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30

이사

지난주 금요일에 이사를 했다. 서울 중구 약수동(신당 2동)에서 이태원으로 옮겼다. 다행히도 비교적 싼 값에 좋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컴퓨터와 핸드폰을 연결하는 케이블이 집에 있어서 지금 사진을 올릴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전망이 좋고 바람이 잘 불어온다. 2005년 1월 무렵부터 약수동에 살았으니, 3년 반 넘게 그곳에서 터를 잡고 있었던 셈이다. 많은 것을 버리고 이태원으로 건너왔다.

달랑 보증금 500만원 들고 월세방 구하러 다니면서, 이사 예정일은 다가오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 날이 많았다.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보증금을 마련했고, 월세도 낸다는 것이 뿌듯하다. 하지만 약 2주일 가량, 매일은 아니지만,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뺨을 맞고 돌아다닌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나에게 집이란 가을이와 입동이가 기다리는 곳을 의미하지만, 집주인들에게는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은 집주인의 그 표정과 목소리를 잊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고생을 했지만 아직도 나는 '부동산 6계급'이다. 아무리 열심히 모으고 살았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반지하 아니면 옥탑이었고, 그나마 옥탑이 훨씬 드물었다. 바람과 햇빛만큼은 넉넉하게 갖고 싶은 건 나만 그런 게 아닐 테니까. 이태원 크라운 호텔 너머에 있는 주택가에 살게 되었다. 강철같은 체력은 남의 일인 듯하다. 이사를 끝낸 후 주말이 지나도록 입안에 헐어있는 곳이 낫지 않는다. 오늘은 입술이 부르트고 있다. 신경을 너무 써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삶은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2008-09-28

중산층을 위한 감세 정책

middle class라는 단어의 번역어를 '중산층'으로 할 것인가 '중간계급'으로 할 것인가는 이 논쟁에서 쟁점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튼 그 번역된 단어가 대한민국의 상위 2~5%에 속하는 강남 거주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그리고 그것을 '잘~ 하는 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풍자'로서 적합한가, 그런 담론적 전략에 대해 재고찰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등이 될 것이다.

이 모든 논점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하기에 앞서, 비슷한 차원의 '중산층을 위한 감세' 논쟁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은 금융 위기 때문에 쟁점에서 빗겨나 버렸지만, 오바마와 매케인은 부시의 대규모 감세안을 유지할 것인가 폐기할 것인가를 놓고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오바마는 부시의 감세안을 원점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했고, 매케인은 후보가 되기 전까지는 오바마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된 후에는 부시 감세안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 매케인이 사용하는 수사법 또한 'middle class'를 위해 감세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기준선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오바마는 연봉 15만 달러 이하, 한국돈으로 (지금은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대강 1달러당 1000원으로 잡았을 때) 1억 5천만원 이하의 소득을 얻는 사람들이 middle class라고 보고, 그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에 대한 세율을 다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매케인은 "5백만 달러?"라고 농담을 했다가, 자신이 그 누구의 세금도 올리지 않을 거라며 어려운 주장을 회피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논쟁과 한국에서 벌어지는 '중산층' 논쟁의 유사성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지난번에 내가 인용한 기사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근로소득세 과세표준 8800만원은 총급여가 1억 2000~1억 3000만원에 달해야 나올 수 있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즉 오바마와 강만수는 같은 지점에서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middle class'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상류층 중 하위층이 자신을 'middle class'라고 주장하는 현상은 동일하게 발견된다. 폴 크루그먼의 8월 22일 칼럼인 "Now That's Rich"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When we think about the middle class, we tend to think of Americans whose lives are decent but not luxurious: they have houses, cars and health insurance, but they still worry about making ends meet, especially the time comes to send the kids to college.

Meanwhile, when we think about the rich, we tend to think about the handful of people who are really, really rich -- people with servants, people with so much money that, like Mr. McCain, they don't know how many houses they own. (Remember how Republicans jeered at John Kerry for being too rich?)

The trouble with Mr. Warren's question was that it seemed to imply that everyone except the poor belongs to one of these two categories: either you're clearly rich, or you're an ordinary member of the middle class. And that's just wrong.

우리는 중산층을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사치스럽게 살지는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집, 차, 건강 보험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야 할 때 돈 걱정을 하게 되는 사람들 말이다.

반면 우리는 극소수의 매우 매우 부유한 사람들만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인을 부리고, 자신이 몇 채의 집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존 매케인처럼 돈이 많은 그런 사람들 말이다. (공화당원들이 존 케리가 너무 부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비난을 퍼부었는지 기억하는가?)

워렌 목사의 질문에 담긴 문제는 빈곤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단지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같은 함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명백하게 부자가 아니라면, 당신은 평범한 중산층의 일원이다.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미국에서 현재 통용되는 영어 맥락에서, middle class의 번역어는 '중산층'이며, 그것은 전혀 '쁘띠 부르주아'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지 않다(물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쁘띠 부르주아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칭함으로써 개념의 혼돈을 야기하고 있기는 하다). 둘째, 인용문에서 말하는 middle class를 '중간계급'으로 바꿔도, 뭔가 어색하긴 하지만 글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사치스럽게 살지는 못하는', '자녀들을 대학에 보낼 때 돈 걱정을 하게 되는 사람들'을 중간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타당한 일처럼 보인다.

따라서 나는 middle class의 번역어를 '중간계급'으로 쓰자는 주장까지는 이택광님의 글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1억 2000만원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을 중산층이라고, 즉 중간계급이라고 간주하는 강만수의 주장에 대한 '풍자'가 그 글의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는 "한국 사회에는 중간계급에 속하지 못하면서도 중간계급 의식을 소유한 '서민들'이 참으로 많다.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감세정책에 대한 지지가 높다는 건 이를 반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세표준 8800만원 이하인 사람들은, 이택광 스스로는 뭐라고 '풍자'를 하고 있건, 이택광과 강만수 양자에 의해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이 아님'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내 논지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중산층이라는 단어가 워낙 복잡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니, 차라리 '중산층'을 이명박이 말하는 그것으로 설정하고 대신 '서민'을 강조하자'. 문제는 그 '중산층'이, 그렇게 되면 결코 'middle class'의 번역어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폴 크루그먼의 칼럼으로 돌아가보자.

In his entertaining book “Richistan,” Robert Frank of The Wall Street Journal declares that the rich aren’t just different from you and me, they live in a different, parallel country. But that country is divided into levels, and only the inhabitants of upper Richistan live like aristocrats; the inhabitants of middle Richistan lead ample but not gilded lives; and lower Richistanis live in McMansions, drive around in S.U.V.’s, and are likely to think of themselves as “affluent” rather than rich.

Even these arguably not-rich, however, live in a different financial universe from that inhabited by ordinary members of the middle class: they have lots of disposable income after paying for the essentials, and they don’t lose sleep over expenses, like insurance co-pays and tuition bills, that can seem daunting to many working American families.

