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와 안식을 이루게 하소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09-08-03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

2008년 6월 10일. 100만이 넘는 인파가 서울 시내 중심가에 모였다. 그들의 요구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결같았다. 정부는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하여 세종로 사거리의 북쪽을 틀어막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것은 이른바 '명박산성'이라고 불리웠고, 집회 현장에 나온 사람들은 분노와 허탈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명박산성을 어찌해야 하는가를 놓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견이 갈렸다. 당시에는 자신들이 그 스티로폼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지만, 사실 그때 명박산성 앞에 쌓였던 스티로폼은 이른바 '연석회의'에서 마련한 것이었다(고 나는 알고 있는데, 확인된 정보는 절대 아니다). 문제는 컨테이너 박스 앞에 스티로폼을 쌓아놓고 올라가자는 그 단순한 발상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 등을 이유로 '비폭력'을 외치며 오래도록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6월 10일은 지나갔고, 우리는 지금까지 왔다.

당시 나는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거의 매일 촛불시위 현장에 나갔다. 촛불시위에 대한 그 모든 비판은 대체로 타당하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비전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민주주의와 비폭력 같은 선한 가치들이 고삐 풀린 채 돌아다니며 독재와 폭력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놈의 '비폭력'에 대한 억압을 떨쳐버리고 진작에 명박산성 위를 점거했더라면, 어찌어찌 방법을 찾아 광화문 사거리 너머까지 진출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바더 마인호프>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각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다. 1968년 부활절 휴가 무렵, 독일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두치케는 극우 청년단체 회원의 총에 맞아 의식을 잃는다. 그에 항의하기 위해 학생들은 <빌트>를 찍어내는 독일의 미디어 재벌 슈프링어 그룹의 사옥으로 쳐들어간다. 신문 수송 차량을 습격해서 갓 나온 신문을 불태우고, 자동차를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른다.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 마인호프는 체포될 뻔하지만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경찰 덕분에 유치장 신세를 면하고 더욱 급진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조선일보 사옥 근처에 앉아서 신문 수송 차량의 진행을 방해하던 수십 명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다가 결국 그 차를 보내줬다. 우리도 독일처럼 그렇게 '선진국형 시위'를 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는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독일을 방문하던 당시의 풍경에서 출발한다. 경찰은 이란 청년들이 피켓을 뜯어 만든 각목으로 학생 시위대를 구타하는 모습을 뒷짐 지고 바라보고만 있다. 기마경찰과 전투경찰이 투입되어 오직 학생 시위대만을 두들겨 패고 진압한다. 이 오프닝을 통해 '지금 여기'는 곧장 '그때 그곳'이 되어버리고 만다. 조선일보 신문 운송 트럭에 불을 질러야 했을까? 더욱 과격한 행동만이 새로운 정국을 이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까? 문제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질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나는 철이 들기 전부터 나 자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고, 한 가지를 저지르기 전에 열 가지를 고민한다. 스스로의 행동성에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돌이켜보지 않으면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고, 그로 인해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산다.

적군파 1세대를 도와준 변호사에게 리더인 바더는 '저 할머니의 지갑을 훔쳐오라'고 지시한다. '순전히 말 뿐이군'이라는 비아냥을 덧붙이면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변호사는 미국인 관광객인 척하면서 슬쩍 지갑을 훔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킬킬거리는 '급진주의자'들은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소유권에 대해 급진적으로 저항하는 아나키스트가 결코 아니다. 비록 변호사 자신은 바로 그런 '원칙'을 떠올리며 할머니의 지갑을 훔쳤겠지만, 그 도둑질을 지시한 바더는 누군가 자신의 차를 훔쳐가자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저주를 하며 욕을 퍼붓는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혁명가였고, 단지 잘못된 시대에 잘못된 공간에 살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기본적으로 철부지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철부지들의 우발적 폭력에 이른바 '인텔리'들이 끼어들면서 적군파 운동은 지능화되고 또 심화된다. 마인호프가 가담하기 전까지 바더와 그 일당들은 조잡한 시한폭탄으로 텅 빈 백화점에 불이나 지르는 잡범들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경험이 많고 선동적인 글을 쓰는 재주를 지녔던 마인호프가 가담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테러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게 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다. 재판을 기다리며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적군파 1세대들은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한 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쏟던 변호사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적군파 2세대에게 기관단총으로 가득 찬 가방을 건넨다.

