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11

이정렬 판사가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에 대해 재판한다면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 탈락에 대한 논의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진중권이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관련된 뉴스의 링크를 제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나는 그의 전체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가카’라는 외재적 거악이 아니라, 공적 기관이나 사기업 혹은 기타 생활세계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자기 구속과 억압이다. 다른 수많은 사례들에서처럼, 여기서도 ‘작은 두목’들이 휘두르는 조직 내의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이옥형 서울지법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은 바로 그 지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제 판사들은 법원장으로부터 근무평정을 좋게 받지 못하면 판사직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목격하였다. 꼭 사건처리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사건처리를 못하면 그것을 이유로, 사건처리를 잘해도 조직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원만해도 판결에 나타난 국가관이 이상하여 균형감이 없다는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로 좋지 않은 평정을 받을 수 있다.
서기호 판사의 글(링크)
이 항변의 내용은, 공교롭거나 공교롭지 않게도, 최근 큰 논란을 불러온 ‘석궁 테러’의 가해자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그것과도 같다. 그 사건의 대략적인 맥락을 상기해보자.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기재하는 실력자이지만, 입시 문제의 출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재직중인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교수, 평소 다른 교수 및 재단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도 막말을 했다는 그런 교수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당시 서울고등법원에 재직중이던 이정렬 판사는 본인이 주심을 맡은 이 사건에서 성균관대학교는 김명호 교수를 복직시킬 필요가 없다는 원심을 확정지었다.

이 판결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김명호 교수가 해당 재판의 재판장인 박홍우 부장판사의 집에 석궁을 들고 찾아갔고, 그는 이후 살인미수로 수사받고 상해죄로 기소되어 징역 4년형을 살고 현재 석방된 상태다. 이미 나는 그 형사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부러진 화살, 뭉툭한 이성). 이번에는 지난 글에서 다루지 않았던 민사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이정렬 판사는 ‘김 교수가 판결문을 읽어보았더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판결문은, 이정렬 판사의 자부심 넘치는 발언처럼,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다. 학생들에게 욕을 얼마나 했느냐, 욕 먹은 학생들은 다들 앙심을 품어서 그런 것이냐, 따위의 자질구레한 ‘진실게임’은 다 접어두고 판결문의 기본적인 논리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구 교육법(김명호 교수가 재임용 심사를 받을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게 하여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념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2. 같은 법에 따르면, 대학은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광범하고 정치한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 그러므로 성균관대학교가 교수의 임용과 관련하여 연구 실적과는 무관한 요소들, 가령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평가의 항목으로 삼는 것은 정당하다.

4. 그런데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항목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대학측이 제출한 자료를 통해 보건대 그 평가는 정당하다(또한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고 있지 않다).

5. 따라서 성균관대학교의 재임용 불가 처분은 정당하다.

이와 같이, 이정렬 판사는 철저하게 해당 사건과 관계되는 법률을 찾아내고, 그에 기반한 판결을 내린다. 그를 ‘우리편’으로 만들어준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과 ‘꼴통’으로 만들어준 억대 내기 골프 무죄 판결 모두를 관통하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기존 판례나 ‘국민감정’보다 현행법으로부터 도출되는 법도그마틱을 우위에 두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 그를 ‘튀는 판사’로 언론에 오르내리게 만든 원동력인 것이다(물론 ‘가카새끼 짬뽕’으로 인한 유명세는 별개로 쳐야 한다).

물론 그 원칙은 정당한, 혹은 우리 모두가 정당하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판사가 법도그마틱이 아닌 다른 요소를 통해 판결을 내린다면 국민들은 안정적인 법 작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렬 판사의 그 판결문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해당 사건과 관련된 법을 통해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수의 임용에 교육자로서의 자질 같은 주관적 평가를 개입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항변은 판사가 아니라 입법부를 향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같은 논리가 서기호 판사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 단계씩 그 논리를 따져보도록 하자.

1. 헌법 제101조 3항에 따라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 헌법 102조 3항에는 대법원과 각급법원의 조직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 위 헌법 조항들은 법원조직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는데, 법관의 근무성적의 평가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44조의2 (근무성적의 평정) ①대법원장은 판사 및 예비판사에 대한 근무성적을 평정하여 그 결과를 인사관리에 반영시킬 수 있다. ②제1항의 동무성적평정에 관한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정한다.

3. 그런데 대법원규칙(2012년 1월 1일 개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6조(임용기준)

판사임용대상자에 대해서는 법률지식 및 법적 사고 능력, 공정성, 청렴성, 전문성, 의사소통능력, 품성, 적성, 공익성 등을 참작하여 법관 수급 사정에 따라 임용 여부를 결정한다.

