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30

그리고 세 번째 리플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밖에서 돌다 오니 블로그가 엉망이 되어 있군요. 주로 두 분이 '비판적'인 리플을 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이 논의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지난 두 글에 추가적인 코멘트가 붙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지를 했습니다.

그 공지 이후 달린 토마님의 리플이 안타깝게도 삭제되었습니다. 일단 여기서 그 내용을 복원해본 후, '논점'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을 하고,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습니다. 토마님의 양해를 다시 한 번 구합니다. 발표한 원칙은 지켜야 하는 거니까요.

토마 :

이제야 님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_-; 바이오매스가 온난화를 줄인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어 단순히 이산화탄소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네요. 바이오매스로 온난화를 줄일 수 있다는 건, 석유대신 이왕 배출되는 메탄을 에너지로 사용해서 오히려 온실효과가 20배 더 강한 메탄 대신 이산화탄소를 늘려버리는 개념이군요. 어쨌거나 소를 지금처럼 키우는 한에서는 온난화의 진행을 바이오매스로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을 여전히 할 수 있지만, 노정태님의 그 부분의 설명은 정황상 잘못됐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다요. 노정태님이 확실히 말해주시겠죠.
2008년 11월 30일 (일) 오전 1:22


바이오매스를 통해 온난화의 진행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의 핵심은, 더 이상 지하에서 화석연료를 추출하지 않는다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대기권 내에 본디 존재하던 것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면, '탄소'의 총량은 변화하지 않으므로, 지금처럼 급격하게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논점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해보도록 하죠.


1. 메탄가스를 태워도 이산화탄소는 발생한다.

제가 '닫힌 계'라는 용어를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탄소가 발생하면 그것은 '닫힌 계'가 아니게 되긴 하겠지만, "이산화탄소의 총량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표현은 엄밀하다고 볼 수 없죠.

하지만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탄소의 양이 0이라면, 이산화탄소의 발생과 광합성을 통한 그것의 재분해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용이한 일이 되겠지요. 바이오매스의 활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그림판으로 그린 것도 바로 이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거고요.

그러므로 첫 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네, 가축으로부터 추출한 메탄을 연료로 사용해도 이산화탄소는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 제가 말하는 취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화석 연료를 대기 중에 존재하던 것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 인류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게 되는 모든 연소 과정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를 비판하고자 할 때는, 제가 말한 내용을 통해 비판해주시기 바랍니다.


2. 소가 배출하는 메탄 가스가 바로 온난화 물질이다.

"아파트, 젖소, 정치적 상상력"에 달린 리플에서 링크된 두 개의 기사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축의 분비물에서 발생하는 메탄 가스를 연료로 사용할 필요성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두번째익명'이라는 이름으로 리플을 달고 계신 방문자의 코멘트에서 일부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이오매스가 되었건 화석연료가 되었건, 연료를 태워서 에너지를 얻는 대부분의 활동은 필연적으로 CO2 방출을 야기합니다. (수소연료전지 같은 예외도 있지만 별론으로 합니다.) 메탄가스를 연소시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메탄가스의 화학식은 CH4입니다. 연소시키면 역시 그 부산물로 CO2가 나오게 됩니다. (게다가 CH4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CO2의 약 스무배에 달하는 온실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라? 만약 메탄 가스가 이산화탄소에 비해 약 스무배에 달하는 온실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그 메탄을 대기중에 그대로 내보내는 것보다 '연소'시켜서 이산화탄소로 바꿔서 내보내는 것이 온난화 방지에 더욱 효과적인 일 아닐까요?

'두번째익명'님, 제 논지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인데, 우리는 이로써 메탄가스를 더욱 적극적으로 채집하고 연소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메탄 분자 하나를 태우면, 스무 개의 이산화탄소를 분해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거군요. 이건 예상치 못한 희소식이네요.

아까 언급한 리플에 달린 한겨레 기사를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히는 20배가 아니라 23배군요.

축산은 세계 온실가스 방출량의 18%를 차지한다. 특히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23배 큰 메탄가스 발생량의 37%를 가축이 내보낸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산림을 없애고 목장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가축의 배설물과 소화과정에서 나오는 메탄이 주성분인 트림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1주에 하루 고기 뚝 하면 차 500만대 스톱 효과"(한겨레, 2008년 11월 4일)


자 그렇다면, 전후좌우가 뻥 뚫린 외양간에서 마구 방귀를 뀌고 트름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아파트'를 개조해서 만든 축사+열병합발전소에서 소를 키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공상'을 좀 더 해서, 젖소 아파트에서 키우는 소의 메탄을 전부 채집할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금처럼 소에게 맞지 않는 사료를 먹여 트름을 유발시킨다고 전제하더라도, 모든 소가 배출하는 메탄가스를 채집하여 '발전'을 통해 이산화탄소로 바꾸면, 그 요소로 인한 온난화 효과는 23분의 1로 줄어들겠네요.

소가 메탄 가스를 배출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저는 소를 키우되, 소가 배출하는 메탄가스를 이용해 발전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용된 기사와 '두번째익명'님이 설명하신 내용을 통해 우리는 더더욱 바이오매스를 이용한 발전에 박차를 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3. 육식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

뭔가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익명'이라는 이름의 방문자께서 이런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제 주장이 '축산업을 육성하자'는 내용입니까? 저는 그 반대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축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소의 방귀는 유독 가스이면서, 메탄을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건강에도 해롭고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응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요. 폐기물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제거하거나, 폐기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거나. 즉, 소를 덜 키우거나, 키우더라도 현명하게 키우거나.

채식주의의 입장에 서서 제 주장을 반박한다는 것은 어이가 없는 논변입니다. 제가 언제 채식 하지 말자고 했습니까? 다른 방식의 목축과 에너지 산업을 구상하자는 말을 듣고, '채식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근본주의적인 발상이지요. 제 글에 리플을 달아주신 분께서 그런 레디컬한 환경주의자라면, 저는 그 입장을 존중하겠습니다. 하지만 단지 반론을 위한 반론을 펼쳤을 뿐이라면, 반성하세요.

두번째익명이라는 방문자께서는 '도시 내에서 목축을 하더라도, 그 사료를 운송해오는 과정에서 더 많은 화석 연료가 소비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마치 지금 목축업이, 모든 나라가 호주나 뉴질랜드처럼 '그 땅에서 나오는 풀'을 먹이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 같군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사료는 충분히 먼 거리를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기가 이동하는 거리만이라도 줄여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제 이 주장은, 지금처럼 '석유를 밭에 뿌려서' 옥수수를 키우고, 그 옥수수를 소에게 먹여서 고기를 얻어내는 현재의 축산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축산업을 바꾸자는 말을, '현재의 축산업'을 유지하자는 말과 같다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오독의 의지가 필요하겠지요.


4. 권위에의 호소가 아닌 상식에의 호소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대강 논점은 마무리지어진 것 같습니다. '화석 연료를 쓰지 않는다면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일치한다'는 제 주장은, 일부 디테일을 뭉뚱그린 측면이 있습니다. 화석 연료를 쓰지 않아도 이산화탄소의 양은 증가할 수 있죠. 하지만 '메탄가스'가 배출되는 것을 이산화탄소로 바꾸는 것은, 온난화의 방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더욱 바람직한 일입니다(물론 '이산화탄소'의 양은 '증가'하겠죠. 하지만 메탄가스가 그대로 방출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좋은 일이겠죠).

또한 우리는, 진정으로 온난화와 맞서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를 분해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해야 하고, 동시에 '옥수수를 먹여 키우는 소'로 대변되는 현재의 축산 구조와 육식에 대한 문제 의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언제 나무 심지 말자고 했나요?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아파트에서 젖소를' 키우자고 했나요? 둘 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있는 문제는 단 하나 뿐인 것 같군요. 폴 크루그먼의 칼럼을 인용해서 '온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라고 논하는 것은, 경제학자의 권위를 빌어 환경학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권위에의 호소가 아닌가 하는 것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저는 '학자'의 견해가 아니라 '칼럼니스트'로서의 입장 때문에 폴 크루그먼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운운은 다소 치사하다고 보실 수 있겠습니다. 그건 인정하도록 하죠. 하지만 저는 '경제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저널리스트'인 폴 크루그먼 또한 깊이 존경하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번에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폴 크루그먼은 환경 문제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시 정부의 경제에 대한 거짓말을 폭로해온 것이 바로 그것이죠. 부시 정부 또한 온갖 도표와 수식을 동원해 '세금을 낮추면 경제가 덩실덩실' 같은 거짓말을 해왔고, 폴 크루그먼은 오랜 세월을 '꿩 잡는 매'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크루그먼의 글을 지면에 실어주는 NYT의 에디터십을 신뢰합니다. 그들의 치열한 지적 노력이 결집되어 '상식'이라 부를만한 무언가가 태어나는 거겠지요. 제가 말하는 '상식'은 바로 그런 상식입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상식 말이죠.


