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26

Helene Grimaud's piano recital


part 1


part 2

부조니가 편곡한 바흐의 D단조 샤콘느를 헬레네 그뤼모가 연주함.

2007-04-21

사건 자체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로

이래서 안티조선이 일개 정치인의 것으로 포섭되지 말았어야 했다는... -_-;; 특히 "레츠고 홉키스" 압권!

뭐야? '한국' 신문이야 '미국' 신문이야?

2007-04-14

거리 포교의 해악

내가 정말 그런 상황을 반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귀찮아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 포교가 나쁘다는 것은, 오가는 길에 아니면 벤치에 앉아있는 내게 말을 거는 그 사람이, 너무도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나는 인간에 대해, 거리 포교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우리는 아무 기대도 할 수 없게 된다.

인용: 테리 이글턴

동정이 홉스, 흄, 루소의 경우에서처럼 자아의 상상적 영역에 머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덜 개인적이고 더 익명적인 '비인간'(non-human)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포'는 바로 이 '비인간'의 차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자아의 폐쇄회로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혹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폐쇄적 관계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타자를 그(녀)가 흉물스럽다는 바로 그 이유로 동정할 수 있어야 하고, 눈먼 오이디푸스나 미친 리어를 바로 그 정나미 떨어지는 비인간적 모습 그대로 동정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단히 '비인간적인' 동정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다. 유태-기독교 전통은 이 비인간적인 동정을 사랑의 율법이라 부른다. 구약 성서를 의식(儀式)을 고집하는 것으로 보고 신약성서를 사랑과 내면성의 힘으로 구약성서의 율법지상주의를 물리친 것으로 보는 것은, 세련된 형태의 기독교적 반유태주의다. 사실은 구약 성서의 유태인들도 사랑의 율법을 지지한다. 예수는 독실한 유태인으로서 자신이 사랑의 율법을 깨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천하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한다. 예수는 의무 대신 감정을 주장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런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다.

