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31

2009년 독서 목록

  1. 20090105 - 움베르토 에코, 김운찬 옮김,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1)
  2. 20090110 - 강영안,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서울: 소나무, 2000)
  3. 20090114 - 앙드레 고르, 임희근, 정혜용 옮김, 『에콜로지카』(서울: 생각의나무, 2008)
  4. 20090114 - 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서울: 한마당, 1999)
  5. 20090120 - 존 에이거, 이정 옮김, 『수학 천재 튜링과 컴퓨터 혁명』(서울: 몸과마음, 2003)
  6. 20090122 - 게르트 기거랜처, 안의정 옮김, 『생각이 직관에 묻다』(서울: 추수밭, 2008)
  7. 20090127 - 페터 제발트, 이희숙 옮김, 최현식 감수,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서울: 보누스, 2008)
  8. 20090203 - 한국18세기학회, 『위대한 백년 18세기 - 동서 문화 비교 살롱토크』(서울: 태학사, 2007)
  9. 20090204 - 요하임 슐테, 김현정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10. 20090205 -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11. 20090207 - 에드워드 사이드, 김정하 옮김, 『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서울: 마티, 2008)
  12. 20090326 -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윤미경 옮김, 『혁명을 팝니다』(서울: 마티, 2006)
  13. 20090327 - 데를레프 포이케르트, 김학이 옮김, 『나치 시대의 일상사』(서울: 개마고원, 2003)
  14. 20090328 - 리처드 예이츠, 유정화 옮김, 『레볼루셔너리 로드』(서울: 노블마인, 2009)
  15. 20090329 - 오트프리트 회페, 박종대 옮김, 『정의-인류의 가장 소중한 유산』(서울: 이제이북스, 2004)
  16. 20090330 - 이영록, 『우리 헌법의 역사』(서울: 서해문집, 2006)
  17. 20090330 - 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서울: 민음사, 1998)
  18. 20090402 - 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얻은 성찰』(경기도 파주: 길, 2005)
  19. 20090403 - 강영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서울: 소나무, 2002)
  20. 20090407 - 박해천, 『인터페이스 연대기』(서울: 디자인플럭스, 2009)
  21. 20090411 - 노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1999)
  22. 20090416 - 얀 크노프, 이원양 옮김, 『베르톨트 브레히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23. 20090416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1』(서울: 아카넷, 2006)
  24. 20090418 - 고종석, 『경계긋기의 어려움』(서울: 개마고원, 2009)
  25. 20090421 - 고바야시 다키지, 양희진 옮김, 『게공선』(서울: 문파랑, 2008)
  26. 20090421 - 베르톨트 브레히트, 임한순 옮김, 『브레히트 희곡선집 1 - 서푼짜리 오페라 외』(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27. 20090424 - 토르스타인 베블런, 김성균 옮김, 『유한계급론』(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05)
  28. 20090428 - 아마미야 카린, 송태욱 옮김, 『성난 서울』(서울: 꾸리에, 2009)
  29. 20090428 - 마스모토 하지메,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서울: 이루, 2009)
  30. 20090503 - 게리 윌스, 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6)
  31. 20090505 - 게리 윌스, 김창락 옮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32. 20090509 - 마루야마 마사오 외, 고재석 옮김,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서울: 소화, 1997)
  33. 20090510 - 이매뉴얼 더만, 권루시안 옮김, 『퀀트, 물리와 금융에 관한 회고』(서울: 승산, 2007)
  34. 20090517 - 도글라스 호프스태터, 데니얼 데닛, 김동광 옮김,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서울: 사이언스북스, 2001)
  35. 20090521 - 게리 윌스, 안인희 옮김, 『성 아우구스티누스』(서울: 푸른숲, 2005)
  36. 20090524 - 김욱, 『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서울: 개마고원, 2009)
  37. 20090525 - 플라톤, 강철중, 김우일, 이정호 옮김, 『편지들』(서울: 이제이북스, 2009)
  38. 20090605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2』(서울: 아카넷, 2006)
  39. 20090612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서울: 아카넷, 2005)
  40. 20090615 - 조지프 히스, 노시내 옮김,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서울: 마티, 2009)
  41. 20090620 - 강준만, 『대한민국 소통법』(서울: 개마고원, 2009)
  42. 20090717 -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경기도 파주: 창비, 2009)
  43. 20090721 - 데이비드 퍼피뉴, 신상규 옮김, 『의식』(서울: 김영사, 2007)
  44. 20090721 - 리누스 토발즈, 팀 오라일리 외, 이만용 외 옮김, 『오픈 소스』(서울: 한빛미디어, 2000)
  45. 20090721 - 죠지 레이코프, 로크리지연구소, 나익주 옮김, 『프레임 전쟁 -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경기도 파주: 창비, 2007)
  46. 20090806 - 나오미 울프, 김민웅 옮김, 『미국의 종말』(서울: 프레시안북, 2008)
  47. 20090806 - 김국현, 『웹 이후의 세계』(서울: 성안당, 2009)
  48. 20090812 - 딜런 에번스, 이충호 옮김, 『진화심리학』(서울: 김영사, 2001)
  49. 20090828 - 앨런 와이즈먼, 이한증 옮김, 『인간 없는 세상』(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50. 20090831 - 슈테판 람슈토르프, 한스 요하임 셸른후버, 한윤진 옮김, 오재호 감수, 『미친 기후를 이해하는 짧지만 충분한 보고서』(서울: 도솔, 2007)
  51. 20090901 - 제임스 듀이 왓슨, 김명남 옮김,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서울: 이레, 2009)
  52. 20090902 - 딜런 에반스, 안소연 옮김, 『진화론』(서울: 김영사, 2007)
  53. 20090906 - A. L. 바라바시, 강병남 김기훈 옮김,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서울: 동아시아, 2002)