5. 그리고 세 번째 리플

논의되는 맥락을 잘 살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본래 글의 취지와는 무관한 내용의 리플이 잔뜩 달리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은, 제 글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분들을 위해 귀한 지면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환경 문제에 대해 충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언어를 입 밖으로 꺼낼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지금 논의되는 정치적 구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밖의 무언가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 가령 이런 독자 말이죠. 경향신문에 달린 세 번째 리플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노무현'과 관련된 사건도 아닌데, 혹은 촛불시위 현장중계도 아닌데 경향닷컴의 일개 오피니언 코너에서 리플이 세 개나 달렸다는 것은, 어쨌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prs1216님 의견
제목 :꿩팔고 알팔고 둥지뜯어 불 팔고

진짜로 유쾌하네요 그런데 한가지 빠트렸네요
돼지, 소, 닭, 축분을 바이오매스로 발전만하고 최종 부산물은
어떻게 하지요. 내가 해답을 제시 할까요?
축폐수와 슬러지는 유기농 비료로 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화학비료도 안쓰고 토지개량하고 완전히 친환경 유기농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아파트 단지가 집약농장이 되면 주차장도 여유공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공간에 채소도 가꾸면 더 환상적이겠죠.
따라서 꿩팔고 알팔고 둥지 뜯어 불팔고 속담이 바뀔 것 같네요.
인간의 비판과 상상력은 진화의 산물입니다.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댓글은 이명박 소망교회의 창조론의 어거지 입니다.
11월 대한민국 모든 언론의 칼럼 중 '미분양 아파트에 젖소를'은
우리가 봤을 때 최고의 유쾌한 칼럼입니다.
2008.11.27 23:05:30


자, 보세요. 이 독자는 자연스럽게 '유기농 비료'라는 개념까지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좀 더 많아진다면, 소똥이 화학처리를 요하는 폐기물이 되지 않도록, 소의 사료에 약품 처리를 줄이고 소에게도 투약량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훨씬 쉬워질 겁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렵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겁니다. 그 '현실적'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알기 위해서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지점으로부터 슬쩍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럼 영원히 대한민국의 소들은 화학 약품 범벅이 되어 있어야 하고, 아파트 주민들의 '집값 떨어져' 원성에 공공의 선과 이익이 언제나 양보해야 하며, 우리는 영원히 석유를 수입하고 LPG로 난방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겁니까?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왜 이리 고답적인지 정말 모르겠네요.

제 문제 제기를 통해, 나름의 환경적 대안을 꿈꾸시던 분들도 자신의 상상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루거니안님, justis님, 어덴덤님 등이 링크를 걸어주신 내용들은, 하나같이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뛰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혼자 보면서, 남들과 나누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바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저널리스트 조지 몬비오의 블로그의 머릿말로 사용되는 문구가 있지요. 저는 그것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걸 인용하면서 이 논의에 대한 제 입장 정리를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Tell people something they know already and they will thank you for it. / Tell them something new and they will hate you for it.
그들이 이미 아는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에게 감사하리라. /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말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은 너를 미워하리라.

2008-11-29

온난화 회의주의?

The most spectacular example is the campaign to discredit research on global warming. Despite an overwhelming scientific consensus, many people have the impression that the issue is still unresolved. This impression reflects the assiduous work of conservative think tanks, which produce and promote skeptical reports that look like peer-reviewed research, but aren't. And behind it all lies lavish financing from the energy industry, especially ExxonMobil.

There are several reasons why fake research is so effective. One is that nonscientists sometimes find it hard to tell the difference between research and advocacy - if it's got numbers and charts in it, doesn't that make it science?
"Design for Confusion", Paul Krugman, August 5, 2005.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의 칼럼니스트께서 하신 말씀. 지구 온난화를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가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에너지 회사에서 돈을 받는 사람이거나, 그보다 더 심한 머저리거나 둘 중 하나다.

뭐, NYT도 '미국 언론'이라서 그렇다고 우길 거면 할 말 없다. 아무튼 나는 온난화 회의주의에 대해 논박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상식'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럴 때 쓰여야 한다.

2008-11-27

아파트, 젖소, 정치적 상상력

경향닷컴에 가보니 오늘자 칼럼에 대한 반응이 예상보다 너무 뜨거워서,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11월 27일 경향신문, '판'에 실린 내 칼럼의 전문을 보시죠.

[판]미분양 아파트에 젖소를
입력: 2008년 11월 26일 17:45:41

건설사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거나, 부도설에 휩싸이거나, 부도설 ‘루머’를 퍼뜨린 이를 찾아내 처벌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추운 초겨울이다. 전 세계가 디플레이션 공포에 휩싸여 있지만,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수출로 먹고 살았던 우리나라의 미래도 덩달아 암울해졌다. 우리에겐 결국 콘트리트 덩어리, 입주도 하지 않은 미분양 아파트만 한가득 남게 될 운명이다. 이 미증유의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아파트 미분양 사태를 해결하면서 수입 에너지를 국산 에너지로 대체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면서 동시에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묘안을 이 지면을 통해 공개하고자 한다. 심지어 이 기획은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에도 일조할 수 있으리라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해법은 이런 것이다. 미분양 아파트를 개조해서 집약형 목장으로 만들고, 소와 돼지 등 가축의 배설물로 바이오매스(Biomass) 발전기를 돌린다. 말하자면 판교 신도시 아파트에서 젖소를 키우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도시와 농촌을 뒤섞는 것, 로컬푸드를 넘어 도시 내 농업으로 나아가는 것은 일종의 세계적 트렌드이기도 하다. 식량이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도시인들은 같은 양의 칼로리를 섭취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한다. 오클라호마의 농장에서 도축된, 어쩌면 육골분 사료를 먹고 자랐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30개월령을 넘겼을 수도 있는, 아무튼 미국산 쇠고기는 트럭을 타고 배를 타고 냉동창고를 거쳐 부산항에 내려 다시 트럭을 타고 서울의 대형 마트에 도착한다. 그동안 석유를 계속 태우고, 대기 중에는 이산화탄소가 마구 방출된다.

이럴 경우 지구 온난화도 문제지만, 석유 공급이 끊길 경우 항구에서는 식량이 썩고 도시에서는 사람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쿠바에서 실제로 그랬다. 옛 소련이 대주는 석유에 쿠바는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오일쇼크 당시 소련의 지원이 뚝 끊겨버린 것이다. 이건 유가환급금 24만원을 쥐어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후 쿠바는 정책적으로 도시 내 농업을 장려했고, 지금은 많은 도시 사람들이 텃밭을 가꾸며 식량 자급률을 높여가고 있다. 올림픽에서 쿠바의 야구는 은메달에 그쳤지만 식량정책의 건전성은 금메달감이다. 물론 대한민국은 안타깝게도 예선 통과가 어렵다.

바이오매스를 통한 발전 또한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취약한 구조를 타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독일의 윤데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가축들의 분뇨와 퇴비 등을 모아 메탄가스 발전기를 돌리고 있다. 그 마을의 전기계량기는 거꾸로 돈다. 전기 소비량보다 발전량이 많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되고 있는 다양한 대체에너지원 가운데 바이오매스는 그 경제성과 친환경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유가가 올랐다는 핑계로 정부는 원자력발전소를 추가 건설할 계획을 세운 바 있는데, 그보다는 미분양 아파트에서 소와 돼지와 닭을 치고 그 배설물로 발전을 하는 쪽을 권하는 바다.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뜯어 불 때고’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처음에는 내가 직접 이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어볼까 했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 문제이기 전에 정치적 문제, 정치적 상상력의 문제다. 19세기 말부터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꾸고 세계 제1의 축산대국으로 거듭난 덴마크와 같은 그런 상상력과 추진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이 사업은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한다”던 박은경 전 환경부 장관 후보자, “소도 생명체인데 10년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던 김성이 전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혹은 “격한 감정을 스스로에게 드러내셨던” 유인촌 문화부 장관 등을 담당자로 조심스럽게 추천해본다.