4. 대법원규칙은 “법적 사고 능력”뿐 아니라 “공정성”과 “품성”을 임용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객관적인 지표로 측정될 수 없는 요소가 평가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정당하다.

5. 그러므로 서기호 판사는 법원의 재임용 거부에 대해 항변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앞서 우리는 조직과 기관마다 속속들이 박혀있는 작은 두목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동일한 논리를 지니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분위기나 문화나 ‘빌어먹을 꼰대 새끼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엄격하게, 혹은 이정렬 판사의 방식대로 따져보면, 바른 말 하는 당신보다는 당신에게 ‘젊은 친구가 세상을 모르네’라고 말하는 ‘꼰대’가 법정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법에 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 개인에게 ‘인격’을 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인격을 판단하는 주체는 적어도 당신보다는 더 힘이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나에게는 김명호 교수의 재임용 탈락이 서기호 판사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국가의 법이 개인에게 특정한 ‘인격’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쟁점이라면, 두 사건은 상호 교환 가능하다.

허재현 한겨레 기자를 비난하기 위해, 김명호 교수를 ‘완전히 4차원’으로 몰아붙여간 진중권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몇몇 언론은 진중권이 김명호 교수를 닦달한 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논조로 서기호 판사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려 든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잘릴 만하니까 잘렸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서 판사는 심사 하루 전인 6일 자신의 근무 평정을 판사 내부 통신망에 스스로 공개했”는데, “그는 초반 7년 동안 ‘상·중·하’에서 ‘하’를 5회, ‘중’을 2회 받 았고 ‘상’은 한번도 받지 못했”고, “이후 A~E 까지 5단계로 평가한 3년간은 C를 2회, B 를 1회 받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그 평가의 내용이 반드시 법관으로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고, 대법원규칙에 의해 규정된 바에 따른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명호 교수의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송 따위로 인해 그 ‘인격적’, ‘품성적’ 내용이 공개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뿐이다.

‘김명호는 4차원이지만 서기호는 천사표’라는 식의 저질스러운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을 위해 조선일보는 세심하게 팩트를 던진다. “그는 또 변호사가 재판부에 낸 준비서면을 그대로 오려 붙여 ‘72자(字) 짜리’ 무성의한 판결문을 썼다가 변협의 공개 항의를 받는 등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요새는 판사도 Ctrl-c Ctrl-v 하느냐’는 식의 조롱 대신, 근무 평점이 중간인 사람이 어떻게 뒤에서 2등이 되는지 ‘논리적’으로 궁금하다며 너스레를 떨 뿐이다(이미 조선일보는 ‘그 둘 빼고 중하위권은 다 알아서 나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계속 진중권을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논의의 이성적 수위를 공고하게 높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가 어떠한 인격과 품성과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법에 써놓고 강제하는 것이 가능한 나라, 100개의 조직마다 100명의 원님이 호령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하는 나라에서, 바로 그 메커니즘에 의해 짓밟힌 누군가를 향해 ‘알고 보면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정말 실망했다. 이성과 상식을 부르짖지만 그 방법론은 과연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요컨대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열정으로부터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문화적 맥락을 분리하고, 그 문화적 기제의 바탕에 깔린 제도적 장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깝깝한 이유는 늙었는데 죽지도 않는 노인부대가 정신줄 놓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나 찍고 자빠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 속의 인간을 분리하고, 사건 자체의 문화적 측면과 법적 측면을 별개의 것으로 고찰하는 사고의 구조가 확립되고 보편화되지 않는 한 현재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연이어 불거진 두 개의 사건을 바라보는 한 총명한 논객의 발화를 검토해보고 있노라면, 밤은 깊고 갈 길은 멀 뿐이다.

진중권은 ‘김명호 민사사건 담당, 일명 튀는 판사로 유명한 이정렬 판사네요’라며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김명호 교수에 대한 판결이 옳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트위터에 흘린 바 있다. 바로 그 이정렬 판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기호 판사의 경우를 바라보면, 그러나, 그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뭘 어쩌자는 말인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현재 상황이 그 자체로 문제적이라는 위기 의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닳고 닳은 인용구로 긴 글을 끝내야겠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2012-02-04

