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30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

현재까지 한국 보수정치는 줄기차게 '중도주의'를 표방해왔다. 누가 봐도 대충 '옳으신 말씀'을 하면서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전략이 즐겨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현 정부도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고 말하는데, 강남에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도 곧죽어도 자신들을 '중산층'이라고 칭한다는 것을 놓고 보면, 이건 그냥 '다들 행복하게 잘 살자'는 수준의 표어밖에 안 된다. 한국의 정치는 가장 넓게 그물을 펼치는 전략을 선호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넓은 정치'가 '힘의 정치'와 곧바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쌍끌이 어선끼리 어장 경쟁을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그 민주당을 비판하는 외곽 세력들이나, 이념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뿐더러 애초에 어떤 '이념성'을 지니려고 하지도 않는다. 특정한 핵심 지지층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들에게 단번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하려다보니, 결국 정치는 한낱 쪽수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선거에서 단일화 국면을 떠올려보자. 만약 각 정당들이 특색에 따라 확고한 지지층을 지니고 있고 그 충성도가 높다면 애초에 단일화 논의가 잘 거론되지도 않을 뿐더러 명확한 '거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사에는 계급정당이 제대로 출현한 바 없었고, 그나마 유권자들을 묶어놓는 끈은 지역주의 뿐이었다. DJP 연합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충청도 표를 주면 너는 나에게 총리직을 주고 내각제 개헌을 한다, 이건 '거래'가 된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진보정당의 확실한 표밭으로 구성된 비율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 진보정당들과 민주당 및 민주당 계열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거래가 성사되기 어렵다. 서로 주고 받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한데, 민주당과 그 계파들은 애초에 대중추수에 급급했고, 진보정당들의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민주당 계열들은 진보정당과 정당한 거래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힘으로 빼앗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테니까. 쪽수로 밀어붙이고 여론조사 결과로 압박하면, 사표 방지 심리로 진보정당의 핵심 지지층도 상당수 끌려간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들, 특히 보수양당이 지니고 있는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와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은 이렇듯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다수결-쪽수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좋은 소리'만 한다. 그렇게 막연한 수사로 다수를 동원한 후, 스스로의 이념과 지향성을 지닌 정치집단들을 다수결에 의해 굴복시킨다.

전직 배우, 현직 정치인 문성근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은 이와 같은 경향성이 극대화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합쳐라, 모여라'만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령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않았다. 실천에서의 다수결을 맹신하므로 백만 명을 모아서 야당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발상을 이마에 써붙이고 다닌다. 구체적 강령이나 지향성 따위 없는, 함성을 위한 함성.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은 껍데기로서의 정치. 한국의 정치를 허깨비로 만드는 두 개의 큰 경향성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이와 같은 기괴한 대중정치운동이 출현한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경향성에 맞서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는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와 더불어 계급정당이 출현하고 그들이 핵심 지지층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 성립하였지만, 한국에서는 해방 후 보통선거권이 그냥 주어졌고 갓 시작된 계급정당이 철저하게 와해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진보정당이 10%대의 득표율을 올린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북한의 3대 세습을 외부에서는 비판할 수 없다는 개또라이들이 당을 집어삼키면서 그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있는 중이다.

진보정당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치들은 대부분 '대중성 강화'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대중성이란 이와 같이 이념적 탈색과 더불어 힘의 정치에 대한 숭배를 동시에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노선을 택할 때 진보정당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할 뿐더러 다수결이 민주주의라고 믿는 자들의 공세 앞에 더욱 무력해진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의 지지자는 와해되고 있는 계급에 호소하거나,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새로운 대중성에 호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2010-09-19

김규항 - 진중권 논쟁 (3) : '자유주의자'라는 욕설

김규항은 자신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 행동이 말 그대로 '사실적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김규항 본인 혹은 김규항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발언 속에서 이와 같은 입장은 수없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라는 단어 자체가 어떤 도덕적 평가를 담고 있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때, 그것이 비난이나 평가 절하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맥락에 따라, 그 어떤 단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욕설 비슷한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누군가에게 '이런 세종대왕 같은 새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발화의 상대방이 고기와 여색을 밝히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야 이 이순신 같은 놈아'라는 표현은 그 발화의 상대방이 대단히 꽁하는 성격이며 자신과 불화하는 자를 매일 일기장에서 씹고 심지어 섹스 파트너와의 성관계 횟수를 일기에 적기도 하는 편집증적 성향을 지닌 것임을 지적하는 문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너는 자유주의자'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화자와 그 상대방 모두 진보정당의 가치에 동의하고 그것의 성장을 바라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결국 진보정당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강요했다는 역사를 함께 고려해볼 때, 그와 같은 딱지붙이기는 당연히 욕설 혹은 심한 비판 내지는 비하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김규항이나 김규항의 옹호자들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이 그저 사실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화술을 지닌 사람 혹은 집단이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대중들은 어떠한 정치 집단 속에서 그와 같은 '배제'의 화법이 자연스럽게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면 조용히 발걸음을 돌릴 뿐이니 말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과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욕설로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후자를 피하면서도 전자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자신이 전자를 수행한다고 착각하면서 후자에 지나지 않는 행태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진보정당의 구성원, 혹은 그러한 정치적 결사체를 위해 발언하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를 희망한다.