노정태|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이 글을 쓰기 시작한 9시 45분 현재까지 확인된 리플은 총 두 개. 본디 이 코너에 리플이 거의 달리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폭발적'인 반응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옮겨보겠습니다.

이런썩을님 의견
제목 :이런!~젠장할 기사가뭐이래~@~

아파트에 젖소를 키우자고 에너지때문에 정신없는기자일세~@
그리고 미국산쇠고기 수입에 이산화탄소 까지 생각하는 기자가 있네
나원참 어이가없어서 기사를 쓸려면 그럴뜻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완전 엉뚱발랄하게쓰시네 기자 자격이 없네요
생각해보고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차들 이산화탄소 까지 생각하면 타고 다니지말아야하고 말타고 다녀야하고 기자양반아 당신은 차타고 다니는지 궁금하군요
그렇다면 경향신문에 차몇대있는지 보고 이산화탄소를 생각하시오
그리고 아파트에 젖소라니 나원참 젖소똥 태워서 에너지 발상은 탁월하지만
그냄세 소음은 어떻게 할것인지 생각해보고 기사쓰시길

그리고 미국산30개월이상인지 미만인지 그것은 당신이 생각할일아닌거 같은데
글을 이상하게비꼬는거 같아서 ....................

아무튼 기사를 쓸려면 제대로 알고 생각해보고 내보내시길바랄뿐입니다
배나 자동차를 움직일려면 기름을써야하고
당신같이 움직일려면 밥을먹어야 합니다

아무튼 이번기사는 아닌거 같네요
그시간에 대책위원회가서 제대로 알고 기사쓰시길바랍니다
2008.11.26 18:55:50


정말넘하삼님 의견
제목 :정말 이건 아니잖아~~~

아침에 출근하다 이글을 봤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경향신문 이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신문을 보는 이유는 새로운 정보나 좋은 지식을 얻거나 미쳐 생각못해던 다른 좋은 의견을 듣기 위해서 입니다.
미분양 아파트에 젖소를 키우고 축분을 모아 발전을 한다........이런
상상력이 기발하신건지 생각이 없는것인지...
더욱이 큰돈을 벌어볼까 한다고요
이보세요 기자님 현재 시골에서 아주 한적하고 지가가 낮은 시골에서 Bio-Methane Plant를 하나 짖는데 얼마나 많은 자금과 얼마나 많은 민원문제와 인허가 문제, 경제성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도 아파트에서라니요....그것도 큰 돈을 벌수 있다고요.....
다음부터는 생각좀 하시고 글을 올려 주세요
정말 어렵습니다. 경향신문에서 이런 농담으로 서민들 더 화나게 하지 말아주세요
2008.11.27 13:07:19



이 두 개의 리플을 달아주신 독자분들이 분노하고 있는 지점은 여러 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 각각에 대해, 답변이 길어질 것 같으므로 번호를 붙여서 대답해보도록 하죠.


1. 아파트는 도시, 젖소는 농촌

'아파트에서 젖소를 키우자'라는 주장을 했던 이유는, 그게 '그림'이 그려지는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기자 글쟁이 환경운동가 지사들이 '로컬푸드가 좋다', '농촌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한들 그런 말이 여러분의 귀에 와 닿기나 하던가요? 인간은 상상하는 동물입니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떠올릴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잠시 논의를 우회할 테니 조금만 집중해서 읽어주세요.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이라는 비판에 대해 동의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공화국'은 과연 서울만의 문제일까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던 도시와 농촌간의 빈부 격차 문제가 대한민국의 특수성 속에서 증폭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 수도였다면 '부산공화국'이 되었겠죠. 전주였다면 '전주공화국'이 되었을 테고요.

중요한 것은 어떤 도시가 문제냐가 아니라, 도시 그 자체와 농촌의 격차가 문제라는 겁니다. 도시의 농촌 수탈 문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된 일입니다.

도시는 자신의 생존과 확장을 위해 농촌을 수탈해야 했다. 도시가 농촌에 공급할 수 있는 물자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도시는 생산 기능을 갖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갖춘 곳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생산물들은 대부분 도시 안에서 소비되어버렸다.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생산물과 사람(=인재人才)들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도시와 농촌의 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었고, 도시는 농촌을 수탈함으로써만 문명을 생산하고 이를 성벽 '안쪽'에 집적할 수 있었다.
25쪽, 《서울은 깊다》(전우용, 돌베게 2008)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도시는 지방으로부터 '식량'을 얻어오고, 대신 행정 등 서비스를 공급해 왔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된 후로는 도시에서 지방으로 공산품이 공급되죠. 하지만 도시와 지방간의 삶의 질 차이는 지금도 역력하고, 앞으로도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서울공화국'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분들,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서울만이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도시'와 '농촌'이라는 보편적인 단어를 사용해서, 이 문제를 세계적인 추세 속에서 관찰해 보세요. 농촌에서 대량으로 식량을 생산해서 도시를 먹여 살리는 구조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로컬푸드를 넘어 도시 내 농업으로 나아가는 것은 일종의 세계적 트렌드"라는 말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시 속에서 농업을 하는 방향'으로 도시에 의한 농촌 수탈, 그리고 도시 내의 식량 공급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축이 추방된 것은 1세기가 갓 조금 더 지난 일입니다.

19세기만 해도 런던에는 닭, 소, 돼지, 말 등이 사람과 함께 살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그 배설물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서 위생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만한 과학적 지식이 축적되어 있지요. 저는 이것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아파트에서 젖소를 키우자'라는 주장을 통해 기본적으로 제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이해하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논의가 '서울'이니 '판교'니 하는, 너무도 협소한 단어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도시'와 '농촌'이라는 구도로 이 문제를 바라봐 주세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파트에서 젖소를 키울 수도 있는 상상력이 요구됩니다.


2. 먼 거리를 돌아서 오는 것들

유기농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은 이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로컬푸드'라는 개념에는 다들 어딘가 거부감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짐작컨대 이런 것일 겁니다. '로컬푸드'는 궁극적으로, 운송 수단에 들어가는 석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니까요.

"식량이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도시인들은 같은 양의 칼로리를 섭취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한다. 오클라호마의 농장에서 도축된, 어쩌면 육골분 사료를 먹고 자랐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30개월령을 넘겼을 수도 있는, 아무튼 미국산 쇠고기는 트럭을 타고 배를 타고 냉동창고를 거쳐 부산항에 내려 다시 트럭을 타고 서울의 대형 마트에 도착한다. 그동안 석유를 계속 태우고, 대기 중에는 이산화탄소가 마구 방출된다."

1킬로그램의 쇠고기를 먹기 위해 10리터의 석유가 운송 과정에서 소비된다면, 우리는 분명히 지구 온난화에 일조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비용이 더 '싸니까' 전 세계에서 식량을 운반해와 가공식품을 섞어 음식을 만들죠. 하지만 이 모델은 결국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식량을 장거리로 운송해오면, 그 과정에서 '배달사고'가 날 위험이 커집니다. 이 사진은 제가 지난번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인데, 스페인에서 트럭 운전사들이 파업을 하던 당시 슈퍼마켓을 찍은 겁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도시인들은 석유를 불태우지 않고서는 한 끼도 제대로 먹을 수 없어요.



석유가 언제까지 지금처럼 공급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지금,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가 먹을 것들을 우리가 사는 곳과 더 가까운 곳에서 얻어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파트에서 젖소를 키우는' 거죠. 젖소 뿐입니까. 듣자하니 타워팰리스 주민들은 일조량이 너무 많아서, 여름이면 수백만원씩 에어컨비를 쓴다던데, 그런 더위와 일조량은 사람이 아니라 식물에게 더 좋을 겁니다. 아파트에서는 젖소를, 타워팰리스에는 논두렁을. 하하.

거푸 강조하지만 저는 지금 세계적으로 다가오는 위기에 맞서기 위해, 도시와 농촌을 뒤섞자고, 특히 도시가 농촌으로 확장해나가는 편을 택하지 말고, 그 반대로 농촌을 도시 안으로 흡수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지금은 '비현실적'일 수 있죠.

하지만 북극 얼음이 다 녹아버린다는 발상 또한 20년 전에는 '비현실적'이었습니다.