미성숙한 아이들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 바울은 이런 이유에서 법을 대부분 아이들과 관련된 문제로 보았다. 따라서 윤리가 인간을 꾸짖고 칭찬하는 권위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인간은 아이들은 고사하고 개보다도 그리 많이 발전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는 율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래야 그 치명적인 법의 무게에 눌려 '죽게 되어' 결국 그 법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예술의 규칙처럼 법은 우리가 그것 없이도 자발적으로 덕을 실천하는 습관을 가질 정도가 될 때 완성된다. 역시 예술의 규칙과 마찬가지로 법은 우리가 언제 법을 버릴 것인지를 알려 준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에게 사전이 필요 없듯이, 우리가 일단 덕을 지닌 존재로 성장하면 율법 책을 줄곧 펴 놓지 않아도 된다. 신약은 또한 우리에게 구원이 예배가 아니라 윤리(굶는 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병자나 죄수를 방문하는 따위)와 관련된 문제라는 인식을 주는데, 이에 따라 의식(儀式)의 중요성은 줄어든다. 그러나 법의 논리적 완성은 죽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을 죽여 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어떻게 법의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이 농담을 재미있어 해!"라거나 "4초 안에 질투심을 느껴!"라는 말처럼 터무니없이 않은가? 낭만주의자들이 오해했듯이 동정이 주로 감정의 문제라면 확실히 그럴 것이다. 일부 윤리학자는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 본다. 상상력이라는 모방 능력에 의해서만 타인의 느낌을 알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을 자신처럼 대접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겠지만 여기서 윤리학과 미학의 경계는 흐려지고 양자는 서로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아보았듯이 동정은 감정이입의 문제가 아니다. 동정이 감정이입이라면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상상계의 옹호자들은 실재계의 투사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누구도 내 애완동물의 배를 갈라 죽인 자에게 내가 따뜻한 감정을 품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그를 정당하고 인간적으로, 즉 그가 애완동물에 했던 식과는 다르게 대할 것을 기대할 뿐이다. 그런데 누구라도 내 애완동물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은 무의식적 욕망처럼 대상의 신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의미에서 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사랑은 포스트모던식으로 서로의 문화적 종족적 특수성을 존중하며 민감하게 조율하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문화 따위는 무관하게 나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정은 무정할 정도로 비인격적이다. 동정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개인을 존중하지 않으며 가족도 존중하지 않는다. 사랑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전혀 없다. 신약 성서는 기독교 보수주의자들과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처럼 숭배하는 가족과 성(性)에 대해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딱히 해야 한다면 신약은 분명 가족에 대해 적대적인 말을 할 것이다. 신약은 우리가 가장 가깝고 가장 아끼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사랑하거나 동정하라고 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건 가족 간의 사랑은 가족 바깥에서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무일 뿐이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의 애정은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제 자식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물론 모든 이에게 자연스런 애정을 갖게 되면 자식 사랑에 도움이 되겠지만, 자식 사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에서 햄이 자기를 왜 낳았냐고 힐난하듯 묻자, 내그가 너같은 애가 나올 줄은 몰랐다고 대답하듯이 말이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므로 전형적인 사랑은 친구가 아니라 이방인이나 적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가 타인을 상처투성이의 역겨운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적으로 만나는 셈이다. 어쨌거나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은 섹스나 초콜릿을 즐길 줄 안다고 자격증을 받는 것과 같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또 하나의 나를 사랑하라는 의미라면, 그것은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이처럼 상상계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이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음식물로 자기 배를 채우거나, 자신을 스스로 높게 평가하거나, 심할 정도로 이기적이 되는 것에 비하면, 자신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게 그가 자신을 대접하듯 나를 대접하겠다고 말한다면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블래즈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에 대한--역자) 강한 욕망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신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 있으되 우리 자신은 아닌 누군가를 사랑"(Blaise Pascal, Pensees (London, 1995), p.194.)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것을 실재계라 부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든 도덕적 지저분함 속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타인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의 상상적 복제품으로서가 아니라 타인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계가 아니라 실재계 속의 그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속에 있는 "비인간"--우리 자신의 핵심에도 존재하는--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쉽기는커녕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감당해야 하지만 우리 능력으로는 버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타인을 실제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그 모든 실존적 추악함과 함께 받아들이는 이와 같은 냉담함(impersonality)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이 보다 해로운 의미에서 추상적이 되는 것--즉 특정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 전혀 무관한 난잡한 개방성이 되는 것--을 막아 준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비참한 내가 아니라,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끔찍한 나를 사랑해야 한다. 게다가 이렇게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듯, 무조건성은 또한 비상호성을 의미한다. 계명은 "사랑하라, 그러면 그 보답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거나 "당신에게 지겨울 정도로 비굴하게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그저 "사랑하라!"이다. 사랑은 이처럼 인간 상호간의 결과를 계산하기를 단연코 거부하고, 상징계의 통제된 균형인 수입과 지출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폭력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도 비인간적이다.

사랑이 법이라면 사적 감정과 공적 의무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 그리하여 사랑은 사적 영역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진입한다. 부르조아 사회에서 이들 영역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은밀하게 관련된다. 감정은 사적이고 자의적인 반면, 공적 의무는 돌에 새겨진 듯 엄격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정도 체스 게임처럼 이성적일 수 있고, 공적 의무도 머리 스타일처럼 자의적일 수 있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별이 이처럼 와해된다면 거기서 몇 가지 중요한 윤리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그중 일부는 사회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관대함이 공적 의무가 된다. 즉 나는 당연히 내 요구에 대하여 사람들이 단순히 의무적으로 표명하는 관심 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에게는 자비를 요구할 권리,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이제 비상호성은 일상의 문제가 된다.

