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23

기후 변화와 과학적 태도, 확실성의 문제

17세기 철학자들의 주된 과제 중 하나는 '지식의 토대'를 찾는 것이었다. 과학을 철학이 '정당화'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은 철학자들의 이런 저런 정당화 따위가 그다지 쓸모도 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지금은 과학적 지식이 왜 참인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 결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확실성'을 갖고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온난화 회의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대부분의 기상학자들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 변화가 촉진되고 있으며, 그 방향은 평균 기온 상승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문제는 '그게 정말 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같은 수준 낮은 질문에 대답하기가, 적어도 그 분야의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양의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는 비전문가가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것일 뿐더러, 훈련된 전문가라 해도 잘못된 해석의 함정에 빠지기 일쑤다. 아이추판다님의 블로그에 올라왔던 연어 영혼 발견 사건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내가 해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두 개 이상의 독립된 자료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일은 '이게 있고 저게 있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은 관련되어 있다'는 수준의 판단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고 한다).

같은 교훈이 기후 온난화와 관련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이 기상 정보를 정밀하게 수집하기 시작한 역사 자체가 매우 짧거니와, 지금도 새로운 방법론이 속속 개발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존의 데이터에 대한 재해석이 끝없이 가해진다. 따라서 그 분야의 정보를 꾸준히 다뤄봤거나 다른 분야의 연구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감식안을 갖추지 않은 다음에야, 대체로 '학계 주류'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실피드님의 리플에 대해 답변으로 인용한 기상학 블로그 RealClimate의 한 구절 또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Scientifically, this argument holds no water: it is simply not possible to draw conclusions about the causes of climate variations by just looking at one time series. Only considering the time series of Arctic temperature, it is impossible to tell what the cause of the 1930s warming was, what the cause of the recent warming is, and whether both have the same cause or not. Milloy’s specious argument is a characteristic example for a method frequently employed by “climate skeptics”: from a host of scientific data, they cherry-pick one result out of context and present unwarranted conclusions, knowing that a lay audience will not easily recognise their fallacy.
(강조는 모두 인용자)

http://www.realclimate.org/index.php/archives/2004/12/the-arctic-climate-impact-assessment/


가령 많은 온난화 회의론자들이 '자연스러운 기후 변화의 주기'의 사례로 인용하는 태양 흑점 변화의 경우, 그것이 '이유'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라는 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태양 흑점의 변화 주기 그래프 등을 제시한 후, 그 밑에 평균 기온 그래프를 가져다 놓고, '자 어때요, 놀랍죠? 온난화는 자연의 섭리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인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정보가 옳다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실피드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나 스스로 자료를 해석하려 들지 않고, 다수의 견해라고 인정되는 것을 따른다'고 나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반면 실피드님은 스스로 논문을 검색하고 자료를 찾은 후 기후 변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편이다. 각자의 방식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나는 내 방식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영역의 자료를 해석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렇다.

실피드님은 "북극의 얼음 면적 변화 추세" 라는 글에서 본인이 확보한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북극 위성 사진 및 분석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난 10년 간의 [면적] 자료는 추이라고 할만한 일관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후, 지난 40년간 측정한 얼음의 두께에 대해 언급하고, "내 생각에도 북극의 얼음은 백 년 이상이 걸려 제법 많이 녹아 없어지거나, 유럽까지 덮을 정도로 커지거나 하는 것 같긴 하다. 요점은, 이 마저도 고기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기적'일 거라는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실피드님은 인공위성 자료에 대한 크나큰 신뢰를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이전의 북극 현황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거나 찾더라도 신뢰할만하지 않으므로 장기적인 추세를 계산할만한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적어도 링크된 포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그러하다.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시리즈로 내고 있는 문고본 입문서 A Very Short Introduction중 하나인 Global Warming의 저자 Mark Maslin에 따르면, 그러나, 인공위성 자료가 지금까지 확보된 것들보다 정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4. Satelite data casts doubt on the models.