3. 온난화에 맞서는 몇 가지 방법

지구 온난화는 딴 게 아닙니다. 대기중에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이 퍼져버렸기 때문에, 이전에 비해 평균 기온이 높아지는 게 온난화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기중'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안에 이산화탄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거죠. 잘 기억하면서 논의를 따라가 주시기 바랍니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게 왜 온난화를 야기하는 걸까요? 이걸 이해 못해서 '바이오매스는 메탄 60%에 이산화탄소 39%인데, 바이오매스를 쓴다고 온난화가 방지된다니'라는 소리를 하던 분도 있던데, 이런 생각 하시는 분들은 온난화의 메커니즘을 정말 하나도 이해 못하는 겁니다.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 드리죠. 그림판으로 그렸습니다.



그림 1. 이게 인간이 화석연료를 쓰기 전까지 지구 대기 내 탄소가 순환하던 모습입니다. 대기 중에서 불을 떼고 똥을 싸고 방귀를 뀌어도, 그것은 대기권이라는 '닫힌 계' 안에서 순환하므로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일치합니다. 따라서 CO2에 의한 온난화도 발생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죠.



그림 2. 이제 인간이 '땅 속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꺼내 쓰기 시작합니다. 이러면 대기권은 '닫힌 계'가 아니게 되죠. 외부로부터 다량의 탄소가 유입되었습니다. 그것이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가 되고, 열 배출이 안 되어서 지구는 점점 더워집니다.



그림 3. 이 시점에서 바이오매스를 활용한다고 해봅시다. 기술을 발전시켜서 외부 에너지 유입 없이 곧장 바이오매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림 1.에서 봤던 것처럼 대기권을 다시 '닫힌 계'로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대기중에 뿌려진 이산화탄소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지금처럼 온난화 대책을 세우면서 동시에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방출하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요.

일단, 아무리 바이오매스가 비효율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금처럼 줄창 석유만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게다가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고, 특히 정부는 안정적인 연구 지원을 통해 기술의 갭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이따가 설명하겠지만 '국가에서 나서서 주도적으로' 해줘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 겁니다.

만약 기술이 더 발전하여 바이오매스 발전소가 추가적인 화석 연료 없이 돌아갈 수 있다면, 지구는 한결 '쿨'해질 겁니다. 적어도 지금의 온난화 추세를 누그러뜨리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광경을 늦지 않은 시점에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4. 문제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제가 주장하는 내용은, '바이오매스 개발에 정부의 돈이 더 들어가야 한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보셨으면 하시겠지만, 저는 '도시'와 '농촌'이라는 두 개의 보편적 집합과, 그것의 구분이 낳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이 글을 썼습니다.

도시가 더는 확장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반대로, 도시에 농촌을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파트를 몇 채 더 짓고, 세금을 올리고 내리고 이런 문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칼럼에 적힌 '아파트에서 목축을, 도시에서 농사를' 이라는 컨셉이 제 머리 속에 떠오른 건 한 달이 넘은 일입니다. 지면이 빨리 안 돌아와서 공개를 못 하고 있었죠.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제가 '정치적 상상력'의 한 모범을 보여줬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경향닷컴에서 리플을 달아주신 두 분의 독자께서 이 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정부에서 허가를 안 해주고, 집이 외양간으로 변해서 기분이 나쁘고, 등등 말씀은 다 옳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 자체를, 지금부터 바꾸거나, 바꾸는 상상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상상은 구체적일수록 좋지요. 구체적이지 않은 상상은 상상이 아닙니다. 구호에 불과합니다.

진보신당에서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 발전소를 짓겠다는 발상을 내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멋지죠. 2010년만 되더라도, 지금 쓸데없이 보이는 그런 짓들이 얼마나 가치있는 '정치적 의제'인지 드러날 겁니다. 제가 '물의'를 빚어버린 이 칼럼도 그렇고요.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서울공화국'이 문제라고 생각하신다면,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그 문제를 바라봐 주세요. 그러면 '도시'가 보이고, '농촌'이 보입니다. 지구 온난화가 문제라고 생각하신다면, 땅 속에 있어야 할 석탄과 석유가 불타올라 대기중에 뿌려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려 주세요. 지금은 바이오매스가, 통상적인 에너지에 비해서는 비효율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그렇게, 필요를 앞서 보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토건족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토건족 비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시민들이 앞서서 한 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저는 저널리스트로서, 비록 환경문제나 그에 수반하는 경제 문제 등에 대해 학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았습니다만,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에 기대어 우리 사회의 담론 지형에 조약돌을 하나 던지고 싶었습니다.

기사보다 몇 배 긴 설명문이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11-23

맨큐의 투표경제학

경제학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중립적인 학문일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2008년 미국 대선과 관련한 맨큐의 발언을 곱씹어보고 있노라면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수밖에 없다.

맨큐가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 칼럼의 내용을 되짚어보자. 2008년 11월 4일, 맨큐는 "Should you vote?"라는 제목의 포스트를 올렸다. "만약 당신이 이 블로그의 독자고,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투표는 시민의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블로그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어떨까? 답은 여기."라는 제목의 짧고 간단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가 2006년 5월 중간선거 당시에, 2000년 10월 무렵 WSJ에 쓴 기사를 퍼놓은 포스트가 링크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Why Some People Shouldn't Vote?"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맨큐는 다른 사람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행위가 '경제학적'으로 현명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2000년 부시와 고어가 맞붙었을 때에도 그랬고, 2008년 오바마와 맥케인이 격돌할 때에도 그랬다.

논리 구성은 이런 식이다. 투표권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판단하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가령 여행을 가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충분한 정보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괜히 투표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은, 정치적 의사 표현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이 행사하는 한 표의 가치를 희석시킨다. 타인에게 투표를 권하지 않아야 자신의 한 표가 가지는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말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이명박이 뭔가 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그를 찍은 20대를 보며, 혹자는 '차라리 투표를 하지 말던가'라고 투덜거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100만명이 투표할 때보다는 99만 9999명이 투표할 때 내 한 표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투표 독려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맥락을 거의 일부러 도외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권할 때 선관위 조직원처럼 '중립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야, 솔직히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다 그게 그거지 않냐? 어쩌구 저쩌구... 아니 뭐 진보신당 찍으라는 건 아니고, 꼭 투표하라고'라는 식으로 '투표 권유'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골방과 광장을 동시에 요구하는 복잡한 정치 체계이기 때문에, 투표 독려를 빙자한 정치적 의견 표명과 토론 등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용납되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무관심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은 더 많이 토론하고 숙고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험을 해야 하기도 하다. 투표율 저하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조용한 파도였고, 오바마의 출현은 그것을 반전시켰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는 사건이다.

맨큐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읽기 쉬운 경제학 원론 교과서를 쓴 저자답게, 그 '복심'마저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미국 내에서 25세의 공화당 지지율은 30%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다. 젊은이들이 서로 투표를 독려하면 독려할수록 공화당에는 손해다. 그는 11월 5일에 올린 포스트에서 아예 이런 표까지 보여준다. 사람이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가 싶다.



경제학적 지식 그 자체는 정치적으로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맥락에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정치적으로 큰 차이를 갖는다. 미네르바라는 다음 아고라 이용자를 둘러싼 소동을 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잠깐 적어 보았다.

2008-11-20

노무현: 신자유주의자인가 네오콘인가

심상정 진보신당 상임대표와 노무현 전 대통령간의 논쟁이 한창이다. 과연 노무현이 심상정의 재반론에 성의있는 답변을 돌려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만든 정치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에 올려놓은 반론의 내용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이명박이 집권하기 전까지 한국 사회가 어떤 원리에 의해 운영되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11월 20일 현재까지 진행된 토론의 내용은 이 기사와 관련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 유독 눈길을 끄는 지점이 하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이 따로 있고, 개방은 그 내용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라면 FTA나 개방을 추진한다 하여 그 하나 만으로 바로 신자유주의라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신자유주의를 한마디로 말하면, '작은 정부' 사상이라 할 수 있"다고 정의하고는,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가 작은 정부를 지향한 것일까요?"라고 되묻는 노무현의 화법이다.

노무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신자유주의란...'이라고 설명을 다는 심상정의 반론은 그다지 현명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엄연히 개별적인 정책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신자유주의'라는 경제학적, 정치철학적 개념에 대한 토론으로 '철학화' 하는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나는 시장의 개방에는 찬성하나 작은 정부를 지지하지 않으므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장의 자유, 기업의 자유와 함께 정부의 역할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네오콘', 즉 신보수주의자들을 고전적 자유주의자, 즉 신자유주의자들과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박성래 기자가 쓴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자유방임주의자인 하이에크에게 국가의 역할 확대는 그 형태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복지국가라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노예로의 길'일 뿐이다. 이에 반해 신보수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 확대를 걱정하지 않는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오히려 국가의 역할 확대가 자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212쪽)


박성래에 따르면, 네오콘은 사회복지를 확대하는 대신 개인의 일상적 생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택한다. 따라서 적어도 스스로는 "전반적으로는 복지제도를 정비하고, 지출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확대했"다고 주장하는 노무현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에게 '네오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부당한 일로 보일 수 있다.