사랑이 법이라는 주장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리,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하리"라는 W. H.오든의 다소 과장된 시구--그는 나중에 이를 부정했다--는 어쨌든 우리가 협동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정치적 진실을 포착한 것이다. 철학자들은 사실에서 가치로 나아갈 수 있는지 곤혹스러워 하지만, 아마도 바로이것이 그런 이행이 가능하다는 예상치 못한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처한 물리적 상황은 우리가 서로를 소중하게 여길 때만 지속가능할 것이다(나는 이것이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해결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물질적 상황이 이대로 지속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보게 해 주는 무엇인가가 그 상황 속에 존재함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각주). 그와 같은 가치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사실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발전하기 위해 애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는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도 애정이 필요할 지경이 되었다.

305 페이지. [[우리 시대의 비극론]], 경성대학교 출판부, 이현석 옮김, 2006

2007-04-13

The Wild Ones - Suede(1995)



"The Wild Ones"

There's a song playing on the radio
Sky high in the airwaves on the morning show
And there's a lifeline slipping as the record plays
And as I open the blinds in my mind I'm believing that you could stay

And oh if you stay I'll chase the rainblown fields away
We'll shine like the morning and sin in the sun
Oh if you stay
We'll be the wild ones, running with the dogs today

There's a song playing through another wall
All we see and believe is the D.J. and debts dissolve
And it's a shame the plane is leaving on this sunny day
Cos on you my tattoo will be bleeding and the name will stain

But oh if you stay we'll ride from disguised suburban graves
We'll go from the bungalows where the debts still grow every day

And oh if you stay I'll chase the rainblown fears away
We'll shine like the morning and sin in the sun oh if you stay
We'll be the wild ones running with the dogs today
We'll be the wild ones running with the dogs today

2007-04-10

부활 (2005, KBS2, 박찬홍 연출, 김지우 극본)

1.

비극의 정의를 단박에 내리는 것은 어려울 뿐더러 거의 불가능하며 종종 어리석은 일이지만(테리 이글턴, [[우리 시대의 비극론]] 참조), 여기서는 편의상 '오이디푸스 왕'처럼 주인공의 몰락과 붕괴를 필함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서적 공감을 일으키는 어떤 작품을 일컫는다고 일단 규정해보자. 그렇다면 '부활'은, 그것이 남기는 진한 비극적인 감동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비극이라기보다는 복수극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모든 복수를 끝마친 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남으로써 서하은은, 아마도 다시는 이 세상 사람으로서 평화롭게 살 수 없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덕적으로 몰락하였거나 인간적으로 붕괴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은이 저지른 가장 크면서도 막대한 죄악은, 주변 사람들을 속여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희수를 이용하여 자기 아버지를 등쳐먹게 만들었다는 것 뿐이며, 그마저도 공원에서 희수의 칼에 찔림으로써 공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대속을 한다. 게다가 그는 끝까지 희수의 죄를 덮어주고 있고, 그 마음을 알기에 희수 또한 하은과 관련된 모든 진실을 철저히 은폐한다. 그 외의 부분에서 하은은 거의 전적으로 결백하다. 신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가는, 혹은 달라진 신혁의 모습에 사랑을 느끼는 강주를 이용하지도 않고(오히려 강주가 경찰서에서 정보를 캐내는 모습이야말로 타인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일 터이다), 은하 앞에 부끄러울만한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신혁이 풀어내지 못하고 있던 노사갈등마저도 '남자답게' 해결한다.

그렇기에, '내가 강혁이 같은 일을 겪었다면 세상에 적응할 수 없을 거야'라는 공감대가 확실하게 형성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던 서하은이 아닌 그 어떤 존재로 전락하였으리라고 생각하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은하의 곁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죽음과 동생의 죽음을 동시에 겪고, 또 다시 살아나 죽은 자와 산 자의 복수를 모두 감행하는 과정을 통해, 일반적인 사람의 범주 안에 포함되기 어려운 그 누군가가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은이가 은하의 곁으로 '못'돌아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못하다'라는 단어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고, 하은이를 옭아매는 굴레는 제 어미와 동침을 하고 제 아비를 죽인 자의 그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2.