그의 재미있는 저서 "리치스탄"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의 로버트 프랭크는 부자들이 나와 당신과 다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평행 우주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나라는 몇 개의 층으로 나위어 있고, 오직 상위 리치스탄에 사는 사람들만이 귀족처럼 산다. 중위 리치스탄에 사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부를 가지고 있지만 금박 입혀진 인생은 아니며, 하위 리치스타니안들은 맥맨션에 살고, S.U.V.를 몰며, 자신들이 부유하다기보다는 그저 "살만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자 아닌 사람들'도, 그러나, 중산층의 평범한 구성원들과는 완전히 다른 금융 우주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반드시 필요한 지출을 하고도 사용할 수 있는 다수의 수입원을 가지고 있으며, 다수의 일하는 미국 가정들을 괴롭히는 보험금 납입이나 수업료 등으로 인해 잠 못 이루지도 않는다.


하지만 매케인이 주장하는 바 부시의 감세안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이렇듯 '하위 리치스타니안'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않는 대신, 중산층과 빈곤층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폴 크루그먼은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미국 영어'에서 'middle class'는 우리가 아는 '중간 소득을 버는 사람들'이지 '쁘띠 부르주아'가 아니다. 적어도 폴 크루그먼은 그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고 있고, 반면 존 매케인과 그 선거본부는, 마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도 같은 '중산층' 논쟁을 벌여 하위 리치스타니안들의 호주머니를 불려줄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차이를 도표로 그려보자.

폴 크루그먼

존 매케인

강만수

노정태

상위 리치스탄

부자

부자

부자

하위 리치스탄

중산층

중산층

(강남)쁘띠

중산층

중산층

서민

중산층

빈곤층

빈곤층

빈곤층

빈곤층




이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나는 '하위 리치스탄'의 한국 버전에 해당하는 강남의 아파트 부자들을 '중산층' 대신 '쁘띠 부르주아'라고 직설적으로 부르자고 주장하고 있다(좋은 욕 놔두고 어렵게 말할 필요가 뭐가 있나).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중산층을 위한 감세 정책'이라는 말이 전적으로 허위의 것임을 드러낼 수 있고, 동시에 '서민'이라는 단어가 야기하는 개념적 혼동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한편 존 매케인은 중산층의 범위를 하위 리치스탄까지 확대함으로써, 리치스타니안을 위한 감세안이 마치 진짜 중산층과 서민층에게까지 이익이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주어를 이명박이나 강만수로 바꾸어도 큰 무리가 없다).

나는 이택광이 '풍자'를 통해 택하는 담론적 전략이 그다지 현명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 이유야 도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택광과 같이, 엄연히 middle class의 번역어인 중산층을 하위 리치스타니안의 자리에 분류하고, '한국에서 중산층이라는 게 그렇지'라고 냉소하는 전략을 택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 제1의 군사, 경제대국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보조를 맞추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거나 할 수 없고, 도리어 '서민'이라는 막연한 단어 안에 포함되어버리는 또 다른 개념적 혼돈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서민과 중산층, 중간계급의 구분으로 넘어가보면 개념적 혼돈은 한층 더 심화된 양상을 보인다. 만약 한윤형이 지난 글의 리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대충 '중산층'='쁘띠 부르주아'의 번역어구요. '중간층'은 '미들 클래스'의 번역어"라고 하면, 이택광이 말하는 '서민'이야말로 '중간계급'이 될 것이고, 중산층은 중산층의 위치를 그대로 지키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이택광은 '중간계급'을 '중산층'의 대체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유층-중산층-중간계급-빈곤층'으로 사회 계층 구도를 보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한윤형은 이택광을 옹호하겠다는 건가 옹호하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한국 사회의 '좌파'들이 대체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그 속에서 어떤 쟁점을 어떻게 잡아왔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리 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중산층'이라는 단어에 대해 강력한 혐오를 보이는 것은, 그것이 '노동자' 내지는 '민중'과 친화성이 없는 어휘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인용한 프레시안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쁘띠 부르주아'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용법에서 벗어난다. 문제는 그 방언 집단이, 하나는 이명박의 경제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좌뇌와 우뇌가 고루 발달'한 '좌파'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상대방이 설정해놓은 개념적인 틀거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은 전략적으로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며, 특히 '한국에서만은 '쁘띠 부르주아'가 '중산층'이고 'middle class'의 번역어는 '서민'이다'라는 용어표를 만들어내는 것은 국제적으로 고립만을 자처하는 더욱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폴 크루그먼이 부시의 감세 정책을 비판하듯, 그것은 중산층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택광과 한윤형은 훨씬 더 멀고 어려운 길을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서로 열심히 '풍자'해가며 그 고단함을 이겨내시길 희망한다.

2008-09-25

중산층, 중간계급, 소자본가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막대한 개념적 혼돈이 있다면, 그것은 '중간 정도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과, '작은 규모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소득을 얻는 소자본가'가 모두 한 단어 안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집값이 올라갈 거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서민'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다고 할 때, 그 '중산층'은 분명히 '소자본가'를 뜻한다. 반면 강남에서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고, 최근 수년간의 집값 상승을 통해 그 해만큼의 연봉보다 많은 돈을 번 사람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소자본가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중간'임을 표명하고자 하는 의사의 표현일 터이다. 이 양자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으면 적지 않은 개념적 혼돈에 맞닥뜨리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단을 읽어보자.

물론 이런 논의와 별도로,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수준을 중간계급으로 볼 건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 정부가 여기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제공했다. 감세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말이다. 정부는 "감세 효과의 53%가 서민, 중산층, 중소기업에 돌아간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과표구간으로 연소득 8800만원, 실제 소득 1억 2000만원의 연봉을 '중산층'으로 설정했다. 여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드높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자면 맞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는 중간계급에 속하지 못하면서도 중간계급 의식을 소유한 '서민들'이 참으로 많다.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감세정책에 대한 지지가 높다는 건 이를 반증한다.
(이택광, "중간계급", 2008년 9월 13일, WALLFLOWER)

과연 그럴까? 물론 이명박 정부가 설정한 바로 그 사람들만을 '중간계급'으로 보기로 했다, 이런 차원이라면 논의가 더 진행될 여지도 없다. 하지만 연소득 8800만원, 실제 소득 1억 2000만원의 연봉이 '중산층'으로 설정될 수 있고,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합치하는 일일까? '중산층'을 '소자본가'로 놓고 본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택하고 있는 화용론은 그것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허리를 구성하는 중간 소득 계층이 감세로 이익을 보게 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안타깝지만 연봉 1억 2000만원이 '중산층'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 . . OECD에서는 빈곤층, 중산층, 상류층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OECD는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계층을 중산층, 그 미만에 해당하는 계층을 빈곤층, 그 이상에 해당하는 계층을 상류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OECD의 이 구분법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우리나라 근로자들 중 소득 상위 20%는 상류층에, 중위 60%는 중산층에, 하위 20%는 빈곤층으로 분류될 수 있다. . .

. . . 국세통계연보(2007)에 의하면 2006년 연말정산 대상 근로자(대기업 임원 등 포함) 1259.5만 명 중에서 상위 5.2%인 66.2만 명의 평균급여는 9482만 원이고, 그 과세표준은 5677만 원이다. 과세표준이란 총급여에서 각종 소득공제를 제외한 과세대상 소득을 의미한다.