나 또한 직접적으로 '노무현은 네오콘이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이 보이는 행태에서 일종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을 따름이다.

첫째. 노무현의 말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말처럼 일관성이 없다. 국가의 기능을 강화한다면서 투자자 국가 직접제소제가 포함된 한미 FTA를 밀어붙였고, 서민경제를 살리겠다면서 부동산을 통한 경기 부양에만 골몰했을 뿐 내수침체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둘째. 그 노무현의 비일관적인 말을 일일이 '좋은 의미'로 해석하려 드는 일군의 '제자 집단'이 있다. 두 번째 항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까지나 '진보가 아니며', 다만 '제대로 된 보수주의를 지향할 뿐'이라고 늘 강변한다. 즉 새로운 보수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보수주의를 영어로 번역하면 네오콘이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자신들이 '새롭기' 위해, 사실상 '낡은' 보수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토의 네오콘과 비교하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초라한 집단이지만, 해당 국가에 미치는 정치적 해악의 크기는 만만치 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노무현의 비일관적인 발언에서 네오콘과의 유사성을 더듬어낸 이 모든 논의는, 굳이 말하자면 '은유'적인 차원에 불과한 것이지 '노무현은 신보수주의자다'라고 직접적인 명제를 구성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한국의 담론적 수준을 고려할 때, 정치적 토론의 장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은 그 자체가 패착일 뿐이다. 둘째.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노무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그 외의 '좌파적 경제정책'을 선악 구도로 놓고 파악하는 고질적 이분법 하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논변이다. 그리고 바로 노무현은 그런 이유로 '나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오'라고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심상정은 선택을 해야 한다. 노무현이 스스로 신자유주의자라고 인정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명박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 정책에 대해 토론하는 차원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일종의 초월적 이념에 불과하다.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도를 계속 높이는 방향으로 국정 운영 방향을 결정했던 그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묻는 방법은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토론이 진정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지난 5년간 한국 사회를 이끌었던 노무현 정부의 진면모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미국의 '네오콘'보다 황당하면 황당했지 '상식적'일 리는 없다고 짐작한다.

2008-11-17

레오 스트라우스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철학 논쟁이 진행되는 한 사례로 레오 스트라우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철학박사 강유원 씨가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쓴 서평의 내용을 참조하자면, 스트라우스와 그 제자들 즉 스트라우시언들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비밀스러운 독해에 근거하여 무식한 대중은 그냥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고 똑똑하고 잘난 엘리트가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자들이다. 문제는 고전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들 나름의 독해를 형성하고 그것을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전환시켜 유표하는 집단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고 조지 W. 부시를 철학자라고 우기는 것처럼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텍스트의 세밀한 맥락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과 침탈을 통해 그 과정이 수행된다. 2005년 6월 무렵의 독서 기록을 뒤져보니, 레오 스트라우스가 플라톤의 《향연》에 대해 강연한 내용인 《Leo Strauss on Plato's Symposium》(Univ. of Chicago Press, 2001)의 몇몇 구절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 그것들은 지금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블로그에 공개한다.

And I said, "When we were still children, when Agathon won with his first tragedy, on the day after he and his chorus had offered the sacrifice for victory." "So it was after all," he said, "a very long time ago, it seems. But who narrated it to you? Or did Socrates himself?" "No, by Zeus," I said.(173a5-b1)
20-21p, 《Leo Strauss on Plato's Symposium》.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우리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아가톤이 그의 첫 작품으로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여 합창단원들과 함께 신에게 감사의 제물을 올리며 축하연을 열었던 날 바로 다음 날이었다네!"
"그렇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일인 것 같구먼! 그러나 누가 그 사실을 자네에게 이야기해준 것인가? 소크라테스님 본인인가?"하고 그가 물었지.
"맙소사, 소크라테스님이 아니라" 나는 말하길,
39쪽, 《향연-사랑에 관하여》, 박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년)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레오 스트라우스가 직접 번역한 《향연》의 한 구절과, 국내 연구자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 같은 구절을 병기해 놓았다. 본격적으로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배경 지식을 조금 알아보자.

《향연》은 액자식 구성 속에서 또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 작품으로, 여기서는 '나'로 지칭되는 아폴로도로스가 익명의 친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향연 참가기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 향연 참가기 또한 소크라테스가 직접 아폴로도로스에게 말해준 것은 아니고, 아리스토데모스라는 소크라테스 추종자를 통해 전해들은 것을 옮기는 것이다(복잡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향연에서 '사랑'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디오티마라는 여사제의 입을 빌어 전달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나오지만 본인이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을 살펴보자. 박희영이 그저 '맙소사'라고 옮긴 대목을, 레오 스트라우스는 'No, by Zeus'라고 번역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리스어 읽는 법을 익히지는 않아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혹시 그리스어를 읽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해당 부분의 원문 주소를 링크해 놓기로 한다). 하지만 방금 링크한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영문 번역에서도, 해당 부분을 “Goodness, no!”라고 옮기고 있는 것을 볼 때 스트라우스의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아마도 직역을 통한) 일종의 창조적 해석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스트라우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May I say only this: God forbid that Socrates would have told the story." '하느님 맙소사'와 같은 감탄사를, '신'에 의해 소크라테스가 향연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의미로까지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한 두 개가 아니다. 네 페이지만 넘겨봐도, 그리스어의 단어 'agathon'을 곧장 beautiful로 번역한 후, 그에 따라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치밀한 과정을 통해 《향연》은 레오 스트라우스가 원하는 '바로 그 텍스트'로 조금씩 변해간다.

사실 나는 당시 그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서, 레오 스트라우스가 《향연》에서 어떤 함의를 이끌어냈는지까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당시 《국가》를 콘포드(F. M. Cornford)와 백종현의 번역을 병행해서 읽고 난 후,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궁금증도 확인할 겸 《향연》도 읽을 겸 그 책을 집어든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처음 인용한 부분에서 의아한 생각이 들어, 대조해서 읽기 위한 한국어판을 구했고, '역시, 뭔가 수상한 게 있다!'는 작은 발견을 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최소한의 성의가, 고전 텍스트 및 철학적 지식의 왜곡을 통한 이데올로기 투쟁에 맞서는 방식도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설명만을 통해 《향연》을 알게 된 시카고 대학교 학생의 플라톤 이해와, 잘 읽히는 한국어 번역본과의 대조를 통해 그 책을 접한 나의 플라톤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어떤 정치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 그리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따라 엘리트는 모든 정보를 인민에게 개방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결론에 동의할지 동의하지 않을지도 바로 그 시점에 결정될 수 있다.

물론 나는 고대철학에 대해 그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번역본을 대조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스어 원문에 대한 나의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 한 나와 레오 스트라우스는 《향연》의 해석을 놓고 '논쟁'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약간의 의심을 곁들인 관심을 더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비밀스러운 독해에 근거하여 무식한 대중은 그냥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고 똑똑하고 잘난 엘리트가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는 훨씬 더 좁아질 것이다.

올바른 과학적 지식이 미신과 선동에 맞서 싸우는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인문학적 지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자신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들먹이는 그런 종류의 '관심'이 아니라, 알 수 있는 만큼 알아보고 모르는 것에 대해 겸허해지는 그런 종류의 '지적 탐구'가 일반화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탐구할 수 있을 만큼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그의 저작을 통해 알아보았고, 뭔가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성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니게 되었다.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말할 수 있다.