2010-09-13

김규항 - 진중권 논쟁 (2)

김규항과 진중권 사이에서 오간 '논쟁'이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진중권은 트위터에 폭풍과 같이 쏘아붙였고, 김규항은 오늘 "논쟁을 끝내며"라는 블로그 게시물을 올려 "이 논쟁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

진중권은 실컷 짜증을 내고 있고, 김규항은 최후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부적절한 시점에서 발을 뺐지만, 나는 이 '논쟁'이 사람들의 평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신당 자체 뿐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집단의 행동 방식에 대한 하나의 거울상을 그려내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고, 진중권이 대중들을 향해 벌이는 활동들을 낮게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진중권보다 더 왼쪽에 있는 그룹들을 존중하지 않고 되려 '닭짓'이나 한다고 폄하한다. 둘째, 그 과정에서 왜 진보신당과 민주당이 다른지, 왜 한나라당에 반대하기 위해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을 찍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우선 첫 번째 논점에 대해 살펴보자. 김규항은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4에 서 자신은 '사회주의'를, 진중권은 '사민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민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이야기"라는 전제 하에, "사민주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주의 체제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체제"라고 단정짓는다. 따라서 사민주의는 그 태생 및 속성상 자본주의와의 타협주의이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갈등하는 사회주의가 성장해야만 커나갈 수 있는 종속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와 같은 사민주의 이해는 대단히 편협할 뿐더러, 사민주의에 대한 현대적인 연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견해는 구 소련측에서 만들어낸 서구 좌파들의 역사에 대한 기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실상을 놓고 보면, 사민주의와 레닌주의 모두 기존의 사회주의가 각국의 특수한 현황과 맞물려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정치체계다운 정치체계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는 전제정을 몰아낸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근대적 체계를 일거에, 폭력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독일이나 스웨덴 등 민주주의 체제가 발전하고 있는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위해 민주주의적 원리, 혹은 현실정치의 방법론을 사회주의 운동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그 어떤 경우에도 김규항이 말하는 '다짜고짜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보편적 원리는 특수한 상황에 맞도록 재해석된 수정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김규항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사민주의가 아니다'라는 것 말고, 그 어떤 적극적(positive)인 자기규정을 지니고 있는가? 현대 사회주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사민주의 외에 현실적으로 구현된 사회주의의 형태는 구 소련의 그것이며, 그 외에는 중국의 독특한 국가주도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와의 타협의 결과물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적 원리를 도입한 결과물이다. 민주주의가 곧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면 김규항의 단순한 언명에 동의할 수 있겠지만 사태의 전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근원적 갈등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은 보편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를 보자. 영국 노동당 내에서도 '왼쪽'에 속하는 노인, 토니 벤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내가 아는 한 가장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이론은 1인 1표제다. 우리는 그 위에서 NHS 같은 것들을 만들어냈다."

진중권더러 사민주의자라고 칭하는 명제 자체의 진리값과는 별개로, 누군가를 '사민주의자'라고 칭함으로써 본인의 급진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발상은 대단히 촌스러울 뿐 아니라 사민주의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민주의는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다. 하지만 김규항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그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공허한 담론, 혹은 본인이 좌파 혹은 양심적 우파라고 생각하지만 이놈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믿고 싶은 이들을 위한 정신적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 도달할 수 없는 샹그릴라로서의 사회주의를 상정해버리면, 그 외의 여타 활동에 대해서 냉소하는 일이 한결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점을 살펴보자. 김규항은 진중권이 이번 지방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과의 대립각을 더 세우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 비판을 위해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7에 서 한 고등학생의 편지를 인용한다. 김규항이 인용하는 그 똘똘한 학생에 따르면 노회찬 후보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 토론회는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가 안 되고 있었고, 그 결과 노회찬과 심상정은 "‘왜 이명박을 반대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이명박의 대안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인지’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러한 시각 하에 김규항은 진중권이 출현한, 선거 직전 서울시장 토론회를 비판한다. 그가 "오류와 희망에서 지적하고 이 고등학생이 언급한 노회찬 씨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의 인터넷 토론회는 ‘프레임 오류’의 극치"였다. "물론, 토론회 자체는 진중권 씨의 독설과 재담으로 매우 ‘대중적’(!)이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렇게 안타까워할 거라면, 왜 김규항은 그 토론회에 본인이 참석해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하지 않았는가? 김규항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주최측이 기꺼이 패널 자리를 내어줬을 게 아닌가. 그는 선거 국면에 개입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노회찬이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적 행태로 인해 TV 토론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가 바라는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적의 기회 아닌가?

