자들과 다를 바 없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차이 이전에, 생각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게끔 하는 기본적인 룰이 있다. '메갈짓'이라는 낙인은 그 룰 자체를 부정하는 표현이다.

설령 유아인이 '메갈짓'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면, 저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남자에게만은, 언제나 너그럽게도 실수를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유아인은 저런 발언을 하고도 다른 여성 연예인처럼 매도당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남성의 특권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남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의 편을 들어야 한다. 남성의 특권을 가장 정의롭게 사용하는 방법은 남성의 특권을 이용하여 억압당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아인 씨의 심사숙고와, 고민과, 반성과, 사과를 원한다. '모든 국민 여러분', '팬 여러분', '걱정해주시는 모든 분들' 따위가 아니라 오직 '여성'을 수신자로 한 사과의 메시지 말이다.

2017-11-10

"층간 내리사랑"과 국가의 역할

KBS 1FM 라디오를 듣던 중 공익광고가 흘러나왔다. 자기 집에서 살살 걸어다니고, 악기 연습을 자제하는 등 조심스럽게 생활하는 사례들을 죽 나열한 것이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이어지는 멘트.

"위층은 아래층을, 아래층은 그 아래층을 먼저 생각하는 층간 내리사랑. 이웃간의 새로운 사랑법입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적어두었다. 위 인용문은 공영방송 KBS 라디오 공익광고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친 것이다. 층간소음이 심하니 이웃간에 서로 '배려'해야 한다며,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하자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은 광고를 하고 있다.

이 광고는 대한민국에서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실패가 어떻게 시민사회의 짐으로 전가되고 있는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은연중에 강조하거나 미화한다.

아파트 층간소음은 구조적 문제다. 사회경제적 구조 이전에 건물의 구조상 발생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지어지는 아파트 중 대다수는 벽식 구조로 지어져 있다. 별도의 기둥 없이 아파트의 벽 자체가 중량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벽식 건물은 공사 속도를 내기 좋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인근의 진동이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층간소음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절대다수의 아파트가 애초부터 층간소음이 울려펴지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벽식 구조에서는 바닥 울림이 고스란히 벽을 타고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맹점이 있다. 쉽게 말해 진동을 일으킨 바닥과의 접점이 모든 벽으로 넓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달이 잘 된다. 특히 벽식 구조라면 7층의 쿵쿵대는 소리가 5층·4층까지는 물론, 거꾸로 위로 8층으로도 더 잘 전해진다. 반면 기둥식은 벽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핵심은 기둥과 보이다. 바닥의 충격음, 진동이 보와 기둥으로 분산된다. 바닥 충격이 기둥을 타고 전달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철승 연구원은 “네모난 상자를 두드리면 벽이 공진현상을 일으켜 진동이 증폭된다. 벽식 구조 아파트가 이런 형태다”라며 “구조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바닥 두께나 차음재에 치중해 왔다”고 지적했다.

전병역, "‘구멍뚫린’ 층간소음, 대안은 기둥식인데…", 경향신문, 2016년 8월 20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01832011&code=940100

기둥식 건물은 벽식 건물에 비해 공사비가 많이 든다. 같은 높이의 건물을 지을 경우, 벽식으로 지어야 더 많은 세대를 우겨넣을 수 있다. 기둥식으로 지으면 층고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대별로 부담해야 할 돈 또한 늘어난다. 최종적으로 그 비용은 소비자인 주민이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답일까? 아이가 뛰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데, 자기 집에서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조심조심 까치발로 다녀야 하는 상황이 정상일까? 서울 시내 아파트의 경우 수억원씩 하는데, 그 돈을 들여가며 자기 집에서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해야 하나?

이것은 전형적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문제다. 리스크를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분명 존재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층간소음이 발생하지 않을만큼 확실한 기준을 만들어 건설사를 규제하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하면 모두가 편해지지만, 만들고 정착시키는 비용을 아무도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는,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 말이다. 그러한 역할을 하라고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가는 그 세금으로 군대와 경찰과 행정 조직을 꾸려나간다. 공익을 위해 정부가 설정한 넓은 의미에서의 규제 외의 영역에서 국민은 자유롭게 거래하고, 영업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

KBS 1FM에서 흘러나오는 공익광고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따위 공익광고를 통해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오늘날 한국인의 거주 형태 중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의 건설에 있어서, 대체 어떤 구조적 하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층간소음에 의해 고통받는지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을 규제함으로써 개인들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너희들끼리 친절하고 행복하게 지내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와중에 동원되는 수사법이 가족주의적 상하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집 사는 사람은 아랫집 사는 사람의 손윗사람이 아니다. '내리사랑'이라는 표현을 동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꼭데기층 사는 사람은 단군할아버지라도 되는가?

이런 식의 '개혁'은 폼이 나지 않는다. 건설사 뿐 아니라 자신들이 내야 할 분양가가 높아질 우려를 느끼는 아파트 소비자들 역시 반발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재벌 회장 몇 명 불러놓고 꾸짖는 모습 보여주고, 감옥 보내고, "재벌 혼내느라 늦었다"고 공정위 위원장이 말하는 그런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웃사랑은 '내리사랑'도 '치사랑'도 아니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수평적 관계다. 그건 국민들끼리 알아서 할테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실태 조사와 그에 따른 엄격한 규제다. 물론 멋지지도 않고 폼도 나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국가의 역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