2008-11-12

인문학의 사회적 기능

우리의 문화적 코드 속에는, '공자왈 맹자왈' 하듯 학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권위로 찍어누르고자 하는 행동 유형과, 그것에 반발하는 무조건적인 작동 기제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토록 긴 글을 써가며 설명한 내용을 이렇게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칸트를 빌어 창조론을 과학에서 추방할 수 있"는 이유는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우리의 경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시 심리학 또한 추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심리학의 대상은 인간의 심리 현상이며 그것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과 과학의 역할 분담에 대해 끝없는 혼돈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의 인문학적 상식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문학의 저변을 넓혀서 사이비 지식의 범람을 막는다'라는 말의 뜻도 제대로 이해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추판다님의 계속되는 오해는 인문학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놓고, 그것을 과학과 같은 대립선상에 올려놓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문학은 과학을 '제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놓고 보자면, 정 반대로 과학을 '보조'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창조과학'자들이 곧잘 입증하려 드는 명제 중 하나인 '여호수와 10장에 나오는 태양 멈춤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구가 돌다가 멈추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은 접선 방향으로 날아가게 된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고 그래서 과학도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온갖 이유를 대가며 그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원한 진리인 성경'에 그렇게 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는 것, 창세기부터가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사본이 특정 시기에 결합하여 만들어진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르네상스 시절부터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교회들은 대체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으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인문학이 과학을 '보조'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과학적으로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적으로도 부인될 수 없는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온갖 '과학적' 증거를 들어 그 사실을 주장할 때, 인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의견에 대해 인문학적 합리성을 통해 논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은 완전히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다. 가령,

또, 인문학으로 창조론에 대응하는 건 현실정치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다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칸트라고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이쪽에서 칸트를 내세우면 저쪽에선 중세철학의 온갖 변신론이나 아니면 다른 상대주의 철학들을 들이댈텐데 이런 끝나지 않을 싸움에 빠져드는 게 과연 '해결책'일까?
"인문학적 제어론 (2)", Null Model, 2008년 11월 11일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이 지닌 다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창조론에 과학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끝이 나지 않는 싸움으로 이어진다.

창조론을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성경에 '과학적' 권위를 입히고자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경에 대해 과학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성경이 '과학적' 텍스트라는 의미가 된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자들에게 떡밥을 던지는 저질 블로거와 다를 바 없다. 과학자들의 답변을 통해 그 논쟁이 끝날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한다.

이 경우, 비록 '정답'이 없고 '끝나지 않는 논쟁'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문학이야말로 이런 무지와 편견에 맞서는 가장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쓴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창세기 1장 내에 존재하는 두 텍스트의 차이를 설명해보라고 하는 것, 백제가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에게 굴삭기가 때려부수고 있는 산성의 정체를 물어보는 것, 등등의 반성적 고찰이 사회의 상식으로 통용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그래도 믿고자 하는 사람은 줄기차게 믿겠지만, 그 발언이 가지는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이고 그로 인해 끼쳐질 사회적 해악의 감소 또한 노려봄직하다.

'제어론자'와 '견제론자'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 과학에 대한 불필요한 '인문학적' 비판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인문학적' 논쟁으로 소화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황우석이 과학자로서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그들의 잘못된 의견이 생산되고 있다면, 인문학적 논쟁을 통해 그 무지를 깨우치고 올바른 견해를 수립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문학의 역할이다.

마치 인문학이 '야, 너 철학자 칸트가 한 얘기 아냐? 것도 모르냐? ㅋㅋㅋ'라는 식으로 깝죽거리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선 우리가 속한 문화가 무식한 사람을 천시하는 문화이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덜 된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지 인문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황우석이 포토샵으로 연구 성과를 냈다고 해서 모든 과학도들이 포샵질의 달인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2008-11-07

과학과 철학은 대립하는가

나는 과학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도 나쁘지 않다. 수학은 잘 못했지만, 과학은 잘했다. 비록 문과생이지만 교양과학 서적을 즐겨 읽는 편이고, 구독 블로그 목록에는 과학 종사자들의 블로그가 적잖게 올라와 있다.

또한 소칼이 《지적 사기》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적잖이 공감한다. 은유는 어디까지나 은유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를 따라가면서 전개되어야 한다. 또한 은유는 기본적으로 잘 아는 것을 통해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모르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더 모르는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소칼이 제기한 일부 경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인문학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아이추판다님의 발상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저의"라는 글에서 아이추판다님은 문제 의식을 혼동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아마 그는 노예 소유주였을 것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는 재위 기간을 모두 전쟁과 정복으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당대의 문장가요 교양인이었으나 갈리아에 대해서는 침략자였고 로마 공화정에 대해서는 독재자였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 중 일부는 이단심문관이었으며 또한 마녀재판관이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는 식민 통치를 위해 고전을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
"저의", Null Model, 2008년 11월 4일


'인신공격의 오류'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의 역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몇몇 '스승'들의 인격을 본받기 위해 하는 학문이 아니다. 개별적인 인문학 분야에는 나름의 연구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한 연구와 연구자에 대한 인격적 판단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 특히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철학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나 또한 그 차원에서 대답해보겠다.

내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철학을 '잘 사는 법'에 대한 연구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크다. 즉, 철학자라면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의 철학은 잘못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짧은 생각이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를 세 가지의 질문으로 요약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근대 이후의 철학은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그리고 그 지식에 대한 확실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를 꾸준히 질문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 명제도, 그 방법으로 발견된 '확실히 존재하는 나'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구성해 나가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모든 지적 탐구의 역사는 '잘 사는 법'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가령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그 중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문제의식. 철학적 텍스트에서 그동안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 부분을 잡아내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해석 기법. 독일어와 그리스어의 어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론. 이것들은 하이데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철학의 역사에서 이루어낸 큰 성취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의 철학 그 자체로부터 나치즘과의 관련성을 캐내려는 시도가 꾸준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가 철학적 논쟁인 것이지,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라고 제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중반부터 인간에 대한 자연 파괴를 통탄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켜낸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그렇다면 과연 인문학, 범위를 좁혀 철학이 '현대의 문제'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저의"에 다음과 같은 리플을 달았다.

'좋은 나라'란 무엇인가요? 이명박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와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가 다를 것 같은데요. 이런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고전에서 다루어진 논제들을 다시 훑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창조과학같은 사이비 과학이 미국에서 판치는 이유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단의 '열심'을 제어할만한 인문학적 소양이 그 사회에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창세기의 창조 설화가 '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상식이 되어있습니다만, 그게 진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면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의 유물'로 취급되느냐는 다른 문제죠.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노빠'들이 '상식'을 운운하며 날뛰지만, 대체 그 상식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다운 대답을 듣기란 어렵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노예 소유주와 영국 부르주아들, 그 외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실컷 논의해놓은 바가 있는데, 그 모든 과거의 유산을 도외시하고 현재만을 사는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 무식한 자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지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판단한다. 미국에서 판을 치고 있는 창조과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가 7일만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은 것임을, 또한 생명체가 진화해왔음을 증명하는 '과학적 증거'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창조를 과학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게 과연 '과학'의 부족 때문일까?