서하은이 아닌 유신혁이 되어 돌아온 그는, 안비서에게 '여자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고 대답하고,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 잔'을 권하며, 밀가루 알레르기마저도 극복하는 중이라고 둘러댄다. 시청자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모든 이야기들은 등장인물들이 알고 있던 유신혁의 맥락을 뒤엎으면서 그 위에 서하은이라는 인물을 새로 기입하는 과정과도 같다. 거기서 발생하는 불협화음, 그 삑사리들을 감지해내는 주변 사람들. 하지만 하은은, 복수라는 미명 하에 죽어도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지는 않다.

희수의 경우가 있는데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마왕'을 보자. 오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승하는, 몇 명의 사람들을 과실치사범으로 만들어놓고 그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민다. 한 인간의 신뢰를 이용하기 위해, 그가 자신을 신뢰해야만 하는 상황에까지 타인을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그렇기에 잠시 첨언하자면, '마왕'이 깔아놓고 있는 인물의 내면과 어두움은 '부활'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짙고 무겁다). 그에 비하면 애초에 사기꾼이었고 아버지를 보고 싶은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으며, 정 붙일 곳을 찾지 못해 내내 칭얼거리던 희수에게 같이 사기를 치자며 접근한 것은, 희수 또한 절대 결백한 존재는 아니므로, 비교적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하여 하은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 때마다, 옛 동료들과 가족들에게 신분을 밝히고 그들에게 허락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를 제공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이 너무도 추하고 부끄러워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다가 타락해버리는 식이 아니다. 수철이, 경기도 반장님, 급기야는 은하까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지만 하은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복수를 도와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앞에 부끄러울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거나, 그렇더라도 잘 은폐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앞서 나는 하은이 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죄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 때문이다. 꼼꼼하게 읽지 않았지만, 강명석은 그러한 승화를 삼위일체의 코드와 연결시켜서 해독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종교적인 승화가 같은 환희와 해탈 대신, 현실에 함부로 침투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누군가의 비애가 그렇게 짙게 담겨져있는 한, '부활'의 엔딩을 보며 '완성'이나 '재림'을 떠올리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3.

서하은이 서하은으로서 살아 복수하는 동안, 신혁의 존재는 서서히 묻혀버렸고, 나는 거기서 드러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비극을 느낀다. 자신의 무덤에 찾아온 형을 바라보며, '형이 남아서 다행이야'라고 말해야만 했던, '유신혁'을 좋아한다고 말하게 된 여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는 아니라는 걸 계속 확인해야만 했던, 신혁의 영혼에 대한 것이다. 하은이 신혁의 이름을 달고 또 다른 하은이 되어 사업을 운영하고 복수를 진행하는 동안, 신혁의 존재는 점점 잊혀져가는 것만 같아서 참 안타까웠다.

단 한번도, 결단컨대 단 한번도, 하은은 신혁을 연기한 적이 없다. 다만 신혁이의 빈 자리를 자기 나름대로 채워나갔을 뿐이다. 죽은 쌍둥이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서 복수를 기획하는 여타 장르물이, '합체'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면적인 불협화음에 어느 정도 무게 비중을 둔다는 점을 상기하자. 물론 그는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을 초인적으로 억누르고, 은하가 빚어온 만두를 눈물과 함께 삼키며, 안비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은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인간에 대한 불신에 빠져드는 모습 등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요컨대 신혁이로 살아갔던 기간 동안, 하은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었을지언정 자기 자신이 아니어야만 했던 어떤 순간을 경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혁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동시에, 신혁이 자기 자신 안에 처박혀 살아가게끔 한데 일조한, 신헉이 어머니에 대한 언급도 다소 가볍게 지나가버렸다는 인상을 남긴다. 밀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신혁에게, '아차 내가 또 깜빡했네'라며 자꾸 만두국을 끓여주는 것도 그렇고, 화장대에 앉아 보란듯이 서형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렇다. 신혁이는 너무 예민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 없는 결혼을 한 어머니를 제쳐두고 새아버지에게 정착할 수도, 또 자신에게 따스하게 대해주는 새아버지를 접어두고 어머니에게 헌신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꼭 빼닮은 형이었으며, 어머니는 그 사실을 계속, 가학적으로 그리고 피학적으로 상기시키고 있지 않은가.