이 통계는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 중 상위 5.2%의 근로소득 과세표준 평균이 5677만 원이므로, 과세표준 5677만 원에 해당하는 총급여를 받는 사람은 상위 2.6%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
(홍헌호, ""MB 정부, 스스로 일본 전철 따르나"", 2008년 9월 16일, 프레시안)

과세표준 5677만원에 해당하는 총급여를 받는 사람이 상위 2.6%에 해당한다면, 과세표준 8800만원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그보다 더 낮은 퍼센트를 점유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해 '중간계급'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상위 2.6퍼센트에 속하는 중산층이라는 말은 동그란 네모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엄연히 소득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한국인들의 '평등에의 요구'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한 담론적 회피 기동이다. '나는 상류층이지만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배알이 꼴려서, 내가 잘 산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하면 맞아죽을까봐 겁이 나니까, '에이, 잘 살긴 뭘, 그냥 먹고는 살지'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나처럼 어중간하게 돈 있으면 그게 더 괴로워!'라고 역지랄을 하는 전법도 즐겨 사용되는 것 같다. 중요한 건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뭐라고 규정하건, 연봉이 과세표준으로 5677만원을 넘는다면 대한민국 상위 2.6%안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이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칭하는 것과, 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수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을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중산층'이라 칭하던 현상을 같은 층위에서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양자 모두 자신을 안전한 '중간'에 배치하고픈 일종의 회피 심리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그 허위위식을 비판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중간계급의 경제적 붕괴를 도외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OECD의 구분법에 따르면 한국에서 근로소득을 올리는 사람 중 중위 60%가 중산층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만큼의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리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과세표준을 적용해서 총 급여액이 1345.6만원 이상 4036만원 이하면 중산층이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을 분류할 때 적용될만한, 그런 종류의 계급 구별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제 기구에서 중산층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기준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서민'이라고 칭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중산층이고, 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계면쩍은 표정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상류층이다. 다만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류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을 상류층의 일원으로 파악하면 그만큼 상대적인 박탈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강남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동 사람들끼리 서로 비교하고 살면 고만고만한 '서민' 행세를 할 수도 있지만, 한남동의 저택 소유자들과 자신을 견주면 즉각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내가 겪어본 강남 주민들은 자신의 '중산층 됨'을 한남동과의 비교에서 찾는다. 내 위에 누가 있으니까 나는 중산층이다, 이런 논리이다.

혹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본 후, 내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경제적 중산층과 계급적 중산층을 혼동하는 견해라고 말이다. 계급적 중산층이라는 말보다는, '중산층'이라는 일종의 허위의식과 사회 소득 분포의 배분 비율로서의 중산층을 설정하는 편이 낫겠다. 아무튼 이런 주장에 대한 나의 반박은 이렇다. 우선 그 '중산층'의 허위의식부터가 단일하지 않다. 엄연히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칭하는 '위로부터의 중산층'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빈곤층에 속하는 이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칭하며 '아래로부터의 중산층'을 구성할 수도 있다(하지만 연간 총 급여가 1345.6만원도 안 되는 사람이 과연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볼까).

이렇듯 적어도 한국 사회를 논함에 있어서, 내적으로 정교하게 설정되어 있지도 않은 '중산층'을 비판하기 위해, '경제적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KDI의 2008년도 추산에 따르면 중산층 비중은 2000년 61.9%에서 2007년 58%로 4%포인트 줄어들었다. 흔히 '서민 경기가 얼어붙었다'로 표현하는 그 현상은, 실상 중산층의 경제적 몰락이며 그것은 분명히 큰 문제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떳떳하게 '중산층'이라 말하는 소득 낮은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대신 소득분위상으로는 부유층에 속하면서도 '그냥 먹고 산다'고 말하는 허위의 중산층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기사를 살펴보자.

간식배달업체인 ‘우리비’를 경영하는 윤광욱(38) 사장은 국내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통신망 회사인 두루넷의 공채 1기 출신이다. 두루넷이 코스닥에 상장했을 무렵 그는 대리급이었지만 우리사주로 받은 주식이 적지 않아 한때는 평가액이 20억원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회사가 부실해지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손해를 보고 주식을 판 뒤 그는 조그만 중소 통신업체로 옮겼다. 그러나 이 회사도 1년 뒤 부도가 났다.

우 여곡절 끝에 집을 담보로 잡히고 간식 배달 사업에 뛰어들었다. 직원을 20명이나 채용하며 공격 경영에 나섰지만 1년여 만에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친척과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티던 그는 한 컨설팅업체의 도움을 받아 회생의 계기를 잡았다. 지금은 연 매출 20억원 규모로 성장했고 그의 가정도 중산층으로 복귀했다.
("'양극화 해소' 외친 노 정부때 중산층 되레 줄어", 중앙일보, 2008년 7월 5일)

여기서 중앙일보는 "중산층으로 복귀했다"라는 절묘한 수사법을 통해, 두루넷 공채 1기 출신이며 평가액 20억 상당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그 당시에 '중산층'이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실제로 강남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이런 이유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주장한다.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마치 중산층을 위한 것인 양 혼동하게 만드는 주범이 바로 이 계층, 부유층의 사다리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다.

'한국인들은 자기가 중산층인 줄 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중산층'을 비아냥거리는 맥락을 띌 때, 결국 강남 상류층(중 밑바닥)들의 징징거림에 편승하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재벌 2세 나오는 드라마 보고 대사 따라한다고 해서 재벌 2세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강남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러하듯이) 중산층이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강남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들이 진정 중산층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저 '강남 쁘띠'들의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해법은 '중간계급'과 '소자본가'를 명확하게 갈라서 생각하는 것이다(앞서도 말했지만 이 글에서 나는 '중간계급'을 OECD 기준으로 사고하고 있다). 강남의 따라지 상류층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지칭함으로써, 그들만을 위한 종부세 개편 등을 '중산층을 위하여'라고 부르는 기만적인 언어 사용을 막아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산층'이라는 개념의 혼탁함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대신, '자기가 중산층이라는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사람들' 같은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소자본가'라는 뜻으로 풀어서 읽는다면 저 표현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OECD 기준으로 본다면,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소득이 중간인 사람들이 중산층이다. 따라서 소득이 중간인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보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것보다는, 엄연히 상위 5%, 2% 안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칭하며 '중산층을 위한 종부세 감세'를 요구하는 바로 그들의 지배 전략을 폭로하는 편이 더욱 올바른 일일 것이다. '중산층'에 대한 허위의식이 존재한다고 해서, 한국 사회 내 중산층의 존재 자체가 허위라고 보는 것은 그야말로 오류추리이다. 좌파정치가 지켜내야 할 '서민'들도 결국은 그 중산층 아닌가.

8800만원 버는 사람들을 '중산층'이라 칭한 이명박 정부의 개념 분류법을 '옳은 소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직 자신들만이 '중산층'으로 분류되기를 바라는 강남 거주자들의 언어적 프레임에 그대로 갇혀버린 담론이다. 차라리 그들을 떳떳하게 '쁘띠'라고 부르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중산층'이라는 언어를 진정한 중산층의 것으로 수복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즈니스 프랜들리

개인고객을 상대하는 비즈니스와 기업고객을 상대하는 비즈니스는, 사안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규모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여준다.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가 매출이나 수익 면에서 더 크고 잘 조직되어 있게 마련이다. 지금 줄줄이 피를 보고 있는 미국의 '투자 은행'들도 개인고객이 아닌 기업고객을 주 타겟으로 잡고 있던 회사들이다. IBM은 노트북 및 PC 제조가 기업용 사무용품이 아닌 개인용 일상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PC 사업부를 중국의 레노보에 매각했다.