  54. 20090908 - E. 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55. 20090911 - F. 코플스톤, 김보현 옮김, 『그리스 로마 철학사』(서울: 철학과현실사, 1998)
  56. 20090921 - F. 코플스톤, 박영도 옮김, 『중세철학사』(서울: 서광사, 1998)
  57. 20090922 - M.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58. 20090925 - 레이첼 카슨, 김은령 옮김, 『침묵의 봄』(서울: 에코리브르, 2002)
  59. 20090928 - 루트 모단, 김정태 옮김, 『엑시트 운즈』(서울: 휴머니스트, 2009)
  60. 20090929 - F. 코플스톤, 김성호 옮김, 『합리론』(서울: 서광사, 1998)
  61. 20091003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상)』(서울: 아르테, 2008)
  62. 20091004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하)』(서울: 아르테, 2008)
  63. 20091006 - 질 들뢰즈, 박찬국 옮김, 『들뢰즈의 니체』(서울: 철학과현실사, 2007)
  64. 20091006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상)』(서울: 아르테, 2008)
  65. 20091007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하)』(서울: 아르테, 2008)
  66. 20091008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 세대 새판짜기』(서울: 레디앙, 2009)
  67. 20091009 - 피터 싱어, 함규진 옮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서울: 산책자, 2009)
  68. 20091010 - 제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 『문명의 붕괴』(서울: 김영사, 2005)
  69. 20091014 - 존 히든, 이두 글방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이두, 2001)
  70. 20091015 - 피터 퓨, 정회석 옮김, 『케인즈』(서울: 이두, 1999)
  71. 20091015 - 우석훈, 『생태요괴전』(서울: 개마고원, 2009)
  72. 20091015 - 우석훈, 『생태페다고지』(서울: 개마고원, 2009)
  73. 20091015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영구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서울: 서광사, 2008)
  74. 20091016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칸트의 역사철학』(서울: 서광사, 1992)
  75. 20091018 - 임철규, 『귀환』(경기도 파주: 한길사, 2009)
  76. 20091019 -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김경희 옮김, 『군주론』(서울: 까치글방, 2008)
  77. 20091022 - 가와노 히로시, 진중권 편역, 『컴퓨터 예술의 탄생』(서울: 휴머니스트, 2008)
  78. 20091027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1)』(서울: 나남, 2008)
  79. 20091028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2)』(서울: 나남, 2008)
  80. 20091029 - 조지 레이코프, 나익주 옮김, 『자유 전쟁 - '자유' 개념을 두고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서울: 프레시안북, 2009)
  81.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서울: 시공사, 2009)
  82.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2)』(서울: 시공사, 2009)
  83. 20091101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3)』(서울: 시공사, 2009)
  84.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4)』(서울: 시공사, 2009)
  85.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5)』(서울: 시공사, 2009)
  86.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6)』(서울: 시공사, 2009)
  87. 20091103 - 위르겐 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서울: 나남출판, 2004)
  88.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7)』(서울: 시공사, 2009)
  89.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8)』(서울: 시공사, 2009)
  90.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9)』(서울: 시공사, 2009)
  91.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0)』(서울: 시공사, 2009)
  92. 20091108 - 에드문드 후설, 이종훈 옮김,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서울: 지만지, 2008)
  93. 20091110 - 진중권 엮음, 『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서울: 휴머니스트, 2009)
  94. 20091117 - 노르베리트 힌스케, 이엽, 김수배 옮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서울: 이학사, 2004)
  95. 20091119 - 무함마드 유누스, 김태훈 옮김, 『가난 없는 세상을 위하여』(서울: 물푸레, 2008)
  96. 20091123 - 제프리 영, 윌리엄 사이먼, 임재서 옮김, 『iCon: 스티브 잡스』(서울: 민음사, 2005)
  97. 20091123 - 김기창, 『한국 웹의 불편한 진실』(서울: 디지털미디어리서치, 2009)
  98. 20091125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부시는 전쟁중』(서울: 따뜻한손, 2003)
  99. 20091201 - 아우구스트 몬테로소, 김창민 옮김, 『검은 양과 또 다른 우화들』(서울: 지만지, 2008)
  100. 20091204 - 김태권, 우석훈 해제, 『어린왕자의 귀환』(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9)
  101. 20091206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공격 시나리오』(서울: 따뜻한손, 2004)
  102. 20091208 - 조지 몬비오, 정주연 옮김, 『CO2와의 위험한 동거』(서울: 홍익출판사, 2008)
  103. 20091212 - 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서울: 휴머니트스, 2009)
  104. 20091218 - 폴 크루그먼, 예상한 외 옮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서울: 한국경제연구원Books, 2009)
  105. 20091221 - E. 캇시러, 유철 옮김, 『루소, 칸트, 괴테』(서울: 서광사, 1996)
  106. 20091223 - 임석재, 『계단, 문명을 오르다: 고대 ~ 르네상스』(서울: 휴머니스트, 2009)
  107. 20091224 - 움베르토 에코, 김광현 옮김, 『기호: 개념과 역사』(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9)