원수의 딸을 데리고, 자신의 자녀로 승인하고, 강인철 회장을 버린 채 떠나버리는 모습에서 지독한 결연함이 느껴졌던 건 사실이지만, '부활'의 이면에 감추어진 신혁이의 비극에 그 어머니가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작품에서 직접적인 언급이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아들과 남편을 가슴에 묻고, 기만당한 채 살아야 했던 한 세월과 그 결과 태어난 딸까지 떠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너무 빡빡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지만, 그가 신혁의 죽음보다는 강혁의 부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어머니의 사랑도 공평하지는 않고,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문제이지만, '부활'은 거기까지 다루고 있지는 않다.



4.

'부활'은 드라마라는 장르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기 자신의 죽음까지 딛고 일어나 복수를 해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로서, 완결적이고 또 완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영 후 2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까지 지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약하자면, 장르로서의 비극과 복수극 사이에 어떤 층위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고전적인 비극을 능가하는 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물론 하은이는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을 짓까지, 복수라는 명목이 있다 해도, 저질러버리거나 할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신혁이 또한, 너무도 움추려든 채 스무해 남짓한 인생을 살아온 탓에, 자기 대신 살고 있는 형이 압박감을 느낄만한 어떤 흔적을 남겨뒀을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작품은,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한 남자의 그것으로 변해갔다고 나는 느낀다.

작품 끝난 후 있었던 한 술자리에서, '내가 신혁이한테 너무했지...'라고 조용히 읊조렸던 김지우 작가님의 마음도, 어쩌면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마지막 말도 남기지 못하고 '형'이라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스러져야 했던 신혁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와중이었다. 내가 지적하고 있는 이 문제가 정말 '문제'였다면, 아마 극본을 쓰는 과정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사람은 작가님 본인이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지면에 옮길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비평가로서의 자세고 뭐고를 다 떠나서, 비록 가공의 인물일지라도, 누군가를 계속 안고 살아야 하는 누군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부활'은, 지금껏 내가 뭐라고 했건, 그런 드라마이다.

아기공룡 둘리



밑에 달려라 하니랑 같은 경우 -_-;;

2007-04-09

달려라 하니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 방영하고 있거나 했다고 함 -_-;;

2007-04-08

고전 문학의 현재성

한 문학 작품이 가리키고 있는 바가 인간의 보편적인 무언가에 맞닿아있으며, 그리하여 그 주제 의식이 현재성을 갖는다는 것과, 그냥 그 작품 자체가 보편적이며 따라서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자는 옳지만 후자는 타당하지 않다. 우리가 흔히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작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을 철저하게 관찰하고 연구하여 품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작품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것은 그 당시의 모습을,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를 불문하고, 파악하기 위한 훌륭한 참고 문헌이 된다.