성매매 논쟁이랍시고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중요한 차이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채 진행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성매매가 노동인가 아닌가, 성매매 여성에게 직업적 선택권이 있는가 없는가, 성매매 여성들은 자발적인가 아닌가, 뭐 이런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언제나 담론은 맴돌게 마련이다.

저 개별적인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현실을 검토하자면, 물론 나는 낙관주의자이지만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개인이 성을 판매하는 행위를 근절시킬 수 있는 해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P2P로 성매매하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있어도, 국가의 정책으로 막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도리어 그러한 종류의 단속은 경찰과 포주의 유기적 밀착을 음성적으로 강화할 가능성도 크다. 비록 나는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특히 성을 사는 수요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입장에 서고 있지만,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지는 성매매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고객을 상대로 하는,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성매매'가 지금처럼 활개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또 추진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성매매가 문제인 이유를 논하려거든, 성매매 여성의 자발적 선택에 대한 끝도 없는 논의에 빠져들지 말고, 성을 구입하는 이들의 소비 방식에 대해 먼저 고찰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성매매가 합법화되어있는 네덜란드를 운운하곤 하는데, 그 네덜란드에서는 '접대'라는 명목하에 법인카드를 들고 가서 집단 성매매 결제를 하는 문화가 있긴 할까? 이에 대해서는 통계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겠지만, 추측건대, 한국의 성매매를 지탱하는 것은 기업고객들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수요는 각 기업들의 경영 합리화를 통해 통제될 수 있을 것이다.

성매매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오직 '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성매매는 어디까지나 성에 대한 매매이며, 그것은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매매되고 있다는 그 자체로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시장은 정부의 적절한 개입에 의해 통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정부가 대한민국의 기업 문화를, 거래를 성사시기키 위해서는 '거래'를 해야만 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한, 단편적 캠페인을 넘어서는 구조적 노력을 기울인다면, 성매매의 '기업고객'을 감소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 정책적으로 노려볼만한 목표가 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현재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한국의 성매매 산업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효과를 노려볼만하다.

하지만 이명박은 '성매매 사범의 무차별적 단속을 자제하라'는 발언을 하고야 말았다. 단속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못생긴 마사지걸들이 못내 눈에 밟혔나보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명박이, 철저하게 한국적인 의미에서, 'CEO형 대통령'으로 보인다. 룸싸롱이 없어지면 사업은 어디서 하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이러면 안 되지. 이것이야말로 한국적인 '비즈니스 프랜들리' 아닐까.

2008-09-22

두 지도자에 대한 평가

《Foreign Policy》가 자랑하는 코너 중 하나가 바로 ‘Think Again’입니다. 한국어로는 ‘…를 다시 생각한다’라고 번역되는 그 코너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이슈의 반대편에서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이번호 한국어판의 표제 기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편집부는 잠시 토론을 거쳤습니다. 한국의 실정을 놓고 볼 때, “김정일과의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가 더욱 적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나름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어판 편집부는 《Foreign Policy》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부시는 재평가될 것이다”를 이번호의 표제 기사로 선정했습니다.

‘악의 축’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프럼은, 그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부시 행정부에서 다져놓은 길을 전적으로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부시가 민주주의를 밀어붙이며 국제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과 미국과의 대화를 놓고 보면, 그 말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대화의 상대방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일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던 김현식에 따르면, 자신이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을 일부러 고위직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김일성으로부터 인정받아 ‘장군’이 된 것은 1993년 북핵 위기 당시 가장 큰 목소리로 강경 대응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아웅산 테러 사건의 ‘보도 기사’를 북한의 언론인들은 미리 써 놓고 있었습니다. “김정일과의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비화(秘話)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일독을 권합니다.

이렇듯 두 명의 지도자에 대한 평가와 재평가, 회고와 전망이 담겨 있는 기사 외에도, 이번호 《Foreign Policy》는 허약한 정치, 부실한 경제 윤리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Prime Numbers의 “쓰레기 지구”와 “죽음을 만드는 사람들 - 가짜 약의 세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기사입니다. 중국과 인도처럼 급성장하는 나라에서는,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 동시에 가짜 약품들도 마구 생산됩니다. 쓰레기를 수거하고 의약품을 단속해야 할 정부가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할뿐더러 타국 국민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FP Index의 테러리즘 지수 수치가 예년에 비해 낮아졌다고 해도 세계가 안전해졌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나쁜 치세는 호랑이보다, 테러리스트보다 더 무섭습니다.

《Foreign Policy》는 질문과 답을 한 권에 담는 매체입니다. 레이먼드 피스먼과 에드워드 미구엘은 “상식만 알아도 ‘부패’가 보인다”에서, 경제학적 기지를 발휘해 부패를 추적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그 내용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필자들은 마치 ‘지식과 정보를 통해 나쁜 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 같습니다.

임기 말을 향해 달려가는 문제적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와,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는 독재자에 대한 폭로가 동시에 담겨 있는 매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부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인척 비리와 간첩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정국입니다. 과거가 되어 있을 현재를, 훗날 긍정적인 시각에서 재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번호 《Foreign Policy》는 평가와 반성, 회고와 성찰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을 그 지성의 토론장으로 초대합니다.

-한국어판 편집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9/10월호 편집자의 말입니다. 책은 지난주에 나왔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호에 대해서도 블로그 방문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구입 및 정기구독 문의전화
02-713-0143 담당자 김신영
전국 주요 서점에 비치되고 있습니다.

2008-09-20

공포 정치와 중산층의 붕괴

. . . 양씨는 "세 아이 엄마인 내가 촛불집회에 나선 것은 깨끗한 먹을거리와 바른교육, 안정된 삶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큰 대가를 치러야할지 몰랐다"며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촛불을 든 엄마가 경찰차를 부수고, 쇠파이프를 휘둘렀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또 "더욱 분노를 느끼는 것은 가정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는 경찰의 막무가내식 수사"라며 "어제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집을 찾아왔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지만 전화로 다짜고짜 `출두할지 안 할지만 말하라', `출두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체포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양씨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주거지에 갔었고 임의동행에 응하지 않을 경우 강제조사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지만 수사 진행 과정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정중했다"고 반박했다. . .


"물대포 가로막은 '유모차 부대' 주부 입건(종합), 연합뉴스, 2008년 9월 19일


경찰의 지금 행동은 말 그대로 '알아서 기는' 것인데, 문제는 그것을 제어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이 사건은 정말이지 징후적이다. 촛불시위가 불타오르는 과정이 아니라, 촛불시위가 꺼지는 과정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핫'하지 않은 이 주제에 대해 그 누구도 열정적으로 입을 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산층 혹은 중산계급을 양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쌤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들끼리의 건전한 '상식'이나마 간직하고 있는 중간계급이 없다면, 대의민주주의도 직접민주주의도 모두 불가능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 반대로, 너무도 적은 사람들이 중산층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중간계급이 경제적으로 무너지고, 또한 자신들이 법 안에 살고 있는 건전한 시민이라는 자의식의 균열을 체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중산층은 이중적인 존재이지만, 그 이중적인 존재가 없다면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존립할 수도 없다.