이 영화는 그 누구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고, 동시에 그 누구의 행동도 미화하지 않는다. '일관성'을 지키고자 마인호프는 자신의 두 딸을 팔레스타인의 고아원으로 보내버리려고 하고, 바더와 그의 여자친구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선택을 부추기면서 즐거워한다. 독일의 조선일보사라 할 수 있는 슈프링어 그룹에 폭탄을 설치한 바더 마인호프 일당은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직장에서 직원들을 대피시키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전혀 설득력 있는 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 작전의 책임은 내부 정치 투쟁 끝에 결국 마인호프가 전부 걸머지게 되며,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서서히 미쳐가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마인호프에게 더 감정이입을 한 채로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적군파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국 '무언가 해야 하는데...'라는 불안과 초조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잘난 칼럼을 쓰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쌍용자동차 현장에서 고립된 노동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고, 정부와 사측은 여론몰이를 통해 그들을 해고하거나 진압할 궁리에 골몰하고 있다. 철학과 대학원생 연구실에 앉아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나를 조여오지만, <바더 마인호프>는 바로 그런 죄책감에서 비롯한 '참여'가 낳는 비극적 파국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참여와 실천과 투쟁을 권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처해야 했던 상황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갈 따름이다.

이 영화의 원제가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바더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 즉 되는대로 저지르고 자신이 낳은 결과에 대해 그리 큰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으며, 다만 느끼는대로 저항할 뿐인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저항의 길로 이끄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터이다. 그 모든 동기와 불만과 폭발을 수렴할 수 있는 어휘는 오직 '컴플렉스' 뿐이다. 우리는 그 컴플렉스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유효한 말도 할 수 없다.

오늘 밤까지 재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찰은 평택 공장에 대한 진압작전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을 위해 조선일보에 처들어가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의 '컴플렉스'가 그때의 '컴플렉스'보다 더욱 거대하고 끔찍해진 것은 바로 이렇게 확인된다. 이제 우리는 '연대를 위한 폭력'이라는 개념을 상상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적군파는 제3세계를 위해 테러를 벌였다. 용산에서 경찰은 그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해 대테러부대를 투입하였다. 이 사실을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용솟음치지만, 그것은 어떤 유의미한 지점으로 향하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만다. 컴플렉스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독일어 단어 komplex는 '단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Baader-Meinhof Komplex'는 '바더 마인호프 조직'이라는 뜻에 더욱 가깝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 단어가 갖는 다른 의미에 주목하였음을 밝힌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철학'이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아무나 내키는대로 만들어서 인생사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입하는 세계관 철학. 말하자면 개똥철학. 둘째, 이미 철학사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텍스트와 그에 대한 연구. 이럴 경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를 연구하거나 특정 철학자의 텍스트에 몰입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셋째, 그 누구도 다다른 적 없는 진정한 '철학'.

유독 철학에 대해서만큼은 두 번째 층위, 즉 전문적인 연구의 성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층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에도 엉터리 과학이 있으며 과학적 연구를 통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지식이 궁극적 목표로 존재하지만, 그러한 엉터리 과학 그 자체를 자신의 신조나 인생관으로 삼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개똥과학'의 문제는 비교적 손쉽게 반박될 수 있는 편이다.

철학의 경우에는 문제가 훨씬 복잡해진다. 가령 누군가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기원전 300년부터 제기되었고 반박되고 있는 회의주의일 뿐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이라고 반박하기 시작하면 '너는 훈고학, 나는 진정한 철학, 너는 상아탑의 노예, 나는 거리의 철학자~ I say 철, you say 학~'같은 병맛나는 대응의 퍼포먼스가 즉각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같은 원시적인 명제를 들먹거리며 자신이 적당히 대충 쓰는 블로그 게시물 따위를 옹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지적'으로 다져진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일종의 인생관의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개똥철학이 가지는 이중적인 태도에 있다. 그들은 강단철학의 성과와 가치를 무시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권위에 기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몇 권의 책을 체계 없이 읽고 대강 두들겨 만든 엉성한 사고의 구조물이 인류적 가치를 지니는 텍스트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는 것을 자기 주변의 전공자들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 가령 칸트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도 정작 그 칸트의 텍스트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본 누군가가 해석상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을 제시하면 '철학이라는 것에 정답이 있는 걸까' 같은 싸구려 회의주의로 도피하는 모습을 나는 최근에 모처에서 보았다. 그런데 만약 철학적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존재할 수 없다면, '칸트는 ...하게 생각했다'는 식의 서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관 철학자들은 그런 초보적인 내적 모순 따위에 결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crank'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 수준은 대단히 미비하다. 그러나 그 사실로부터 우리가 개똥철학에서 곧장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 또한, 과학처럼 엄격한 수준은 아니어도, 역사상 앞서 나간 누군가에 대한 연구와 반박을 통해 형성되어왔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라는 어구는 철학에도 마찬가지로 통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국내의 연구 수준은 개별적인 학자의 종아리나 허벅지까지 기어오르는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우리도 거인의 어깨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등장은 독일 강단철학의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을 예로 들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대한 독해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매일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의 접점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아직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철학의 거장이다. 하이데거의 현란한 그리스어 분석과 해석은 독일어권에서 행해진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의 성과가 없다면 성립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철학'은 바로 그렇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