Again, before the satellite data was clearly understood it did suggest that [65p] over the last 20 years there had been a slight cooling. The interative process of science, i.e. the re-examination of data and the assumption concerning the data, clearly showed that there were some major inconsistencies within the satellite data; first, as a result of trying to compare the data from different instruments on different satellites and, second, because of the need to adjust the altitude of the satellite as its orbit shrinks as a result of friction with the atmosphere. The final problem withe the satellite data is that 20 years is just too short a time period to find a temperature trend with any confidence. This is because climatic circles or events will have a major influence on the record and will not be averaged out; for example, the sunspot cycle is 11 years, El Niño-Southern Oscillation is 3-7 years, and the North Atlantic Oscillation is ten years. So which of these cycles is picked up by the 20-year satellite data will strongly influence the direction of the temperature trend. [65-66p.] (강조는 인용자)


아무튼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난 20여년간 얻을 수 없었던 값진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 자료들을 통해 기후 변화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태양 흑점으로 인해 기온이 내려가는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관측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자연적인 요소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요소를 종합하면, 지난 130여년간 평균 기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왔으며 그것은 모델을 통해 예측한 결과와 일치한다.

3. Solar output and sunspot activity control the past temperatures.

This is something both the sceptics and non-sceptics agree on. Of course sunspots and also volcanic activity influence past temperatures. For example, the cooling of the 1960s and 1970s is clearly linked to changes in the sunspot cycl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camps is that the sceptics put more weight on the importance of these natural variations. Though great care has been taken to understand how the minor variations in solar output affect global climate, this is still one of the areas which contain many unknowns and uncertainties. However, climate models combining our current state-of-the-art knowledge concerning all radiative forcing, including grennhouse gases (see Table 1 on pages 16, and 17) and sounspots, are able to simulate the global temperature curve for the last 130 years. Figure 19 shows the separate natural and anthropogenic forcing on global climate for the last 130 years and the combiantion of the two. This provides confidence in both models and also an understanding of the relative influence of natural versus anthropogenic forcing. [62p.] (강조는 인용자)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에서 언급한 도표를 첨부한다. 이것을 보면 자연적 요소와 인위적 요소를 결합하여 만든 모델이 지난 130여년간의 평균 기온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과, 현재의 평균 기온이 지난 130년 중 그 어느때보다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분야에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평범한 입문서'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 . Global warming is caused by the massive increase of greenhouse gases, such as carbon dioxide, in the atmosphere, resulting from the burning of fossil fuels and deforestation. There is clear evidence that we have already elevated concentrations of atmospheric carbon dioxide to their highest level for the last half million years and maybe even longer. Sceintiests believe that this is causing the Earth to warm faster than any other times during, at the very least, the past one thousand years. [1p.]


여기서 다시 지식의 확실성 문제로 돌아가보자. 만약 누군가가 '저 과학자들 다 돈 타먹으려고 그러는 거다. IPCC는 악의 소굴이다. 넌 왜 직접 자료를 찾아볼 생각도 않고 넙죽넙죽 믿기만 하냐'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그가 바라는 수준의 '확실성'을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지식, 혹은 지식 일반에 대한 토대론이 무너진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의 지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자승자박에 빠지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대중적 차원에서 접할 수 있는 온난화 회의주의에 대한 책 중에는, 내가 인용한 것과 같은 '포괄적인 개론서'가 없다. 다만 특정한 자료의 해석을 놓고 기존의 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주안점이 맞춰져 있을 따름이다. 이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온난화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그들은 학계의 소수자 혹은 이단아일 뿐 주류적인 견해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나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온난화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시간적 단위는 150년이다. 2009년은 인류가 땅에서 석유를 채굴하여 쓰기 시작한지 딱 150년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석유가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면서부터, (이것은 『인간 없는 세상』의 엘런 와이즈먼이 쓴 표현인데) 지구는 쉴 새 없이 화산이 폭발하고 있는 행성이 되어버렸다.

내가 인용한 책에서 130년간의 데이터를 논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현재의 인공위성 데이터처럼 심층적이거나 정밀하지는 않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그런 경우에도 모델을 만들어서 현실을 예측하고 자료를 해석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지난 130년간 가장 뜨거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대체로) 통합된 견해를 신뢰하는 편이, 나 스스로 자료를 찾고 결론을 내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북극 빙하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실피드님의 리플에 내가 달아놓은 반박에 이미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1900년과 비교했을 때 현재 남아 있는 [북극해] 빙하의 양은 예전의 77퍼센트이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지난 30년간 여름에 팽창했던 빙하의 부피가 무려 20퍼센트 감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측정한 인공위성 기록을 살펴보면 2005년 9월 북극의 빙하 부피는 최저치(550만 제곱미터)를 가리켰다. 이 데이터는 현재 진행되는 빙하의 감소가 20세기에 와서 발생한 유일한 현상임을 조언하고 있다.(110쪽, 강조는 인용자)

『기후 변화를 이해하는 짧지만 충분한 보고서』, 슈테판 람슈토르프, 한스 요하임 셸른후버 지음. 오재호 옮김, 도솔.