비정규직과 노동운동을 수호해야 하는 만큼이나, 중산층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명박 정부는 대단히 혁명적으로,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의 버팀목이 되어온 바로 그 계층을 분쇄하고 있다. 이건 정말이지 징후적이다.

2008-09-15

갈수록 태산

구좌파와 단절 전쟁 각오, 내책임 커
'대한민국 좌파'하자, 야권재편 필연
[인터뷰-주대환] "뉴레프트가 뭡니까"…"운동권 이념은 난치병"
기사보기

장태수 | 이 자리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다. 지난 대선 민주노동당 후보 경선에서 왜 오랜 동지 노회찬을 지지하지 않고 권영길을 지지했나?

주대환 | 노회찬은 정말 훌륭한 동지이고, 유능한 대중 정치인이고 스타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선수에게도 코치가 필요하다. 그라운드 바깥에서 보는 풍경은 좀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영국노동당을 만든 케어 하디는 노회찬처럼 하지 않았다. 더 많이 인내하고 양보했다.

누구에게? 무엇을? 노동조합 간부들의 부족함과 근시안과 보수성을 인내하고, 그들의 별로 맞지 않는 의견과 권력욕에 양보했다. 민주노총의 간부들은 100년 전 영국의 노동조합의 간부들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런데 그들의 뜻이 권영길 후보에게 있었다. 그건 아마 그들이 정치세력화에 소극적인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돈과 표를 모으자고 호소하는 명분을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우리가 책임지자”는 데서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나의 권영길 지지는 1992년부터 내가 걸어온 ‘노동당’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엄청난 착각. 100년이나 후대에 활동하는 사람과 그 전 시대의 사람을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고 있다. 100년 전 영국에는 여성참정권도 없었다. 비정규직도 없었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자면, 지금의 노동조합 구성원들이 그때의 노조 간부들보다 훌륭한 건 당연한 것 아닌가? 100년 전 노조 간부들과 똑같거나 더 낮은 수준이라면, 그건 연대의 대상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안팎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 논쟁은, 결국 '헐 나 삐져뜸'이라고 외치고 있는 주대환에게 모두가 말려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논쟁을 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더욱 옳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다.

이 논쟁에서 가장 나쁜 것은 주대환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 속에 만연한 '반 운동권' 정서,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반 정치인' 정서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시선에서 보면 주대환이 운동권이 아닐 리가 없다. 운동권을 아무리 씹어봐야 한 번 운동권은 영원한 운동권일 뿐이다. 운동권과 대중의 정서가 괴리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인터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문답.

장태수 |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요즘 본 영화 중에서 권하고 싶은 영화는?

주대환 | 〈미션〉이다. 배경 음악도 좋아서 CD를 구해 차에서 듣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본 영화 중에서는 〈크로싱〉이 좋았다. 많이 울었다.


아, 나도 많이 울고 싶다.

명절 독서

1. 칸트의 "On the Common Saying: This May Be True in Theory, But It Does Not Hold in Practice"(Immanuel Kant, Toward Perpetual Peace and Other Writings on Politics, Peace, and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2006))를 읽었다. 홉스와 멘델스존(음악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 멘델스존)에 대한 반박이 담긴 2장과 3장만 발췌되어 있었는데, 어제 새벽 12시 30분경 2장까지 다 읽었고, 새벽 3시쯤 잘까 하다가 그냥 3장을 봐버려서 결국 4시에 잠들었다.

제목만 보고 좋아라 했던 책인데, 일부나마 직접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고 짜릿했다. 흥분이 쉽사리 가시지 않아, 제목에 담긴 사상을 표현하는 문단을 일부 인용해본다.

Thus, when one considers the well-being of the people, nothing at all depends on any theory but rather everything depends on a practice derived from experience.
If there is, however, something in reason that is expressed by the word constitutional right, and if the concept of it has a binding force and thus objective (practical) reality for human beings who stand in an an antagonistic relation to one another due to their freedon, without regard for the good or ill that this may produce for them (for knowledge of this rests on experience), then it is grounded in a priori principles (for experience cannot teach us what is right), and there is a theory of constitutional right, to which any practice that is to be held vaild must comform. (59p)


전문을 확인하기 위해 Kant's Political Writings(Cambridge Univ., 1991, 2nd ed.)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어 놨다. 일단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 가면 도서관에서 확인해볼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잠시 확인한 후, 통장 잔고를 확인해가며 구매 버튼을 눌러야겠지.


2. 먼 거리를 오갈 일이 많았기 때문에, 지하철 안에서 《서울은 깊다》(전우용 저, 돌베게, 2008)를 다 읽었다. 저자가 오래도록 쌓아왔던 내용을 제대로 풀어낸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풍부한 도판과 다양한 이야기거리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짧은 꼭지 20여개가 연달아 나오기 때문에 자칫하면 식상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을 테지만, 편집자가 주제별로 배열을 잘 한 것 같고, 제목도 아주 훌륭하게 뽑았다. 휴일에 보기 적당한 책이었다.

2008-09-14

대한민국을 긍정하라?

원래 이 논쟁에는 낄 생각이 없었지만, 레디앙에 올라온 홍기표 레디앙 기획위원이 쓴 "주대환, 뉴라이트 마당에 폭탄 던지다"(레디앙, 2008년 9월 13일)라는 기사를 보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이상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논변이 따라붙는 형국이다. 한 마디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주대환의 테제를 놓고, 홍기표는 주대환이 '조봉암의 토지개혁'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끌어오고 있으며, 이것은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이른바 '뉴라이트'들의 뒤통수를 치는 화끈한 반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홍기표는 "담장 너머로 수류탄을 던졌다"라는 비유를 통해 주대환의 테제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함축하고 있다.

조봉암의 토지개혁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와, 심지어는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테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홍기표의 논지와도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긍정'이, 구조적으로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 긍정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 긍정을 토대로 홍기표는, 혹은 홍기표가 옹호하는 주대환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잠시 설명을 애둘러 가보자. 늦깎이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나는, 인문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마다 눈 앞에 써붙여져 있는 '서강 교육은...' 이라는 형식의 모토를 읽는다. '서강 교육은 사회의 발전을 돕는다', '서강 교육은 학생의 전인적 발전을 도모한다',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 뭐 이런 것들이다.

혹자는 이런 모든 문구들을 그저 '총론'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상의 문제는 그렇게, 이건 총론이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옳은 말'이면 큰 상관 없고, 각론에서 내용을 보충하면 되는 그런 게 아니다. 여기서 나는 논지 전개를 위해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표어를 검토할 생각인데, 내 생각에 그것은 가톨릭의 사상적 토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가톨릭은 세계를 긍정한다. 비록 메시아가 재림하고 나면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릴 이 세상이지만(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긍정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염세주의 등에 빠지는 것을 옳지 않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신의 사랑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역시 천부적으로 내려받은 자유의지를 행사하며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가톨릭이 세계를 긍정하므로, 예수회의 부설기관인 서강대학교 또한 세계를 긍정하는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어디다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이런 '총론'도 결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가령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세계를 긍정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현세를 부정하며 내세를 긍정하지만,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이런 차이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계 긍정'을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다고 해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잘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가치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동시에 현실이 지향해야 할 어떤 거대한 이상이 필요해진다. 지옥에 대한 공포보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대한 희망과 상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논리필연적 요구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주대환으로 돌아와보자.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라는 말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그 이후의 무언가를 또 긍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상위 0.01%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나 '긍정적'일 수밖에 없는 지배자의 논리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우리가 더욱 맹렬하게 사랑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그려내어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의 본질적 책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정신'에 기고된 그의 글은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긍정을 그려내기는 커녕, NL과 PD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차 있는 듯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기존의 운동을 모두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것도, '국회의원 많이 배출해서 세금 많이 걷은 다음 복지정책으로 뿌리자'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꿈이다. 하지만 과연 그 꿈이 현실을 뒤흔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일까?