하지만 나의 문제제기를 아이추판다님은 영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새 포스트를 올려, "이와 같이 인문학이 무엇을 제어해야 한다 또는 제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인문학적 제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제어대상으로 손꼽히는 것이 아마 과학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밑에 ....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신 분이 잘 지적해 주셨다시피, 나는 인문학이 과학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없다. 나는 이미 칸트가 1700년대에 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칸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대상, 가령 신, 자유 등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우리의 이성이 범주를 적용하려 드는 것에서 오류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자비로운가?', '인간은 기계론적으로 결정된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를 가진 존재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대상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이런 질문을 한다. 요컨대 사람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그저 헛소리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신은 자비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해 누군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신은 자비롭지 않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신보다 더 잔인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 또한 마찬가지다. 리처드 도킨스가 되도 않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칸트가 대답했다.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우리가 세계를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경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논할 수는 없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은, 곧 과학적 지식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말과도 같다. 《프롤레고메나》에서 칸트는 '안전한 길에 접어든 학문'의 대표로 수학과 자연과학을 꼽는다. 수학은 경험적 대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에 형이상학과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반면 자연과학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 회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칸트의 자연과학에 대한 생각에 동의한다. 철학이 해야 할 일은 과학을 '제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지식이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사이비 지식과 사이비 과학이 사람들에게 어설픈 회의주의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 중 하나이다. 이것은 나만 동의하는 발상이 아니다. 최근 과학철학에서 등장한 논의들은 말 그대로 '최근'의 것일 뿐 그것이 철학이나 인문학 전체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과학이 무색무취하지 않다는 비판,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다는 비판을 하는 인문학자들에 대해 나는 그러므로 따로 변호의 말을 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발상이야말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일은 어디까지나 철학 혹은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야만 하므로 백인들의 전유물이다'와 같은 허술한 논변을 내세우는 과학도의 역할이 아니다.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포스트를 통해 아이추판다님은, 프랑스 철학의 '스타일'에 정치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어의 섬세한 뉘앙스를 통해 전개되는 논의는 그만큼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그 결과 "철학판이야말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만한 지점이 있다. 철학은 대부분의 학문과 마찬가지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그것과 프랑스 철학의 수사학적 성향을 논하는 것은 별개다.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철학 텍스트는 충분히 번역 가능하고, 또 외국어를 통해서도 교육하거나 토론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언어의 특성에 기대어 창조된 개념의 경우 전달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하이데거의 Dasein은 독일어의 Da와 Sein을 합성한 것으로, 독일어를 모른다면 즉각적으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단어를 한국어의 맥락에서 '현존재'라고 번역하고, '현존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이다'라고 서술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서양 철학을 하는 것, 혹은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발간되는 주요 철학 저널에 자신의 논문을 등재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철학이 문화적 맥락 속에서 논의되는 학문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황인종이고 저들은 백인종이고 그래서가 아니다. 가령 분석철학의 경우 김재권 교수가, 정치철학의 경우 승계호 교수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국계 미국 철학자'이지 '한국 철학자'는 아닐 것이다. 아이추판다님이 논적으로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은 상당히 문화 중립적이고 철학은 그렇지 않다. 중국인이 한국 사학계의 논문집에 자기 논문을 올리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가 프랑스 철학계의 일원이 되기 어려운 것을, 지나치게 해석하면 곤란할 듯 싶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자신이 아는 극히 몇 가지의 사례만을 놓고, 인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비하를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문학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는 도리어 반지성주의의 토대가 될 뿐이며, 과학을 우롱하는 비과학적인 목소리에 대한 사회의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낳는다. 한참 전에 언급한 창조과학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흔히 쓰는 논법은 이런 것이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100% 부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100% 부정할 수야 없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들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면 창조과학자는 '거봐라, 아무리 현대과학이 발전해도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라고 논리적 비약을 할 것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선량한 과학자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내게 된다. 혹은 리처드 도킨스처럼 책을 쓰거나.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종류의 지적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의 몫이었고, 나는 그 사례를 칸트를 통해 제시한 바 있다. 오히려 그동안 진행되어온 철학적 논의에 무지한 상태로, 다만 잠시 기승을 부리고 있을 뿐인 주장들에 반박하기 시작하면, 담론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자신이 뭘 반박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화부터 내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줄창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제어론"의 리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고래를 관찰하는 것과 별로 상관없어도 그의 정치철학하고는 심각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요?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가 아니었다면 과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설마 알렉산더 대왕이 아테네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교육한 것은 마케도니아가 제국으로 본격적인 발을 내딛기 전의 일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을 쓴 것은 그가 알렉산더의 교육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을 설립한 뒤 한참 후의 일이며,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에 입각한 도시국가를 논하고 있을 뿐 알렉산더가 만드는 제국의 논리를 찬양하고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알렉산더의 제국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 본질적 연관이 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입증할 수 있다면 그는 인문학계의 스타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판하다가 못된 것만 배웠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일단 써놓은 후 질문으로 바꿔서 그 입증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있다.

기초적인 오류는 계속 발견된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였던' 것은 맞는데, 플라톤이 살던 시대는 이미 아테네가 한물 간 다음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가면 거의 망해가고 있었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태어나, 페리클레스의 후계자 알키비아데스의 죽음을 목격했고,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권을 빼앗기고 위축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국가》에서 수호자 계급을 칭송하는 것은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심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데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물론 아테네 사람이니까 다른 도시국가에서 온 유학생을 가르치고, 시라쿠사로 망명해서 자신의 이상국가를 건설해보고자 시도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게 플라톤 철학의 본질적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아이추판다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파피루스가 중세에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의미 없는 소리를 뭐하러 하는 걸까?

홍준기를 포함한 일부 인문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에 무지하고, 과학에 대해 불필요한 '견제론' 따위를 들먹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는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상식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있는대로 다 드러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서평에서 테리 이글턴은, '영국의 새들'이라는 책 한 권 달랑 읽고 조류학에 대해 떠드는 녀석을 보는 기분이라고 실소를 터뜨렸다. 내 소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과학을 '까고' 있지 않다. 다만 과학을 수호하기 위해, 얼척없이 철학을 '까는' 방향을 택한 이를 책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과 철학을 대립하는 것으로 놓는 것은, 결국 반지성주의와 지적 회의주의의 득세만을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좀 더 신중하게, 과학도로서 인문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주었으면 한다.

2008-11-06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인터넷 미디어 비평 매체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미국 대선에 대한 제 생각은 좀 더 천천히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외신과 주요 블로그를 통해, 오바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보자. 'It's time'이라는 명료한 표어와, 속된 말로 대단히 '간지나는' 표지로 오바마의 당선 커버스토리를 낸 <이코노미스트>는, 오바마가 당장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애초부터 그는 '적절한 상황이 되면' 이라크에서 발을 빼겠다고 했을 뿐,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즉시 철군하겠다는 식의 공약을 내걸지 않았다. 오바마가 일거에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미디어스, 2008년 11월 6일.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 미국 대선 결과를 보는 외국 언론들의 몇 가지 시선

버락 오바마는 '변화'를 핵심 기치로 내걸고 미국의 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것을 보도하는 대부분의 한국 언론의 자세는 새로움과 거리가 먼 것 같다. 한국 주류 언론에서 오바마의 당선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인간극장. 2. (어쩌고 저쩌고) 흑인. 3. 부시와는 다름. 그리고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 두 가지 정도 사안을 살펴본다. 첫째, 오바마가 당선되었는데 한미 FTA를 원안대로 통과시킬 수 있을까? 둘째, '친미 반북'을 표방하던 정치 세력에 균열이 생길 것 같은데, 어떻게 될까?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보도 포인트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궁금한 것일 수 있다(가령, '아니,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됐단 말야?'라며 놀랄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또 케냐 이민자 출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인종차별을 딛고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된 남자의 '성공 신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같은 정보만을 쏟아내는 국내 언론들을 바라보며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바마의 당선이 왜 중요한 일인지를 명확히 하고, 그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대강이라도 나누어 보는 것이다.

   
  ▲ 뉴욕타임스 웹사이트 캡처.  
 
여러 외신과 주요 블로그를 통해, 오바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보자. 'It's time'이라는 명료한 표어와, 속된 말로 대단히 '간지나는' 표지로 오바마의 당선 커버스토리를 낸 <이코노미스트>는, 오바마가 당장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애초부터 그는 '적절한 상황이 되면' 이라크에서 발을 빼겠다고 했을 뿐,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즉시 철군하겠다는 식의 공약을 내걸지 않았다. 오바마가 일거에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최근 워싱턴포스트컴퍼니에 인수된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지 <Foreign Policy>는, 각계 전문가 10인에게 다음 행정부를 구성할 만한 '드림팀'을 꼽아달라고 청탁했다(<Foreign Policy>, 2008년 11/12월호). 그 결과 다섯 명의 전문가가 로버트 게이츠 현 국방장관의 연임을 요청했다. 그가 이라크 파병군 증가를 통해 상황 호전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오바마가 이라크에서 당장 미군을 빼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11월 이후 미국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된 경제 살리기는 어떨까.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룬다. 2001년 경기 침체기 당시에도 소득 중 소비 비중을 줄이지 않았던 미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소비자들의 신용카드가 닫혀있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위기로 확산되는 경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미국 경제가 겪고 있는 위기는 카리스마나 구호만을 통해 극복될 수 없을만큼 구체적이고 심각한 것이다.

그래도 영국의 <가디언>은 '대통령 오바마는 미국의 희망이며 동시에 우리의 희망이다'라고 환호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그 희망은 구체적인 정책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가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뚜렷한 정치적 입장에 근거하는 듯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미국의 건강 보험 시스템, 막대한 재정 적자, 경제 위기 등을 오직 '올바른 태도'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2008년 미국 대선이 2004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뉴욕타임스 사이트에 있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크루그먼은 '오바마는 당당하게 진보적인 가치를 내걸고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음으로써 승리했다'며, 그 가치는 결코 폄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현실은 어렵지만 나침반만은 비로소 올바른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 가디언 웹사이트 캡처.  
 