그러나 실피드님은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위성 사진 자료(지난 '10년간'의 위성 사진 자료)를 찾아낸 후, 그것으로부터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지 못하고(자료가 부족하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 결과 '북극해의 변화에 대해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그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한 표를 훈련된 다수의 연구자들의 일관된 견해에 던질 수밖에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 또한 전혀 기후 변화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내가 제시한 '사실'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해도 내게서 답변을 듣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저 또 다른 전문가들의 '보편적' 견해를 들이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결코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 채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 수준의 확실성을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지는 이제 철학의 문제가 되어버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이다.

2009-09-18

김어준 총수, 파티는 끝났다

딴지일보에 기사로 실을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해 보았다가 거절당한 글입니다.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짧은 호흡으로 거칠게 썼는데, 거절당해서 안타깝군요. 이런 글도 올라갈 수 있어야 딴지일보가 새로운 활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급적이면 링크된 김어준 총수의 글을 먼저 읽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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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사건에 대한 길고 긴 변명일 뿐인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김어준 총수가 최근 한겨레 ESC에 쓴 "박재범은, 돌아온다" 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박재범은 돌아올 수도 있다. 비록 그가 가지고 있던 '짐승돌'로서의 상품성은 이미 반토막이 난 다음이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오묘한 속성이 그의 귀환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총수는, 못 돌아올 것 같다.

문제는 2002년 월드컵이었다. 당시 그가 쓴 기사들을 살펴보면, 애국심이 발현되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총수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나보다. 여기서 관건은 애국심 자체에 대한 칭찬과 비난이 아니다.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적 열기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느냐이다.

비유를 들어보자. 남자라면 누구나 발기한다. 따라서 발기하는 것, 성욕을 느끼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짓이 못 된다. 하지만 아무데서나 발기하고, 자기가 흥분했다는 이유로 아무나 붙잡고 성폭행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자를 처벌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성추행범들이 자연스러운 욕구가 어쩌고 저쩌고 운운한다. 모든 남자들이 그 '자연스러운'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강간범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그런 행위가 허용될 수는 없다.

국가주의도 그렇다. 축구는 일종의 형식화된 전쟁과도 같다. 축구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특히 축구는 국가주의적인 열기와 쉽사리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월드컵이라면, 축구장에서 국기를 흔들면서 응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의된 섹스와도 같다. 혹은 엄격한 규칙을 세워놓고 벌이는 정교한 SM플레이와도 같은 것이다. 오직 '그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국가주의적 열기. 문제는 김어준 총수가 이 열기에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발기했다고 그걸 꺼내들고 만지작거려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적 자존심' 따위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걸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애국 완장질',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되는 건가? 총수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두 번째[박재범에게 '암컷'들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하던 한국의 '수컷'들]가 세 번째['순수하게' 국가적인 관점에서 박재범을 비판한 사람들]의 언어를 구사하며 첫 번째처럼 행동하면서다. 나를 주눅 들게 만들던 알파 수컷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애국의 완장까지 채워진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자 그 완장을 애국주의의 집단발호로 해석하고 만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가 등장한다. 그것은 파시즘이다! 이에 첫 번째['우리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한다'고 반발한 '소비자'들]가 먼저 반발한다. 아니 소비자로서 내가 내 맘대로 섭섭해하지도 못한다는 건가. 어디서 훈장질이야. 이 반발은 대체로 합당하다. 첫 번째는 그런 구호를 외친 적 없었으므로. 두 번째는 실제 애국엔 관심이 없었으므로. 하여 그 질타는 세 번째에게나 적합한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세 번째는 워낙 소수라 그 판에 거의 참여도 않았으므로.

"박재범은, 돌아온다"(김어준, 『한겨레』, 「매거진 esc」, 2009년 9월 17일)


이 시점에서 예의 '먹물' 비난이 등장한다. 먹물들은 그냥 완장만 차고 있는 애들한테도 '국가주의자'라고 비난하니까 잘못되었다는 거다. 이건 아무리 봐도 웃기는 소리다. 나치 완장을 차고 나치 뺏지를 달고 다니면서 유대인을 구타하면 그게 나치인 거지, 가슴 속 깊은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아리안 민족에 대한 사랑과 총통에 대한 충성이 있어야만 나치인 건가?