주대환의 논의를 옹호하는 홍기표의 논지는, 마치 주대환이 '좌파' 전체를 대변하는 사상가인 양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오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을 긍정합니다'라는 좌파 이론가 한 명이 나왔다고 해서, 좌파들에게 붙은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라는 딱지가 절로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분할 통치를 위한 미끼가 될 뿐이다. '주대환은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니?'라는 질문만 돌아올 것이 뻔하다는 말이다.

이건 안 그래도 좁은 한국 좌파의 입지를 더욱 좁힐 뿐이다. 주대환이 민주노동당 분당을 논할 때 사용했던 논법을 이 지점에 고스란히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역사 이래로 이런 '모범생 되기 전략'이 담론의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실은 머리 속에 입력되어있는 사례가 많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적인 판단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주대환의 '대한민국 긍정합니다' 사건은 정치적 패착 같다.

지금 좌파 진영에 필요한 것은, 작고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상상력들이다. 강북구의회 의원 세비 삭감 같은 작은 승리들이 축적되어야 다음번 지방 선거를 노릴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대한민국을 전체적으로 어떤 나라로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더 크고 더 또렷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에 대한 평면적인 '긍정'은 지배계급의 무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정녕 좌파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은 결국 '이중 긍정'이 되어야만 한다.

가톨릭과 대조하며 어렵게 설명하였는데, 내가 말하는 '이중 긍정'은 더 좌파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는 깊고 넓은 개혁을 위해, 개혁이 성공하면 더 큰 개혁으로 나아가고 개혁이 실패하면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 위해, 급진주의를 늘 배후에 두어야 한다"("더 붉고 더 푸른 사민주의를 향하여", (가칭)좌파집권연구회, 2008년 2월 21일)는 문장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대환과 그 주변에서 '미국식 양당제도'에 한다리 끼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급진성이 거세되어 있다. 어제 써먹은 비유이긴 한데, 결국 그 사민주의자들은 '국회에서 의석 두 번째로 많이 먹기 vs. 고자되기'에서 '고자되기'를 택하며 스스로 용자라고 으스대고 인증샷을 찍고 있는 것이다. 북극의 빙산이 다 녹고 있는 이 시국에, 이 논쟁은 너무도 무가치하고 또 우습지만, 결국 한 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2008-09-11

정치의 철학화, 철학의 정치화 - 최장집 '고별 강연' 비판 및 실천적 방향에 대하여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라는 논의 프레임은, 결과적으로 볼 때 여러 사람 바보 만들고 정작 촛불시위에 대한 지적인 담론도 활성화시키지 못한, 거대한 패착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최장집의 그간 논의 구도에서 볼 때 그런 말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은 물론 정당하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상황 내"에서 자신의 정치학이 출발하고 있다고 말하는1), 즉 학문적 발언과 그것의 정치적 해석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는 원로 학자로서,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라는 유사 형이상학적 틀거리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는 담론을 내밀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최장집이 '고별 강연'을 통해 천명한, 학자 최장집 본인의 사상적 전향이 깔려 있다.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글쓰기를 주저해왔던 이유는,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서 길게 쓰면 잘 쓸 수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월요일 모종의 기회가 있어서 이 이야기를 꺼내놓고 보니,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우며, 그게 된다면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최대한 단순하고 간략하게 오래 품어온 논지를 꺼내놓고자 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자유의지에 의해 인과론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세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을 보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쟁'들을 우리의 지성이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주 바깥의 것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그 각각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답이 안 나오는 것에서 굳이 답을 구하려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국어에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이라는, 대단히 부정확하지만 그 덕에 어디에나 갖다 써먹게 되는 '형이상학적' 대결 구도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나는 현실주의자이고, 너는 이상주의자이다'라는 식의 개인적 매도에 활용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신이 논쟁을 할 때, 상대방을 이상주의자로 몰아갈 수 있다면 반 넘게 이겼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논쟁이 자신은 현실주의자이며 남들은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했다는 그런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대립시키고자 한다면, 최장집은 자신이 말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상당히 이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대립 구도가 언어의 형태로 던져졌을 때,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촛불의 정치학을 '직접민주주의'에 고스란히 투영함으로써,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던 이들은 졸지에 나쁜 의미에서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예전같았다면 그 누구도 촛불의 흐름에 거슬러 '나는 대의민주주의의 가치를 더욱 선호한다'라고 용감하게 말하지 않았겠지만, 최장집은 본인이 늘 해오던 말이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총대를 맸다. 최장집은 자신의 고별 강연에서 "낭만주의적/이상주의적 정치학(관점)"이 대체로 "진보파의 관점을 대변"하며,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우회하거나 넘어서는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의 확대를 통한 어떤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羨望)"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2)

여기서 여러 사람 바보 됐다. 우선 촛불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나는 직접민주주의자요'라고 말하면 그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린다. 반면 '나는 직접민주주의자가 아니오'라고 베드로처럼 부인하면, '그럼 촛불을 끄고 국회의 개원을 촉구합시다'라는 온건한 자들에게 대꾸하기가 매우 난망해진다. '지금 이 논의는 다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는데, 그 정답을 그 타이밍에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미 프레임에서부터 말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은 최장집 본인에게도 닥쳐왔다. 그가 말하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대립 구도는, 굳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다시 갖다 붙여본다면, 현실적인 맥락에서 볼 때 직접민주주의보다 대의민주주의가 더 이상적이라는 뜻이고, 그렇기에 대의민주주의를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더 많은 역량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그가 진보신당의 이론가였다면 "시민들의 일상적 정치생활의 형태가 운동이 아니라 정당이 되는 것이 중요"3)하다는 말을 하면서 슬쩍 입당 원서를 돌릴 수 있었겠지만, 정치적 지향이 다를 뿐더러 학자로서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결과 그는 '촛불의 발목을 잡는다'며 괜히 욕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의 지식 사회에서도, 별 쓰잘데기 없는 이상한 논쟁이 촉발되어 버린 탓에, 촛불시위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후에 등장한 무슨 웹 2.0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도 결국 최장집이 깔아놓은 논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다. 가령 웹 2.0의 가치를 목놓아 외치는 이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결집된 이들이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외친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데, 이건 직접민주주의에 더 가깝다.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이분법은, 담론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등장하지 말았어야 할 이분법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최장집을 적극적으로 탓할 생각이 그다지 없다. 최장집을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 하는 말마따나, 그는 자신이 늘 하던 말을 했을 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가치를 소홀히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이상주의 대신 현실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촛불시위를 이상주의자들의 모임으로, 현실에서는 절대 성립할 수 없는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어린이들로 몰아간 당시의 담론적 분위기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장집이 내놓은 발언으로 인해 이른바 '정치의 철학화'가 다시금 이 땅에서 시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느낀다.

