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6

[별별시선] '반미'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劒)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배를 타고 가다 물에 칼을 빠뜨린 사람이, 그 자리를 표시한답시고 뱃전에 칼집을 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배가 움직이는데 배에 표시를 해둔다 한들 물에 빠뜨린 칼을 찾을 수 있을 턱이 없다.

2015년 대한민국 진보 진영의 오늘을 묘사하면서 이 고사성어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의 진보, 좀 더 넓게 잡아 범야권은, NL과 PD를 막론하고 넓은 의미에서 ‘반미주의’라는 큰 배에 탑승해 있다. 그들이 눈과 귀를 막고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있지 않은 사이, 반미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는 끝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굉장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과 TV를 통해 주요 외신을 검토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지난 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상원의원 34명을 확보했다. 의회에서 절차를 밟아 지난 7월14일 최종 타결된 이란 핵 협상을 엎어버리려던 공화당의 의도는 실현 불가능하게 됐다.

미국의 중동정책이 큰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은 혈암(shale)에 갇힌 석유를 ‘프래킹’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40년 만에 원유를 수출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말은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밖에 중동 산유국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략적 가치가 급락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칼럼이 지난 2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우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절친,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이 이슬람국가 혹은 다양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해왔음에도 미국은 그 사실을 올바로 지적해오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석유에 중독돼 있었고 중독자들은 마약판매상에게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을 비난하던 바로 그 논리다. 미국은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 때문에, 인권과 평화를 위해 개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중독을 끊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 많은 전쟁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은 군사적 기반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서구의, 특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유 중독에서 갓 벗어난 미국이 왜 중동의 문제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입을, 마치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여겨왔다. 중동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이 발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섬세한 맥락을 고려해 정책을 제시하고 레토릭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면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해답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반미주의자 김기종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를 반대한다며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 공화당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그만큼 미국 국민들이 ‘세계의 경찰’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미국도 바뀌고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반미주의만큼은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하던 방식대로 미국에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미 미국은 거기에 없다. 낡은 반미주의로는 오늘날의 세계가 설명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스스로 변해야 할 때다.


입력 : 2015.09.06 20:52:10 수정 : 2015.09.06 20:56: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62052105

댓글 6개:

  1. 이번 미국과 탈레반의 평화협정도 이제 더 이상 미국이 중동에 대한 영향력/관리를 이전처럼 하지 않겠다는 방향이 한번 더 선명하게 나타난 것일까요.

    저는 오바마의 셰일가스 개발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원래 중서부에 지진은 거의 없었던 걸로 아는데 셰일가스 개발을 한 이후 오클라호마를 비롯해서 지층이 약해져서 지진이 났다는 기사를 읽었거든요. 약 2년~3년 전에.
    그렇지만 미국 경제로서는 큰 날개를 달았죠.

    참, 주말에 에 쓰신 혐오에 대한 칼럼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적지 않은 종교 그리고 힌두교의 경우 계급이 높을 수 록 섭취하는 고기를 제한하고 아예 먹지 않는 층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나에게 가까이 오는 게 싫어.'를 넘어서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섞이는 것 싫어.라는 관점과 해석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참고로, 작년 여름에 한국 갔을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X빵 봤어요.
    그것도 장사를 휴게소 화장실 옆에서 하시더라구요. 하나도 안팔리구요.
    애타게 휴게소 방문자들에게 X빵이예요! 하시는데.. 저도 안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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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이 중동에서 손을 떼는 것은 이제 시간의 문제지 방향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중동에서 손을 뗄 수가 없는 처지이고, 지금까지 무임승차해왔던 '미국의 세계 안보'가 얼마나 값비싼 것이었는지 깨달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셰일가스 개발은 설령 오바마가 막았더라도 어떤 식으로건 벌어졌을 겁니다. 조지 미첼이라는 사업가(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7260449349253)가 기술을 개발했으니, (미국법상 가능하지도 않지만) 정부가 채굴 허가를 안 내줬다 할지라도 결국 상용화될 수밖에 없었거든요.

      제 칼럼을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특히 그 대목에 관심을 기울여주신 것도요. 피터 싱어가 을 통해 소위 '동물권'이라는 것을 주창하면서 채식을 강조할 때, '이것은 종교적 이론이 아니다'라고 굉장히 여러 차례 공들여 못을 박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좀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당히 많이 팔린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터 싱어의 그 책을 직접 읽고 채식주의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죠. 책 자체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굉장히 문제적이고, 여러모로 심도깊은 토론을 요구합니다.

      한편 힌두교적인 맥락에서의 채식은 아주 거칠게 말해서 제가 전달한 그런 취지가 맞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점점 더 단계 높은 채식을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성취한다는 말과도 거의 같습니다. 가령 지금 인도 수상인 모디는 기름 짜는 집안 출신으로 낮은 카스트죠. 원래 채식 안 했습니다. 그런데 출세를 하고 난 다음부터는 채식을 하고 있어요. 그런 거죠 뭐.

      한편 말씀하신 "X빵"은 뭔지 모르겠어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음식이고, 그렇게 맛있는 건 아닌데, 사람들이 좋아라 하는 메뉴일 것 같고, 그래도 감이 안 옵니다. 하하. 모쪼록,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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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P.S. 한국일보 기사 링크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도 수상이 출세하고 나서부터 채식을 하는군요.
      저는 여기서 인도사람들 많이 보는데 그들에게 카스트 제도를 뛰어넘는 건 인종 아닌가 해요. 이상하게 동아시아 특히 소극적인 한인들에게는 자기네 계급제도를 유야무야 적용한 듯 행동하고, 인도를 지배했던 백인들에게는 스윗 하답니다. 손 발이 되어 주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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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가 인도인과 많이 만나보고 접했을 리는 없으니 디테일한 경험담을 교환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한국인들도 백인 대할 때와 흑인 대할 때가 다르다는 건 군 복무할 때 카투사로서 많이 보고 겪었지만 말이에요. 소수자 정치, 인종주의의 극복, 이런 게 정말이지 어려운 주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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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말 모르시겠어요...? 굳이 본대로 사실대로 쓰자면 '똥빵' 이예요. 똥빵.
    칼럼에 쓰셨죠?
    "크기와 모양, 색깔 모두 대변과 똑같이 생긴 초콜릿이 있다고 말이다. 고급 재료에 좋은 향이 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즐겁게 먹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바로 '혐오' 때문이다."

    휴게소의 그 빵은 모양이 만화에 자주 나오는 층층이 올라가는 대변 모양에 색깔이 황금빛이었답니다. 건강한 장을 표현하는 색깔이었나봐요.
    활기찬 한주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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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답글을 달아놓고 문득 '아, 그건가' 싶어서 검색해보니 그게 맞더군요. 하하. 하지만 저는 실제로 대변과 혼동할 수도 있는, 본능적인 역겨움을 자극할만한 초콜릿을 연상한 것이니, 저렇게 '으' 하면서 즐길 수 있는 무언가와는 좀 다른 이야기였죠. 말씀하신 내용, 그리고 검색해본 내용을 통해 확인되는 바, 휴게소에서 파는 '똥빵'은 약간 만화적으로 표현된 대변 형태를 띠고 있으니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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