이런 논리대로라면 '생계형 친일파'들은 친일파도 아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입사시험 볼려고 창씨개명하고 동양척식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서류 정리 좀 했을 뿐인데. 천황에 대한 가슴 속 깊은 충성심 따위 전혀 없었는데. 안 그래?

더군다나 '우리 나라에서 돈 벌어먹으면서 우리 나라 욕한다'고 불쾌해하는 게 국가주의가 아니라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거의 박살이 난 상태다.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진 그 지역주의 말고, 자기가 사는 동네를 가꾸고 지켜나가고, 자신이 '한국인'이기 이전에 '이 동네 사람'이라고 느끼며 자부심을 갖는 그런 지역주의 말이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물어보라. '너 이탈리아 사람이야?'라고 물어보면 '아니, 난 나폴리'라고 대답한다. 이런 지역주의가 과연 한국에 존재하는가? 설령 영남 호남 싸움에 목숨을 거는 누군가라 할지라도, '당신은 한국인입니까, 아니면 경상도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한국인이라고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 질문에서 자기 고향을 먼저 대는 이들은 극히 일부의 부산 출신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외국의 진짜 지역주의, 나라고 뭐고 다 필요없고 내가 사는 이 동네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지역주의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김어준이 전제하고 있는 그런 민족주의는, 한국에 없다.

김어준은 앙증맞게도 한국에 있지도 않은 '지역주의'가 바로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지역'이라는 게 바로 '대한민국'이고, 그래서 그 지역주의는 국가주의와 다를 바 없다. 단지 적극적인 공격심을 드러내는 대신 그냥 흥핏쳇 하면서 툴툴거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뿐이지, 그것도 국가주의라는 말이다. 왜냐,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공동의 정체성이 바로 '대한민국'이니까.

다양한 회피 기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놓고 보건 국가주의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국가주의를 국가주의라고 비판하면, 예의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같은 비난이 돌아온다. 마치 제 다리를 잘라먹는 문어처럼, 어차피 같은 먹물을 뿜고 사는 주제에 누구는 관습적 훈시를 내뱉는 먹물이고 누구는 아니라는 이 발상, 이게 진짜 문제다.

앞서 말했지만 어떤 형식을 띄고 있건, '너네 나라로 꺼져'라는 함성은 결국 국가주의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하게 소비될 수 있는 지점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아직도 김어준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2002년 월드컵 같은 특정한 때와 장소가 그 예에 속한다. 일상의 영역, 혹은 음악 듣고 아이돌 팬질하면서 꺅꺅거리는 그 순간은 국가주의와 무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대체 4년 전에 마이스페이스에 투덜거린 게 뭐가 대수인데?

스포츠의 현장이 아니면 국가주의적 함성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아닌 자들, 그저 박재범을 씹기 위해 대한민국을 거들먹거리는 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일종의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국가주의적 함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일종의 스포츠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악플을 달고, '그 새끼가 우리 나라 욕한 증거'를 퍼다 나르고, 오역이네 아니네 운운하면서 흥분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놀이'이다. 인간 사냥도 놀이에 속할 테니 말이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수렵을 했다. 무언가를 추적하고, 몰아붙이고, 숨통을 끊어놓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짜릿한 쾌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람'이 되는 게 정당한가? 우리는 네티즌들의 인간 사냥을 비판하지도 말아야 하는가?

'먹물'을 비난하기에 바쁜 총수에게 묻고 싶다. 이 상황에서 그럼, 당신은 이 인간 사냥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그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며 홍위병처럼 자아비판을 시켜야 속이 시원하겠노라고 외치는 저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완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너희들이 대한민국 어쩌고 운운하는데, 대한민국 어쩌고 하면서 어린 가수의 사소한 잘못을 놓고 쫓아내는 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국가주의'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체 왜 대중들이 '먹물'을 싫어할까? '국가주의'같은, '파시즘' 같은 단어들을 계속 사용해서? 그런 "지적 태만"에 분노해서? 본질은 그보다 훨씬 간단하고 유치하다.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다. 국가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아무리 떠들어도, 비판만 하지 않는다면 무사통과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해도 흥분한 대중들의 흐름을 거스르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이건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사람들에게 스스로 생각해야만 할 숙제를 안겨주느냐, 아니면 '너희들은 머리 쓰지 마, 내가 한큐에 정리해주마'라고 나서서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우겨넣은 다음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박재범에게 소비자로서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데 국가주의라고 비난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먹물이 개새끼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똥꼬 깊숙히' 똥침을 찌르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똥구멍을 핥아주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은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대체 왜 당신은 배신감을 느끼는가? 그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감정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총수는 그저 속편하게 예의 '암컷'과 '수컷'의 문제로 도피한다. 그런데 그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박재범에 대한 인터넷의 대중적 분노는 오히려 '미국인'에 대한 열폭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인에게 열폭하는 데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총수는 '건강보험료 한 달치 내고 비싼 치료 받는 재미교포들의 염치 없음'을 비난하는 여성 네티즌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나보다. 수컷으로서의 불안감?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핀트가 안 맞는단 말이다.