가령 오만과 편견을 살펴보자. 거기서 사용되는 영어의 용법은 현재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civil, manner, agreeable 따위 단어의 용례는 진정 너무 달라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후 맥락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 경우, 제인 오스틴이 꿰뚫어본 인간의 본질이라던가, 그가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는 여성들의 심리 변화 등이 보편적이며 따라서 현재성을 지닌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지만,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 자체가 현대 영어로 작성되고 있는 소설들과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읽혀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타당성 없는 말이 된다. 아무리 지금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던 독자들과 동등한 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그 시대를 정확하게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의 노고를 폄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불멸의 걸작들이 대부분 그렇다. 훌륭한 작품이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지만, 똑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철저히 그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고전을 직접 읽는다는 것은 많은 한국어 화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피곤한 일이다. 원서를 직접 접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대개 그 언어로부터 현대 한국어로 옮겨진 형태로 문학의 고전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렇기에 고전이 갖는 자기 시대에 대한 천착을 체감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 화자가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는다고 해보자. 제아무리 언어 감각이 탁월하고 꾸준히 독서를 해 온 사람이라고 해도, 그 작품이 쓰여지던 당시의 생생한 언어의 맥락에 빠져들어 그 맛을 음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주제를 완벽하게 관통하며 그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 하나가 이후의 모든 창작을 가로막는다면, 한국의 역사소설은 임꺽정 이후 아예 맥이 끊겨야 정상일 터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고전을 직접 읽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있는데 내가 뭐하러 인간의 영적 타락과 고뇌에 대한 작품을 써?'라던가, '밀고 당기는 연애물을 대체 왜 쓰는지 모르겠네, 그냥 제인 오스틴을 읽으면 되는 거 아냐?'라는 식의 발상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완벽하게 같은 주제 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비슷한 인물 구도를 깔아놓고, 심지어는 몇몇 문장을 고스란히 베껴쓴다 해도 문학 작품은, 그것이 탁월하게 작성된 것인 한 언제나 서로 다르다. 또한 작가들은 창작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언어의 풍경을 정제된 형태로 기록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고전 문학에 대한 존중을 넘어, 그 위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창작자나 자신의 노력을 폄하하고 의지를 깎아내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다지 올바르지 않으며 지적으로도 탁월하다고 볼 수 없는 견해이다. 진정 위대한 작가들은 그런 '슬픔의 해석학'에 빠져들지 않고, 그냥 자기 언어로 글을 썼다. 고전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2007-04-05

부모와 농촌

농촌을 척박하게 만들면 도시에 사는 자신들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착각은, 근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자신의 부모를 관념적으로 농촌과 결부시키는 개념적 착각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부모가 농사짓는 사람들 중에 이런 소리 하는 경우가 많다"는 우석훈의 관찰은, 이러한 사회적 무의식이 그리 복잡한 경로로 생성된 것이 아님을, 다시 말해 그냥 있는 현상에서 출발하여 일반화하고 있는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결국 그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나오는 그 소년 새끼같이, 제 애비 애미를 끝까지 털어먹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안정도 됐겠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수입차를 마음대로 타고 다닐 수가 없고 아들내미 딸내미 데리고 가서 아웃백에서 칼질 한 번 할 때 너무 값이 비싸다는 것 정도니까, 시골에 있는 노친네들이 농사를 때려치우게 함으로써 그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다, 뭐 이런 소리.

부모의 희생은 공짜다, 라는 사고방식이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 농촌을 희생시켜서 도시민들이 수준 높은 소비생활을 영위하자는 집단 이기주의가 근절되기도 어렵다. 해방 직후, 혹은 일제 강점기를 거친 세대들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잘못 시킨 것이다. 헌데 그 최종적인 파국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다름아닌 지금 중고등학교에 다니거나 갓 대학 졸업장을 딴, 아낌없이 털어먹던 그들의 자식들이다. 그 날이 오면, 아낌없이 털어먹던 이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노라고 정신없이 항변하고 있을 것이다.

2007-04-02

대단히 잘못된 비유

'한미 FTA가 14개월간의 진통을 겪은 후 체결되었다'는 말은, 그 어떤 포유동물도 새끼를 잉태한 직후부터 진통을 겪지는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출산 직전에만 겪는 현상이라는 점을 도외시함으로써, 이 협상이 2005년 말까지는 거론된 적도 없는 급조된 것이라는 사실을 절묘하게 은폐한다. 잘못된 비유가 갖는 정치적인 맥락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