요컨대 이런 것이다. 왜 김규항은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는가?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할 기회는 많고도 많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번 선거 과정에서 그가 '더 왼쪽'에 있는 사회당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했는가? 진보신당 당적은 없되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진보신당에 채찍질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면, 왜 선거 다 끝난 다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사후평가와 비판이 불필요하고 무용하다는 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을 더 값지게 쓸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진중권이라는 한 사람의 셀리브리티를 쫓아 진보신당에 들어왔지만, 정작 투표할 때가 되면 자신이 속한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을 찍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진중권이 진보신당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비판'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공허한 사후론에 지나지 않는다.

진중권 때문에 들어온 사람들,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라면, '더 왼쪽'에 있는 김규항이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다. 그 자유주의자들을 (본인과 같은)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설득하고, 그 설득의 방법론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현실 속에서의 정당은 어쨌건 외연을 넓혀야만 하는 조직이다. 그 역할을 하는 것과, 정당 내에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흔들리지 않는 입장을 만드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김규항은 전자를 비판하는 것으로 후자의 몫이 수행된다고 믿는 것인가? 돛잡이가 돛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해서, 기울어진 배의 키가 올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키잡이 노릇을 하고 싶다면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 나는 김규항이 진보운동 내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어떻게 부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김규항이 그 '자유주의자'들을 설득해 사회주의적인 원리에 동참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진중권이 전진을 '닭짓'한다고 욕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가 될까? 물론 진중권은 대중적 스타다. 하지만 진중권의 영향력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수주의-자유주의-사민주의-사회주의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이 복잡한 현대 정치를 설명하고 이해해낼 수 있을까? 모든 보편은 특수하게 구현된다. 김규항이 지향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사회주의는 사민주의가 아닌 그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는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

진중권에게는 진중권의 일이 있고, 김규항에게는 김규항의 일이 있다. 대중들 속에서 진보신당의 존재를 알리고 각인시키는 진중권의 일, 혹은 '삐끼질'을 진중권은 훌륭하게 수행해왔다. 그렇다면 김규항은? 김규항의 일은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왔는가? 진보신당이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간다는 비판에서 출발했으므로 그 지점으로 논의를 한정시켜보자. 그는 진중권이 불러들인 '자유주의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슨 일을 했을까? 그들에게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것 외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나는 도저히 기억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결코 해법이 아니다.


김규항의 이러한 논법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라고 칭하는 것이 얼마나 미망한 일로 전락해버렸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배제된 채, '사민주의'를 내려다보며 논평할 수 있는 상위의 심급을 임의로 마련함으로써, 몇몇 이들에게 턱없는 정신적 우월감을 안겨줄 뿐인 하나의 정신적 기제 혹은 도피처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혹은 '좌파'라면, 나 역시 단호히 거부하겠다.

나는 진보신당이 더욱 대중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대중들 역시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진중권은 전자의 역할을 지금까지 훌륭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김규항이 후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 사람이 진보신당 전체, 한국의 진보진영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결국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가 관건인데,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대중성 강박'을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김규항이 그나마 '삐끼질'도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논쟁을 바라보며 나는 진중권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0-09-10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죽음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많았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담론들의 구체적 형태에 동의하지 않았다. 인문학은 늘 위기였기 때문이다. 철학의 경우로 한정짓고 이야기해본다면, 플라톤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것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왔다. 그리고 그들은 늘 실패해왔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지금도 위기에 빠져 있다. 전통적인 철학의 연구 주제였던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은, '인간 무리'의 행동에 대한 경제학적 관측, 혹은 '뇌-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관측에 밀려난지 오래다. 훗설의 책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핵심 내용은 결국 심리학에 대항하여 어떻게 인식론적 지평을 확보할 수 있을까인데, 나는 내가 그 책을 올바로 이해했거나, 그 책이 정곡을 찌르는 답변을 제시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 이유가 전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철학의 위기는 외부적으로도 진행중이다. 전후 자본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급증했던 대학들, 그 대학에서의 인력 수요에 맞춰 생산된 고학력자들이 갈 곳이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철학과 자체가 줄어들고 있고, 그 경향은 세계적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철학 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과로, 기존의 철학이 다루던 진지한 주제들은 온갖 학제간 연구 혹은 심리학과로 이양해가고 있다. '철학과'는 사라지고 있다. 다른 인문학 분야들의 경우도, 학과 자체가 소멸하거나 대폭 예산이 줄어드는 경향이 관찰된다.