정치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다루어졌어야 할 문제가, 어쩌면 그 자체로서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언어적 축으로 기능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클리셰'에 묶여버렸다는 것은 너무도 뼈아픈 손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컨대 당신이 누군가에게 기륭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얘기했다고 쳐보자. 그가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는 게 다 어려운 거 아냐?' 혹은 '결국 그 사람의 성공은 개인적인 노력에 달려 있지', 등등. 여기서 답이랍시고 나오는 이게 바로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사이비 형이상학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대신 '사는 건 다 똑같다?'가 들어왔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구도는 칸트가 비판한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에 대해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바로 저런 '형이상학'들이 논쟁을 좌우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자신을 위로하는 용도로 악용되고 있다. 내가 말하는 '정치의 철학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론은 담론적으로 같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상주의자, 철부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회 경험 없는 룸펜들, 이렇게 촛불은 담론의 전쟁터에서 패배를 향해 걸어가게 되었다.

최장집의 '고별 강연'을 꼼꼼히 잘 짚어보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장집의 정치적 패착이 '그냥 하던 것만 하다가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최장집을 옹호하겠다는 사람들조차도 이 점을 지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도 참 게으르다는 것을 지적해둔다. 아무튼 결론을 말하자면, 최장집이 자신의 지적 원천을 마르크스에서 베버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할 때4), 지금의 정치 담론적 실패는 이미 그 속에서 예견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의 철학화'에 맞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그 중 하나는 마르크시즘적으로 하부 구조를 연구하여 상부 구조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최장집이 촉망받던 학자이던 시절,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고 최근까지 진행하고 있던 작업들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노동운동의 조직화 실패를 통해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헐거움을 논했고, 안토니오 그람시를 끌어들여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가 움직이는 방향을 관찰했다.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권위주의시기에 노동을, 민주화 이후 제도와 정당을 고민"5)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범 한나라당 계열 의석이 개헌선을 넘기거나 그에 육박하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대체 왜 대선에서 한나라당에게 대권을 내주고도, 한국의 시민들은 다시 한나라당에게 몰표를 안겨주었는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6)가 최장집의 정치학이 지향하는 바라면, 대체 왜 한나라당이 대선과 총선 모두를 압승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정치학자' 최장집에게 바라던 바일 것이다.

하지만 총선 과정에서 나온 최장집과 최장집 학파의 분석은, 너무도 급박한 나머지 기존에 그들이 하던 것과 같은 충분한 깊이를 갖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한나라당으로 가득 차있는 국회를 놓고도 '대의민주주의'의 당위성을 강변해야 하는 변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민주당은 마치 '여당되기 vs. 고자되기'에서 용감하게 '고자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당연히 여당도 못 되었다). 한나라당의 내분은 '복당'이 테마였던만큼, 정치적인 이슈였지만 동시에 너무도 코믹했고, 실질적으로 대단히 가벼운 사건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라는 자신의 테마를 유지하는 것은 학자로서 존경받을만한 대단한 뚝심임에는 분명하지만, 원내 정당정치가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운동의 역할 축소"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나친 외고집이다. 지금은 정당의 외연이 운동으로 넓어져야 하고, 동시에 정당이 운동의 역량을 흡수하여야 할 시점이다. 촛불시위의 동력이, 오래 갔다면 오래 간 거지만, 재생산되지 못하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흩어지고 만 것은 정당정치에 있어서도 큰 손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앞서 말한 '정치의 철학화'일 뿐이다. 그것은 최장집이 정당정치의 복원을 위해 "좋은 정당의 출현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출현을 기대"7)한다고 말하면서 확고해졌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베버가 정식화한 개념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 단어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장집이 이후 '정치적 카리스마란 무엇인가'라며, 베버 자신도 단순한 관찰에 머물고 만 정치인의 카리스마에 대해 추가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설마 덜렁 내던져진 '카리스마'라는 단어 하나, 그게 우리가 "한국사례,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학을 탐구"하는 "지방(local) 그것도 변방의 정치학도"8)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전부란 말인가? 나의 장집짱은 이렇지 않아!

나는 여기서 최장집이 베버의 '카리스마'라는 개념을 한국 정치에 적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념을 도입하면서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한국 정치에 새로운 언어를 주입해야 할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현재 경제는 위기에 처했고,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니미 뿡이고, 외교는 수렁에 빠졌다. 하긴 지금은 DJ 계열의 정치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을 상황이지만, 나는 최장집의 내용 없는 '카리스마' 언급이 결국 김대중에 대한 향수에서 기인하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묻고 싶다. 반대로 말하자면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은 바로 그렇게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 모든 내용 없는 싸움은 결국 '정치의 철학화'를 가속화할 뿐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소득 차이가 더 벌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치의 철학화'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국가가 왜 구제해줘야 하나요?'라는 식의 '철학적' 논의로 담론을 이끌어감으로써 운동의 동력을 약화시키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최장집이 베버의 어깨 위에서 추가적인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한, '카리스마' 또한 마찬가지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집단 지성이 중요하다'고 어떤 '민주주의자'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러면 최장집은 졸지에 엘리트주의자가 될 것이고, '엘리트주의 대 민중주의'라는 가짜 논쟁의 틀 속으로 또 빨려들어갈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심지어 그를 옹호하겠다고 떠벌이는 자들조차도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다.

그의 '카리스마'론은 사실 사회적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었고 또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담론적 현실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 이념적 색체가 뚜렷하고 당내 민주주의가 비교적 활성화되어있는 정당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 내부 정치를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중요하다는 강조가 가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정치적 함의에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문 읽고 정치평론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전부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은 신영복의 '사람이 희망이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그저 '좋은 소리'일 따름이다. *

내가 최장집을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새삼스레 최장집에게 '실천적 이론' 을 내놓으라고 주문할 수는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의 그는 내게 '이론적 실천'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최장집을 한국의 지성계에서 빛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장집이, 한국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카리스마'라는 단어의 속을 꽉 채워주기를 지금도 바라고 있다. **

정리해보자. 한 시대의 담론을 이끌어오던 정치학자의 고별 강연을 비판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정치의 철학화가 아니라 철학의 정치화를 이룩해야 한다. 한국어 속에 횡횡하고 있는 사이비 철학들을 붙잡아내어 정교한 언어로 해체하고, 담론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기를 발라내야 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철학자들이 맡아오던 가장 유익한 과업 중 하나이다.

동시에 우리는 '수입상 컴플렉스'를 떨쳐버리고 한국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내에 수입된 수많은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데올로기를 몰아낸 자리에 철학을 심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수입되었다면, 스스로의 생명을 내던져 단식하고 오체투지하는 우리의 '투쟁'을 통해 그 책을 이해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반대도 물론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너무도 특수하다느니, 이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느니,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느니 투덜거리는 대신, 자신이 아는 그 무엇을, 그러므로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소한의 시도라도 해보느냐 마느냐이다.