2009-12-30

세대론 메모

아까 모 편집자님과 만나서 식사하던 중 나온 이야기.

'대학생 말하기 강의'라는 책이 있다고 하자. '20대 말하기 강의'라는 책을 또 누군가 낸다고 하자. 두 책을 사서 볼 독자층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목은 다르다. 나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대 문제'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대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있고,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어쩌면 객관적으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20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당장 검색해서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를 정독할 것).

특히 조선일보. '386세대'라는 단어를 띄움으로써,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을 화이트칼라 사무직 직원 및 인근 엘리트들 사이의 세대 다툼으로 치환해버렸다. IMF 당시 30대였던, 80년대 학번을 단, 60년생들. 이른바 '58년 개띠'들에게 밀리는 세대들. 이 구조가 지금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386에게 밀리는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세대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꺼내면서도 왜 노동문제에 무관심한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세대론이 유의미한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화적 담론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특정한 문화 컨텐츠를 함께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위로서의 세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구학적으로 유의미한 지표를 만들어낼 수준이 아니라면, 보편성을 지니는 세대론이라는 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나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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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세대론은 '작은 칼'이다. 작은 단위에서는 잘 들어맞는다. 가령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학생들의 세대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학부제의 전면적 도입 및 실시였다. 그것이 기존의 학생 조직의 재편을 강요하면서 와해시키지 않았다면 현재 대학가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 법조인들에게는 곧 들이닥칠 로스쿨 세대가 기점이 될 터이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세대들도 영상원이라는 하나의 교육기관이 생긴 것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세대론은 작은 단위를 분석할 때 유효하다. 문제는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대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첨언2: 세대론에 한국의 식자층이 우르르 쏠려간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담론 지형이 얼마나 협소하고 위축되어 있으면, 하나의 섹트를 분석할 때에나 맞아떨어질 이야기에 글 읽는 자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세대론을 유지하고 싶다면 세대론을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젊은이들의 빈곤 문제를 다루고 싶다면 '88만원 세대'라는 히트상품을 버릴 각오를 하고 논의를 구성해야 한다. 담론적 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9-12-29

이건희 사면 문제

이건희 사면 문제의 핵심은 '사면법' 그 자체이다. 제왕적 사법부 운운하는 것은 한국 실정에서 개소리다. 사법부에서 아무리 잡아넣어봐야 뭐하나, 어차피 '사법적 제왕', 즉 대통령이 사면해주면 그만인 것을.

사면법은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후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권력의 칼을 쥔 이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절대반지와도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위주의 탈피'를 부르짖은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노 정권 당시 '탈권위주의'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한계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 블로그에 쓴 이 글을 참조할 것.

2009-12-26

사진들

잊을만 하면 올라오는 사진들입니다.

다량의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1. 크리스마스 특별 감자 셀러드.



당근과 빨간 파프리카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 보았음.