인문학은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 인류가 원시적인 형태로 세계를 관찰하고 기술하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입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다. 특히 '인문학은 이제 대중들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거나, '여태까지는 상아탑 안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었지만 이제 인문학도 무한경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본디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제 새벽 뒤늦게 접한 부고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7월 4일, 대표적인 하이데거 연구자인 신상희 건국대 연구교수가 만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사인은 심장마비였고,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오랜 세월동안 안정된 자리를 얻지 못하는 과정에서 쌓인 심적 고통이 발병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는 외대 이기상 교수와 더불어 하이데거의 주저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지금 내 책꽂이에도 그가 옮긴 책이 두 권 있다.

신상희 교수는 '교수'라고 불리웠지만 교수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강사 생활은 그를 소진시켰고, 그나마도 2007년 느닷없이 끝나버리고 만다. 이후 그는 건국대에서 명저번역 사업의 학술연구교수로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후기 하이데거의 핵심 저서를 번역한 사람에게, 대학들은 정교수 자리를 끝내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인문학, 철학은 그 출발부터 위기였고 늘 위기 상황 속에서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이 '인문학자의 죽음'은 구체적이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처한 객관적인 삶의 현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다. 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헌신하면, 당신은 대학의 문턱의 바깥에서 떠돌다가 지쳐 쓰러져버릴 것이다. 이 죽음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대중들과 함께하는 인문학'을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대체 그 '대중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속에서, 신상희 교수와 같은 연구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철학을 소비하는 한국의 대중들 중 스스로를 좌파라고 여기는 이들은 New Left Review 같은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핫'한 이론가들을 따라가는데 바쁘다. 별 생각 없이 철학 오오 철학자 오오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철학자가 하버드 명강의를 하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할 것이다. 나치에 부역한 하이데거, 혁명과도 아무 상관 없는 포스트모던의 '기원'일 분인 하이데거를 묵묵히 연구하고 번역하는 사람은, 대체 이 '새로운 인문학'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연암 박지원은 노마드였지, 킬킬! 니체는 너무도 불온해! 이렇게 철학자들의 이름을 '쿨'하고 '핫'한 것으로 포장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인문학의 소임인가? 대중들의 그러한 욕망, 즉 뭔가 으리으리하고 굉장한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반성적 고찰도 요구하지 않는 책을 읽음으로써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것은, 굳이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고야 말겠다는 이건희의 허영심에 부응한 고려대학교의 행태와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돈 안 되는 연구, 그 책이나 논문을 읽을 연구자가 열 명도 안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연구는, 대체 이 '새로운 인문학' 속에서 어디에 머리를 두고 잠을 자야 한단 말인가?

인문학의 위기 그 자체는 인문학적으로 돌파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그러하였듯이, 철학의 위기는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과 결과물의 제시로 해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헌대 그 하이데거 역시 대학교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였고, 안정된 신분을 얻는 순간 크게 안도하여 스승인 훗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고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그보다 더 가혹하다. 자신들이 철학에 관심이 있다고,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이제는 철학자들이 아카데미 속에서 연구하는 것을 고깝게 여긴다. 더 쉽게, 더 쉽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게! 진정한 인문학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는 내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은 다르다. 인문학을 연구한다는 명찰을 달고 살아남고 싶다면, 바로 그 인문학을 얄팍하게 만드는 일에 기여해야만 한다는 협박이 들려오는 것 같다. '빙고, 당신은 지금 헤겔의 변증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물론 그 헤겔도, 또 칸트도 사강사 생활을 하며 삶을 부지해나갔다. 하지만 그들의 학생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은? 대중들은 '칸트'라는 이름의 고색창연한 무게감만을 쏙 빼간 채, 그의 문제의식과 이론에 대한 진지한 접근 따위 앞에서는 귀를 닫아버린다. 귀를 막고 소리지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첨언: 나는 바로 이와 같은 시각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