총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지금은 2009년이다. 월드컵 끝난지 7년 됐다. 파아티는 끝났다.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대~ 한민국~' 외치고 다녀도 되는 시기는 이제 끝났단 말이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간판 아래에서 벌어지는 비극들을 직시해야 하고,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는 얼간이들이 더 큰 해악을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국가주의' 비판이 단지 "강박적인 호들갑"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김어준 총수 본인의 "지적 태만"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달력부터 보자는 말이다. 파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2009-09-17

힐러리 퍼트남과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

몇 살 때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기억하는 한, 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없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해 반대해왔다. 이것은 사실 철학적 회의주의의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무언가가 옳은지 그른지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동시에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척도로부터 벗어난 초월적 진리가 있다면,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어찌 알겠는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을까? 많은 철학자들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 철학자 콰인은 인식론 전체를 자연화하겠다는 기획을 내놓으며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선험적인 지식, 선험적인 인식, 선험적인 그 무언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파악해낼 따름이다. 따라서 인식론은 인지과학의 발전에 기대야 마땅하고, 인식론 자체가 '자연과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1969년작 "Epistemology Naturalized"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철학자들이 반발했는데, 오늘은 그 중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이 내놓은 희한한 논증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퍼트남은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라는 독특한 논문을 통해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반대했다가, 출간 전에 덧붙인 노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뒤집었다가,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래도 이런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묘한 논의를 전개했다.

최초의 논증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그는 모순률을 이렇게 저렇게 잘 다듬어 그가 '모순의 최소 법칙'(Minimal Principle of Contradi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모든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not every statement is both true and false)"는 것이 그 내용이다.

헤겔식의 단순한 모순률 대신 이렇게 복잡하게 최소화된 요건을 적용해야 하는 이유는 빌어먹을 양자역학 때문이다.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죽은 것이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빛은 파동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 될 수 있다. 퍼트남은 논리적 트릭을 통해 이 함정을 피한다. 양자역학적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 대한 명제들, 뭐 그 외에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는 명제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적어도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험적 대상과 맞닥뜨리더라도, 다시 말해 선험적으로 참이다.

여기까지 초고를 써놓고 좋아하던 퍼트남은,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논문에 써 있는 바에 따르면) 수학적 직관주의(mathematical intuitionism)가 있기 때문에 '모순의 최소 법칙'이 절대적으로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그 경우에도 "그 어떤 명제도 증명되면서 동시에 증명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새로운 '모순의 최소 법칙'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최초에 제시된 '모순의 최소 법칙(1)'이 모든 경우에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라는 것은 이제 틀린 말이 되어버렸다.

그 노트에 대한 새로운 노트에서 퍼트남은 자신이 순순히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변명을 늘어놓는다. 콰인주의에는 온건한 입장도 있는데, 대체로 추종자들이 본래의 사상가보다 더 목소리를 드높이는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콰인주의자들 중에서는 콰인이 제일 과격하다. 콰인은 그 어떤 명제도 선험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선험적으로 어떤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런 과격한 콰인의 입장에 대해서라면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참'과 '거짓'이라는 개념들의 사용과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인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경험적 차원으로 치환될 수 없는 명제를 하나 만들 수 있다. "고전적인 참과 거짓 개념이 포기될 필요가 없다면, 모든 명제들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지는 않다."