2. 가을이와 입동이




무릎고양이 입동이...


의 앞발.


부엌 매트에 턱을 괸 입동이


책장 정리하던 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가을이


둘이 별로 안 친한 분위기


책상을 정복한 가을이


생체 레그워머 입동이



3. 저는 장남입니다


된장남...


악플을 상대하다가 지친 된장남...


이런 분위기의 까페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된장남인 것입니다.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천박하다고 말할 때 나는 차라리 비애감이 든다. 인문학은 필요하지만 인문학 하는 사람이 많을 필요는 없다는 말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좋지만 숲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대한 문학의 시대를 뒷받침하고 있던 것은 위대한 작가들이 아니다. 그 작가들처럼 되고 싶어서 그들의 책을 사고 문체를 흉내내며 문예지를 탐독하던 지망생들이야말로 시대의 버팀목이다. 평지의 거봉은 없다. 모든 높은 봉우리는 비슷한 높이의 산들과 함께 산맥을 이루고, 산맥은 가장 야트막한 언덕까지 쭉 이어진다. 한 마리 호랑이의 포효를 위해서는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

2009-12-23

싸움을 멈추고 열린 마음으로

그 누군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지겹지 않겠는가. 지난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이 상대편의 주장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정당의 지지자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나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보자. 과연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도 경청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왔던가? 무조건 귀를 막고 반대되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매진해온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우리 당은 의석이 둘 뿐인 작은 정당입니다. 독자적으로 총선을 치를 경우 잃을 것은 없습니다. 의석도 늘어날 것이요 당의 존재도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 백여 개의 의석을 보유한 민주당은 '파멸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수도권 선거는 보통 2천표 안팎의 차이로 승패가 갈립니다. 약 10만 명이 투표하는 선거구라면 유효투표의 2% 안팎의 차이가 승부를 결정합니다. 우리당 후보들은 지역구의 성격과 후보의 경쟁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도권에서 그보다는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할 것이며, 한나라당보다는 잠재적 민주당 지지표를 훨씬 많이 빼앗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준다는 비난이 일겠지만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민주당이 리모델링 신당으로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음을 분명하게 경고했고 민주당 의원들이 정당개혁의 흐름에 합류할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와, 정말 구구절절 옳은 말이구남.

2009-12-10

오바마 노벨상 수상 연설

* 우리는 새로운 아메리카나로 들어갔음. 제 머리에 왕관을 얹은 나폴레옹처럼, 오바마의 입을 빌어 미국은 이제 대놓고 세계 경찰이 되는 듯.

* 부시가 시작한 'war on terror'가 오바마에 의해 추인된 것도 기록 포인트.

* '제국의 몰락'을 말하는 분들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제국의 몰락'으로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제국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전후 관계를 거꾸로 보면 안 됨.

* 연설 졸라 잘 함. 우크라이나 총리 율리아 티모센코의 얼굴에 밀려오는 감동의 쓰나미. 애는 자는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윌 스미스. 기타등등.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소유권의 핵심은 처분권이다. 내가 내 연필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남에게 팔 수 있다. 아무 의미 없이 그것을 부러뜨리거나, 크로마티 고교에 나온 것처럼 괜히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자유다. 반면 가을이가 내 연필을 빌려서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다면, 내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그 연필을 사용해야 한다. 주인인 나의 허락 없이 그것을 남에게 양도하거나 매매하거나 처분해버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오공감의 44 사이즈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턱없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유명한 말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소유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피오줌을 싸건 말건 당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는 그러나, 여성의 소유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대체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 즉 가부장 혹은 혈족의 소유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여성들이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없다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캠페인으로 현재의 출산율 저하 경향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의 기저에는 바로 이런 전근대적 여성관이 깔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평소에 그토록 이명박 정부의 여성정책, 혹은 인구정책에 대해 가볍게 비아냥거리던 이글루스의 여론 또한 거의 비슷한 프레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혈뇨가 나오도록 밥을 굶는 사람이 왜 '건강하라'는 명령을 들어야 하는가?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것이라는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명제에 동의한다면 애초에 그런 값산 '충고'를 함부로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상식'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극심한 다이어트를 통해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성매매나 장기매매와 같지 않다. 성매매나 장기매매의 경우 그것을 합법화하면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으로 궁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의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마저도 법으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암스테르담의 합법적 성매매로 인해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동구권 여성들이 몰려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자발성'의 허구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이어트를 통한 건강의 저하는 그런 외부효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남성들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호르몬 성분이 함유된 약물을 주사하고 먹으며 인공적으로 추출된 단백질을 과다 섭취하는 경우와 비교해보자. 문제의 여성은 혈뇨를 누었지만 단백질 보충제를 과다하게 섭취할 경우 소변에 단백질 성분이 섞여 나오고 그 과정에서 신장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보디빌더 앞에서 '지금, 스스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라고 느끼한 충고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남성'의 몸은 남성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소유권 행사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닌 몇몇 미덕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의 폐단에 항거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태초부터 겪어야 했던 딜레마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특정한 미의 형태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에게 '너는 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한다'고 외치는 전근대적 함성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제발 기초적인 것들부터 지키면서 살자.