시바스 리갈과 비키니

MBC의 부장급 여성 직원께서 52년만의 맹추위를 무릅쓰고 벗어주신 덕분에 이 논란의 본질이 또렷해졌다. 사안의 본질은 섹스 혹은 젠더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인간 혹은 생물의 본능적 욕망인 섹스 그 자체와, 그 위에 덧입혀진 군사독재 시절 혹은 ‘유교 꼰대’적 문화의 갈등이 이 사안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개방적인 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섹스 위에는 문화적 레이어가 존재한다. 상호 합의된 자유로운 성욕이라는 최소한의 개념에도 역시 근대적 자유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좀 덜 개방적인 문화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 ‘가문간의 결합’, ‘인구학적 지속 가능성’ 따위가 섹스의 직접적인 노출을 막는 차단막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러한 문화적 기제가 단지 문화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권력적 함의를 지니고 있을 경우이다. 가령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은 젊은 여자를 끼고 놀고 싶다는 욕망을 ‘조국 발전에 힘쓰시는 각하의 피로를 풀기 위한’ 일로 승화시켰다.

(섹스에 대한 욕망이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는, 그만큼 성폭력에 대해서도 둔감한 곳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가치, 거스를 수 없는 대의를 타고 누군가의 욕망이 흘러넘칠 경우,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들이 그것을 거스르기란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봉주는 성욕 억제제를 먹고 있으니 안심하고 비키니 사진을 보내라’고 김용민은 말했다. 육 여사를 잃고 나라 근심에 지친 각하를 달래드리는 거지, 결코 네놈들이 생각하는 그런 천박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박정희의 채홍사들은 둘러댔을 터이다. 나는 두 발화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권력’을 단지 국가나 젠더 사이의 위계적 차이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풍부한 논의를 해볼 수 있다. 대체 MBC의 그분은 왜 벗었는가? ‘이건 단지 찧고 까부는 건데 너무 진지하게 비판한다’는 항변의 뉘앙스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애들 장난인데 왜 그래?’라고 말하고 싶고, 그러므로 ‘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무색하게 하기 위해 ‘언니’로서, ‘선배’로서, 혹은 ‘형님’으로서 총대를 매는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 보스 행세를 해야만 하는.

이제 문제의 ‘비키니녀’들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나는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은 다만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본인의 탐스러운 육체를 많은 이들에게 과시하고픈 욕망이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잘 벗을 수 있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더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레진 블로그에 축전을 보내고 공개되고 서로 좋아라 하는 그 행위에는, 지금의 이것과 같은 이중의 음습함이 없다.

문제는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와 가카를 깔 수 있는 자유 등등, 절대적 까방권이 될 수밖에 없는 선량한 대의가 마치 입안에 감도는 미원의 맛처럼 뒤덮혀있다는 것이다. 수신자 정봉주와 엿보게 되는 수많은 남자들을 흥분시키려 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그와 같이 고상한 목적으로 사탕발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꼼수에서 둘러대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섹스에 대한 권력적 포장을 완성시킨다.

‘나는 자발적으로 벗었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는데, 정작 그 자발적인 육체의 섹슈얼한 맥락은 다들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가운데(혹은 “찧고 까부는” 일이라는 식으로 모에빔 처리되어), 국가와 민족과 민주주의의 성전에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비키니 사진을 보내는 이들을 슬럿워크와 비교하는 것은 그래서 결코 온당하지 않다. 슬럿워크는 추상적인 여성의 자유를 ‘홍보’하기 위해 옷을 벗는 게 아니라, 걸레처럼 싸보이게 입고 다니는 것 자체가 여성의 자유의 본질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꼼수를 듣고 지지하고 응원의 사진을 보낸 여성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꼼수를 ‘초월’하여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과 이후의 어정쩡한 해명을 통해 김용민과 나꼼수 제작진이 만들어낸 ‘섹스를 표현하면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변태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적인 맥락 작용을 추인해버린 것이다.

정봉주의 발기를 기대하고 벗었다면 왜 본인의 진실을 말하지 못할까? 벗긴 벗되 그런 걸 바란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바라고 비키니를 입은 채 가슴을 모아올렸나? 비키니 응원녀들의 두 개의 진심은 모두 순수하고 진정성 넘치는 것이기에, 서로 충돌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재미를 보는 건 결국 꼭데기에서 그 구조를 만들고 조정하는 자들 뿐이다. 박정희의 섹스가 국가와 민족의 과제로 승화되던 그 변태성이, 역시나 이번에는 희극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에서 나는 ‘마초’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꺼내서 과시하지도 못하는, 자칭 민주투사들이 서로 민망하게 노는 모습이 유출되었을 뿐이다. 정봉주가 옥중에서 투약한다는 성욕감퇴제가 대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 남자들이나 그 여자들이나 결국 태극기 망또를 두르고 민중가요 부르며 팬티를 벗어재끼는 변태들처럼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