퍼트남은 이 지점부터 슬그머니 논쟁에서 이탈한다. 자신의 논증은 콰인이 논박하고자 한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이성 규칙의 이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어떤 명제가 절대적으로 선험적이라는 주장이나, 그 어떤 명제도 절대적으로 선험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나, 모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시했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실컷 잘 싸우다가 이게 무슨 소리냐 싶지만, 이 논문 자체가 초고에 스스로 반박을 하고 또 반박을 해서 나온 것이니만큼 이 이상의 논의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론의 자연화에 맞서는 하나의 논증 방식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그 스스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퍼트남의 논증 방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내놓은 논증과 구조적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안타깝게도 학교 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코플스턴 철학사에 등장하는 내용을 통해 그 논증을 짐작해보는 수준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그[아우구스티누 스]는 또, 회의주의자일지라도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 예컨대 상반하는 두 개의 명제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허위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여럿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만약 여럿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세계의 수가 유한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무한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세계에는 시작도 끝도 없든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든가, 시작은 없으나 끝은 있든가, 시작도 있고 끝도 있든가 그 중 어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언제나 모순률을 확신하고 있다.


퍼트남이 두 번의 퇴행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어떤 층위에서건 모순률을 발견해낼 수 있고, 그 모순률의 존재만큼은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과 '거짓'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증명된다'와 '증명되지 않는다'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내가 아는 바가 없으므로 일단 여기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참고문헌

Willard Van Orman Quine, “Epistemology Naturalized,” in 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9), 69-90., Reprinted in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ey-Blackwell, 2008), pp.528-537

Hilary Putnam,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 Erkenntnis 13 (1978): 153-170. Reprinted in ed.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ley-Blackwell, 2008)

82p. 프레드릭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trans. 박영도, 코플스톤 서양철학사 2권 (서울: 서광사, 1988)

2009-09-04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

최장집 학파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갈등은 정치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다. 특히 그 갈등의 크기가 중요하다. 일전에 sonnet님과의 논쟁에서도 잠시 언급된 바 있듯이, 하나의 정치적 투쟁 속에서 약자는 대체로 갈등의 범위를 넓히려고 하고, 강자는 그 범위를 좁히려고 한다.

그 갈등의 범위를 단지 '숫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츠슈나이더가 보기에 기득권층은 갈등을 사사화(私事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약자들은 문제를 사회화(社會化)함으로써 갈등 내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한다. 샤츠슈나이더는 우리가 흔히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기동들을 한데 묶어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매우 중요한 문단이므로 길게 인용해보자.

정치에 관한 문헌들을 훑어보면, 정말이지 갈등의 사사화와 갈등의 사회화를 지향하는 상반된 경향들 간의 오랜 투쟁을 목격할 수 있다. 한편으로, 갈등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공적 영역에서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이념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주의, 기업 활동의 자유, 지방주의, 사생활 보호, 재정 지출의 축소와 관련된 이념들의 긴 목록은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 혹은 공적 권위를 사용해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를 막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당수의 갈등은 사적인 영역 내에 묶어 두는 방식으로 통제되었고, 그래서 갈등이 가시화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치를 다룬 문헌에서 이런 전략에 대한 언급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적 설명도 이런 이념들과 갈등의 범위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 적이 없다. 갈등의 사사화는 이와는 다른 근거에서 정당화되었다.[48-49쪽](굵은 글씨는 원저자, 밑줄은 인용자 강조)
E.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반면 우리가 '진보적'이라고 알고 있는 정치적 주제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뒤이어지는 문단을 살펴보자.

다른 한편, 갈등의 사회화에 기여하는 일련의 이념들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이념들뿐만 아니라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들 이념은 갈등을 전염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외부자들을 갈등에 참여시킴으로써 그 이전까지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적 권위에 호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49쪽](밑줄은 인용자)


이슈가 터질 때마다 우르르 달려드는 이른바 '팩트 골룸'들에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로 설명된다. 팩트 골룸들은 당장 '구경꾼'의 숫자를 늘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엄연히 '사회적'으로 소화되어야 할 이슈를 '사사화'하는 것이다.

가령 쌍용자동차 공장 농성자들이 며칠 더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과 음용수를 비축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팩트'를 좋아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이슈에 반응하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알고 보면 먹을 거 많았대요~!' '노조 지도부는 먹을 것을 안 나눠주고 있었대요~!' 이런 떡밥에 반응하는 '구경꾼'들은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쇄말한 팩트의 차원으로 끌어내려버리기 때문이다. 샤츠슈나이더는 그런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먹고사니즘'은 갈등을 사회화하는데 기여할까, 아니면 사사화하는데 기여할까? (나는 그것을 '매 사안마다 '먹고 산다'는 말로 지칭되는 막연한 생계 혹은 소득의 문제를 들먹이는 담론 구조'로 이해하고 있지만) 아직 '먹고사니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 사안에 한정지어서 물어보자. 진중권의 중앙대 해임 사건을 놓고 '그래도 먹고 살만 하대요...'라고 말하는 것은 진중권과 중앙대의 갈등, 혹은 진중권과 정부의 갈등이 사회화되는데 과연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될까?