2009-12-03

철도파업과 한국식 공감법

철도파업이 실패로 끝났다. 투쟁대오를 가다듬어 다시 싸우자고 발표했지만, 파업을 푸는 순간 구속 행렬이 이어질 것이고, 실제로 파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축들은 모두 막대한 민사소송을 당한 채 감옥으로 향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용산 참사 1심을 보고도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이 남아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드물게도 이번 철도파업에서는 인터넷의 여론이 파업에 동정적인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노회찬의 표현대로 법치주의가 아닌 '박치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네티즌들의 알량한 손가락 놀림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여론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저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가장 의아한 것중 하나가 바로 저 '공감'이라는 단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단어가 쓰이는 화법이 놀랍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공감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블로그에 '잘 읽었습니다^^'라는 리플을 다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즉 자신의 의사에 의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 혹은 윤리학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공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감은 재채기처럼 조건반사적인 것이지,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호주 출신의 윤리철학자 피터 싱어의 최근작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 등장하는 논증들은 대부분 이 공감의 무조건성에 기대고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가령 지금 당신의 앞에 어떤 아이가 물에 빠져서 죽어간다고 해보자. 당신의 주머니에는 십만 원이 들어있고, 어떤 수영선수가 '나는 누군가 내게 십만 원을 준다면 저 아이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 수영선수에게 십만 원을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Y자로 갈라지는 철로가 있고, 당신이 가장 아끼는 자동차가 철로의 왼쪽 가지 위에 놓여 있다. 엔진이 고장나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오른쪽 가지에는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선로 위에 꽁꽁 묶여 있고, 당신은 그를 풀어줄 수 없다. 밑에서부터 열차가 올라오고, 당신은 분기점에서 그 기차를 왼쪽으로 보낼지 오른쪽으로 보낼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승용차를 건지기 위해 그 기차를 오른쪽으로 보낼 수 있는가?

경찰과 검찰, 대통령과 사측은 손에 박달나무 몽둥이를 움켜쥐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매일같이 표명하고 있다. 파업을 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게 된다. 파업 노동자들이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위험에 빠짐으로써 사람들의 동정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은 물에 빠졌고 철로에 묶였다. 그러한 사고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피터 싱어가 물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서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보고 무턱대고, 주체할 수 없이 드는 동정심 따위는 사람들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만 같다. 내 연봉보다 많이 받는지, 한글날에 쉬는지 안 쉬는지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물에 빠진 어린이의 앞에서 '너 강남 살아 강북 살아? 강남 살면 안 구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인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이쯤 되면 '파업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거고...' 운운하겠지만, 두 번째 예를 상기할 것.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의 승용차를 지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 나의 작은 불편과 타인의 엄청난 고통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도 약 5년간 1호선을 타고 부천에서 신도림 혹은 신길까지 갔다. 안암역 혹은 고대역까지 총 1시간 40분씩 시달려본 사람이다. 철도 파업을 하면 정말 죽을 맛이다. 하지만 나의 그 고통을 덜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구속당하고 감옥에 처박히고 손해배상 폭탄을 맞아가며 가정이 파탄나고 절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인의 체취가 진동하는 국철에서 덜컹거리는 게 재미있고 흥겹고 신나서가 아니라, 내가 이 고통을 묵묵히 참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엄청난 시련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랍게도 '선택적 공감'을 하는 기술을 익혀버렸다. 예전에 '팩트골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삶의 디테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 문제는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 아닌가? '공감이 안 가네요'라고 한 마디 찍 내뱉는 그들을 보면, 내가 인간의 도덕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이 신인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파업은 패배로 돌아갔고, 공공부문의 가장 크고 강력한 노동조합이 패배한 만큼,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분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귀족노조가 사라지면 모두 부자가 되려나? 모두 노예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정부의 악랄한 선전질과 국민들의 '한국식 공감법'이 맞물려, 우리는 아주 비참하게 일하고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덜컥 잘려도 불만 한마디 표하지 못하는, 그런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책상에서 일하는 당신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