하지만 구체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 역시 현실은 어렵다. 클린턴 1기 당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히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거대 기업들의 로비와 영향력이 살아있는 한 오바마가 자신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오바마가 오늘 승리한다면, 진짜 시험이 내일부터 시작될 것이다'. 요컨대 그는 희망을 걸고 있지만 낙관하지는 못하고 있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 10월 29일 영국의 유명 칼럼니스트 사이먼 잰킨스는 <가디언>에 글을 보냈는데, 그 첫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오바마를 주식에 빗대어, '지금 오바마를 팔아라'라고 권한다. 오바마 주식은 과대평가되어 있으며 장래 다가올 시장은 미쳐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 너무 큰 기대를 걸면, 나중에 안게 될 실망의 크기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공화당원이 아닌 흑인 대통령 후보'라는 것 뿐이다. 오바마가 자신의 선거운동을 승리로 이끈 것은 그의 개인적 매력과 풀뿌리 조직의 결합 덕분이었다. 그 둘은 국정 운영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매도 시기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당연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바마'를 아는 것보다 '미국' 그 자체를 아는 것이다. '오바마와 나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철학을 추구하고 있다'라는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발언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외모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의 차이 때문이다. 오바마만을 놓고 아무리 궁리해봐야 우리는 미 대선과 한반도의 운명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노정태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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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10월의 여행

경제 위기가 닥쳐오고, 마감이 덤벼들고, 개인적으로 맡은 일도 처리하다보니 10월에 다녀온 여행 사진을 11월에 올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나는 동행인과 함께 10월 3일 개천절에는 10번째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다녀왔고, 이후 10월 4일과 5일에 걸쳐 부산에 내려가 영화는 한 편도 안 보고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쏘다니며 이것 저것 쇼핑을 하고 돌아왔다.

긴 글을 쓰긴 좀 피곤해서, 사진과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김창완 밴드.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부터 세 곡을 내달렸다. 쌈싸페의 키치 분위기가 김창완 밴드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전까지는 '슈퍼키드'라는 명랑한 친구들이 나와서, 치킨집 앞에 놓는 흐느적거리는 풍선 인형을 틀어놓고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얼쑤절쑤 덩실덩실 신나게 랩을 하는 분위기였는데, 김창완 밴드가 락으로 정리했다.




유앤미블루의 이승열. 한국의 보노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백 퍼센트 즐기지는 못했다.

사실 이번 쌈싸페의 최고 이벤트는 심수봉의 등장이었는데, 그 광경을 사진으로 못 찍은게 아쉽다. 목소리의 힘은 많이 죽었지만 타고난 분위기만큼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10월 부산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기였다. 국제시장. 토요일 밤에 지리를 파악하고 일요일에 쏘다녔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암굴'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곳. 낮에 찍어서 그런지 그 느낌까지 살아있지는 않다.




부산에서는 포장마차에서 오뎅과 곤약을 같이 팔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굳이 시식해보고 있는 대중문화비평계의 큰 별 노정태 선생.




해 떨어진 자갈치 시장에서, 회가 나오기 전까지.





부산 국제시장의 '개미집'에서 먹은 낚지볶음.





개미집 간판. 낙지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개미집 간판을 자세히 보면 글씨 안에 정말 개미가 들어있다. 둘 다 은근히 귀엽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말처럼 달리고 싶은 사람은 클릭해서 크게 보시길.




친구가 구입한, 노먼 록웰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우산을 쓰고 찍은 사진. 노먼 록웰의 일러스트를 나는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몽롱하고 포근하지만, 나와는 너무 이질적인 문화적 코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의 일러스트를 보고 있노라면, 내 것이 아닌 그리움에 휩싸이게 되고, 그로 인해 굳이 느낄 필요가 없는 소외감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렸을 때, 양과자 깡통에 그려진, 풍성한 핑크색 치마를 입고 양산을 쓴 아가씨의 파스텔 그림을 볼 때의 기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러스트가 우산에 그려져 있으니, 감정적인 동요를 미적인 즐거움이 압도했다. 어쩌면 예전 그때와 감성의 구조가 조금 달라진 것일 수도 있겠다.




깡통시장을 쏘다니다가 먹은 '할매 유부오뎅'. 당면이 들어있는 유부를 삶아서 오뎅과 함께 내준다. 다소 느끼하긴 하지만, 북적거리는 시장을 누비고 다니다가 HP를 충전할 때에는 이런 걸 먹어줘야 하지 싶다.




국제시장에 있는 가야밀면에서 저녁. 작년에 다른 곳에서 먹어본 밀면은 실망스러웠는데, 여기는 마음에 들었다. 밀면 맛이라는 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맛있는 것과 맛없는 건 확실히 다르다.




여행의 소득. 골동품 상인에게서 덥썩 산 손목시계. 메이커도 없고, 방수 기능도 없고, 바늘 세 개와 유리판만 있는데, 은근히 그럴싸해보여서 샀다. 지금도 내 손목에 차고 있음.

마감을 끝내고, 맡은 일들을 잘 처리하고, 언젠가 또 여행을 가게 될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요즘 이래저래 사는 게 팍팍하다. 고작 한 달 전인데, 이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다시 봐도 흡족하다.

2008-11-03

토론다운 토론

지난 포스트에서 내가 다소 생뚱맞게도 '금리인하 논쟁'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그것이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지금 금리를 인하하는 것은 환율 및 기타 경제지표보다 내년도 성장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동시에 그것은 '이명박의 경제정책'을 좀 더 세부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의사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 않으므로, 그 각각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준금리 인하로 인한 경기부양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한은 이성태 총재는 '내년도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하한다는 점을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미국 연준이 금리를 1%까지 내리고, 일본이 0.5%를 0.3%로 낮춘 것도 전부 2008년도 4/4분기가 아니라 2009년도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기준금리 인상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은행이 원화의 기준금리를 인상한다면 그 신호를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이해할까. 내년도에 어떤 혹독한 경기 후퇴를 겪건, 지금 당장 꺼야만 하는 큰 불이 있다, 이런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 아닐까.

가령 유럽의 '금융 허브'로 잠깐 떴다가 가장 큰 서리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최근 기준금리를 12%에서 18%로 대폭 인상했다. 한국 경제에 대해 아무리 비관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2008년 11월 3일 현재의 대한민국과 아이슬란드를 같은 사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내년도 경기 후퇴에 대비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경기'에 대한 것인가, 즉 새로운 성장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로 집중된다. 비정규직 비율을 줄이고 고용을 안정화하며 사회복지를 확충하는 것은, 모두 국내 소비 진작에 도움이 된다. 미국의 소비심리가 대후퇴하고 있는 지금, 아무리 '환율주권'을 사수한다 한들 수출 주도형 경제로는 안정성 확보에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지난 글에서 우석훈 박사의 '환율주권' 언급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현행 경제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환율주권론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우석훈이 특히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주장한 '전쟁산업'에서 '평화산업'으로의 이행은, 지금과 같은 중공업 중심의 수출경제 구조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환율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리인하에 반대한다는 말은 그의 전체적인 논지에 비추어볼 때, 성립이 불가능하지야 않지만 상당히 어색하다.)

금리인하 논쟁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현재 한국 경제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중공업 시대, 건설업 시대를 이어 어떤 곳에서 성장동력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전부 사장된 채, 이렇게 해도 한국 경제 망한다 저렇게 해도 한국 경제 망한다, 이런 목소리만 드높았던 것이 최근 두어 주일간 벌어진 담론적 소극 아닌가.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면, 그로 인해 유발될 더 극심한 디플레이션 속에서 어떻게 한국 경제를 재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그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담론이 흘러가고 있다. 한국은행의 결정 이후 환율과 주가가 안정세를 찾자, 한나라당과 청와대는 '미네르바를 잡아라' 따위 마녀사냥질을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환율이 높아지고 주가가 낮아진다는 이유만으로 이명박 정권 하에서 벌어지는 모든 경제 정책을 싸잡아서 비판하다가, 결국 논의다운 논의도 해보지 못한 채 촛불시위때와 같은 패턴으로 닭몰이를 당하고 있다. 이건 저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쪽이 저들보다 멍청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주가 올라가면 미네 버로우? ㅋㅋㅋ' 같은 소리 하던 아고라의 삐딱한 인간들이, 지난주 월요일부터 반짝 기승을 부린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명박 욕하기 판소리 대회에 나온 게 아니지 않나. 잘못되고 있는 모든 일 때문에 이명박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 모든 잘못된 일들 중 하나만 제대로 되어도 이명박을 비판하기 어려워진다. 사람들이 왜 이리 답답한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성장동력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논의다운 논의가 될 것이다. 그 이야기는 조만간 좀 더 자세하게 하고자 한다. 아무튼 요즘, 참 답답하다. 이명박 당선이 '국민이 개새끼'라서 그런 걸까? 그 이명박을 막아낼만한 '지성계'라는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토론다운 토론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