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7

[별별시선]청년들의 미래를 위한 투쟁

▲ “법적으로는 미성년자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 미성년자 취급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인생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20대 논객’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2010년에는 뒤늦은 입대를 했는데, 제대할 무렵이 되면 더 이상 20대가 아니므로 ‘20대 논객’ 꼬리표를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20대’를 위한 지면은 ‘2030’을 위한 것으로, 혹은 청년세대 전체의 것으로 탈바꿈했다. 이등병이 예비역 병장 되듯 나는 20대 논객에서 청년 논객으로 진급했다.

이러한 제자리걸음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에서 청년을 29세까지로 한정하자 30세를 넘긴 미취업자들의 반발이 쏟아진 사례를 생각해보자. 결국 대상 연령을 34세까지 늘리면서 불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대체 몇 살까지가 ‘청년’인가.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최근 국민연금 개혁안을 놓고 벌어진 논란을 지켜보며 나는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몸은 다 컸고 법적으로도 미성년자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청년이다.

여기서 ‘미성년자 취급’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청년들은 취업준비생이거나 갓 취업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인정된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은 지금도 수없이 연구되고 또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어디까지나,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미성년자에 불과하기에,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있을지언정 그들에 ‘의한’ 대안은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청년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와 대립하는 경우가 문제다. ‘착한 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곧장 의심의 눈초리가 날아든다. 젊은이들의 반발은 공포와 괴담에 휩쓸린 비이성적 여론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국민연금 개혁안에서,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어디까지 끌어올려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이, 일단 소득대체율부터 50%로 못박아야 한다고 야권은 요구했다. 적잖은 청년들은 반발했다. 야권 성향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러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보수 언론의 선동에 놀아난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린다 해도 당장의 노인 빈곤 문제와는 무관하다. 빈곤 노인들은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혁 진보 세력은 세대 간 연대니 공동체의 의무니 하는 원론적인 정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은 복지예산 비중이 너무 낮은 나라다. 또한 지나치게 많이 쌓인 연기금이 주식시장에서 주가 방어에 쓰임으로써, 결국 저소득층의 돈으로 자산시장을 지탱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야권은 ‘2060년쯤 되면 적립금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며, 쟁여둔 곶감은 자신들이 다 빼먹는다는 전제하에, ‘그때까지는 보험료율을 1%포인트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과연 청년들이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2008년 이후 언론 지면에 등장한 젊은 논객들에게는 나름의 자체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들의 문제를 가시화하되 기존의 진보적 가치, 조직, 여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단지 논객들뿐 아니라 청년층 전반의 지배적 기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그토록 ‘20대 개새끼론’이 횡행했음에도, 지난 대선에서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당장은 보답을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진보 개혁 세력에게 좋은 것이 청년에게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청년들 또한 진보 개혁 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해야 할 때다. 늙은 진보의 편에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대신, 비난받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적 이해관계를 더 명확히 드러내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대립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 스스로 감히 생각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72109495&code=990100&s_code=ao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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