정치의 철학화가 횡횡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 반지성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지성주의가 만연해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말 그대로 지식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것보다, 한국 사회의 무식을 타파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라고 생각한다(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그러므로 분명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과, 철학을 정치화하는 것은 결국 같은 행동의 다른 이름이다. 성신여대에서 들려온 작은 승전보 하나에 기뻐해야만 하는 패배의 가을이다. 결국 우리는 지고 또 지면서도 꾸준히 배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부하고 싸우고, 싸우면서 공부해야 한다. 그게 바로 철학의 정치화이다.



----------------------------------------------------------

*, **: 이 두 문단은 9월 12일 오전 2시 18분에 추가되었습니다.

1)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 1쪽, 두 번째 테제. 특히 "정치학은 현실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정치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적, 파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라는 10번째 문장에 주목할 것.

2) 같은 팜플렛, 2쪽, 12번째 테제.

3) 같은 팜플렛, 9쪽, 6번째 테제.

4) 같은 팜플렛, 12쪽, 10번째 테제.

5) 같은 팜플렛, 2쪽, 16번재 테제.

6) 같은 팜플렛, 2쪽, 14번째 테제.

7) 같은 팜플렛, 12쪽, 10번째 테제.

8) 같은 팜플렛, 3쪽, 7번째 테제.

2008-09-10

기륭전자의 '88만원 세대'들

[판]기륭전자의 '88만원 세대'들 (경향신문, 2008년 9월 11일자)

. . . 그렇게 시작된 파업이 3년을 넘겼다. 그 유명한 ‘기륭전자 파업’의 전개 과정이 이렇다. 100일에 가까운 기간 동안 단식을 했던 두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효소까지 끊고 버티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지금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광화문에서 시작된 촛불이 구로공단으로까지 향해, 내가 한 줌의 죄책감을 덜어보기 위해 현장에 들렀던 날, 사람들은 문화제를 마친 후 영화 '안녕? 허 대짜 수짜님!'을 보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간부 허대수는 처남에게 묻는다. "비정규직 내가 만들었냐?"

'88만원 세대' 문제에 대해서도 결국은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누가 그러게 공무원 시험 보랬냐?' 혹은, '중소기업 가서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 하지만 이곳은 가내수공업 중소기업의 제품이 우주왕복선 부품으로 팔리는 나라 일본이 아니다. 여기는 공채의 왕국 대한민국이다. 당신의 첫 직장이 당신의 인생 전부를 좌우한다. . .


지면 관계상 누락된 문장을 이곳에 올려놓는다. 한결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한 달 넘도록 생각하고 있던 주제를, 원고지 10여매 안에 박아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기회가 또 있으리라 믿는다.

노파심에 강조하자면, 나는 지금 '20대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따위 소리를 하기 위해 꼴랑 한 번 가보고 기륭전자를 팔아먹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잔인한 세상 속에서, '어린이' 취급당하며 근 30여년을 살아가는 이들이 비굴해지지 않는다면, 또 그만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나 자신과 내 또래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걸지는 못한다. 하지만 절망을 가장한 매도를 하는 이들을 더욱 참아낼 수 없다. 그정도 이야기만이라도 꼭 하고 싶었다.

2008-09-04

구글 크롬

구글 크롬을 사용해 보았다. 확실히 빠르긴 빠르다. 별도의 탭이 움직이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구글 특유의 미니멀리즘이 지나치게 밀어붙여져 있다는 인상도 강하다. 가령 트리 형식의 즐겨찾기 관리가 대단히 불편한 것은, 적지 않은 수의 인터넷 사용자에게 장점이 아닌 단점으로 보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파이어폭스를 처음 사용하던 시점부터 가지고 있던, 탭이 브라우저 창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지던 답답함은 많이 해소된 듯하다. 일각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크롬은 브라우저에 탭이 종속된 형식이 아니라, 탭의 뭉터기로 브라우저를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별도의 탭을 '바로가기' 형식으로 바탕화면이나 시작버튼 등에 배치할 수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구글 닥스 바로가기 만들라는 뜻이고 너무 속이 뻔히 보이지만 창의력 대장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당장 구글 크롬으로 갈아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딱 두 가지이다. 파이어폭스의 마우스 제스처 기능이야 포기하라면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Sage-Too와 조테로만큼은 버릴 수 없다. 세이지를 써온 사람은 다른 리더기로 갈아탈 수가 없다. 특히 블로그를 볼 때 유용하다. 별도의 RSS 창에서 리더로 읽어온 내용만 조금 보여주는 여타 RSS 리더기와는 달리, 세이지를 쓰면 바로 그 웹 화면을 불러와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걸어놓고 보면 본문 뿐 아니라 리플까지 한번에 다 보인다.

그러나 조테로만큼은 절대 안 된다. 대부분의 뉴스를 웹을 통해 접하는 처지에서, 뉴스 클리핑할 때 조테로만큼 좋은 툴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특히 이코노미스트나 뉴욕타임즈 등은 조테로에 저장할 수 있는 형식을 따로 제공해주기 때문에, 클릭 한 번이면 저자 이름과 게시 날짜 등 주석 달때 필요한 정보가 모두 브라우저 안에 저장된다. 이게 없으면 두 달 전에 힐끗 훑어본 기사를 인용해서 외고에 써먹거나 하는 일이 몇 배는 힘들어질 것이다.

아직까지는 진지하게 논문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본연의 학술 도구로 조테로를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기사를 쓰는 차원에서도 조테로는 매우 유용하다. 맥의 데본씽크같이 진짜 헤비한 툴을 고려하지 않는 한, 조테로를 대체할 그 무언가를 찾을 수는 없다. 특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웹을 통해 꾸준히 기사를 읽고 그걸 정리하는 것이 일과의 큰 부분인 나로서는 말이다.

브라우저 자체만 놓고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더 늦게 나왔고 더 많은 기술과 자본이 투여된 크롬이 낫다. 하지만 파이어폭스의 수많은 확장 기능 중, 특히 조테로가 너무도 유용하다. 이건 가급적 더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을 정도다.

가령 나는 지난 8월 26일 이코노미스트 온라인 에디션에서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다. 1912년까지는 권총 결투가 올림픽 종목이었다. 줄다리기도 올림픽 종목이었는데, 1920년 폐지되었다.1) 이따위 정보를 따로 적어두고 보관하는 일은 대단히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나는 서핑을 하다가 낄낄 웃은 다음, 주소창 옆에 뜬 아이콘 하나를 클릭했다. 그 결과 내 브라우저에 해당 기사의 서지 정보와 내용이 저장되었고, 나는 지금 그걸 보면서 이 내용을 쳤다. 각주 1에 해당하는 서지 정보는 드래그 앤 드롭으로 자동 입력된 것이다.

1. “Olympic sports: Shoot the pigeon,” The Economist, August 2008, http://www.economist.com/daily/chartgallery/displaystory.cfm?story_id=11991176&fsrc=rss.

갑자기 무슨 구글 안티가 되고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정보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더 좋은 툴이 나와있기 때문에, 무작정 대세에 시승하여 크롬으로 갈아타는 대신, 자신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거다. 우석훈 박사의 블로그에서 마이니치 신문 영어판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낼름 내 즐겨찾기에 넣은 일이 최근 있었는데, 바로 그렇게, 서로 알고 있는 좋은 것을 조금씩이나마 나눠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구글 크롬 사용기로 시작해서 조테로 홍보로 끝난 리뷰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