다들 짐작하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를 사회화하고 싶다면, 샤츠슈나이더의 말마따나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을 언급해야 한다. 설령 진중권이 겸임교수 및 시간강사 자리에서 모두 잘려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해도, 이 이슈를 사회화함으로써 '해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면 '진중권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같은 식으로 가닥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중앙대는 '대학(=기업) 활동의 자유'를 근거로 들어 그를 해임했을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갈등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중권 본인이 겸임교수로 버는 돈이 얼마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어차피 먹고 사는 문제에 지장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 오히려 진중권의 그 발언을 통해 이 사건을 '경제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게 된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순수하게 '부당한 해임', '정치적 외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침 진중권의 당당한 수입 공개를 통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 인터넷 논자들은 도리어 그 발언을 토대로 이 사건을 사사로운 일로 언급하기에 급급했다.

이명박을 싫어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해석' 대신 '진중권은 먹고사는 일에 문제 없다 오바' 같은 소리가 난무한 이유 또한 역시 '사사화'에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저는 진중권에 대한 정보를 당신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에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사마 끄떡 없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이 이 갈등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당위와 충돌하였는데, 적지 않은 인터넷의 논자들은 그 욕망에 굴복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덕분에 진중권이라는 거물이 정말 시덥잖은 일을 당하는 지경에 몰렸지만 아무도 그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 좆같은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정작 총대를 매고 나선 것은 그의 수업을 듣던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비겁하다고 나약하다고 손가락질이나 당하던 20대가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중앙대는 문자메시지로 학생들에게 징계 사실을 통보했다. 학부생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엄연한 대학의 일원이다. '돈줄'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고 '애새끼들'도 아니란 말이다. 이 문제 역시 일종의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습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여기서 혹자는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더라' 같은 소리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떤 별로 재미 없는 농담이 떠오른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그를 보고 의사가 물었다. "Oh, my god. It's serious. How are you?" 그러자 한국인은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I'm fine. Thank you. And you?"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진중권이 다른 누구처럼 아이고 데이고 나 죽네 생계가 어려워서 미치겠지만 웃음으로 참아야겠네 동네 사람들 나 좀 보소~ 이러고 있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모든 갈등이 사사화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그 결과 가장 오버스럽게 고통을 호소하고 난리를 쳐야만 슬쩍 관심을 보이는 식으로 길들여져 있다. 그럼 '유쾌한 미학자 CJK'가 블로그에서 오열하고 삭발식이라도 하리? 본인이 괜찮다고 하면 그냥 괜찮은 거야? 당신들 바보인가?

밖에서 큰아들이 맞고 돌아왔다. 그 큰아들은 속내가 깊어서 웃는 얼굴로 '괜찮아요. 병신같은 애들이 병신짓 하는 건데요 뭐. 삥도 별로 안 뜯겼어요'라고 말했다. 세상에 그 어떤 미친 부모가 '아, 우리 애가 정말 생각보다 괜찮나 보다. 과자 사먹을 돈 아직 남았다니까 다행이다'라고 생각할까? 더군다나 그 큰아들을 때린 깡패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닐 것이 불보듯 훤한 시점에, '우리 애는 문제 없어요. 자기가 괜찮다는데 뭐'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먹고사니즘'이 정말 무섭긴 무서운가보다. 사람들이 뭐에 홀린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진중권은 먹고살만하다고 한다'는 말을 옮기고 있고,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같은 단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잠시 염두에 두었더라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하등의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우석훈의 주도 하에 두 번째 서명판이 돌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먹고사니즘'은 이 갈등을 진중권의 '밥줄'에 대한 것으로 전락시켜버렸다.

그 결과 가장 피해를 보게 된 것은 결국, 20대들이다. 진중권을 위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가 징계를 당한 그 학생들 말이다. 참을 수 없이 부조리한 상황이다. 사태를 파악해보기 위해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실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용기를 낸 의로운 학생들이 결국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의 희생자로 전락하게 될 위험에 놓인 것이다.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는 진중권과 달리, 나는 이 일에 정말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