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9

[별별시선]청와대로 가지 말자

요즘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2008년의 나는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는데, 그럴 때마다 큰 아쉬움을 느꼈다. 왜 우리는 저 버스를 당장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이렇게 평화적인 투쟁에만 집착하고 합법적인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을까.

반성이 시작된 것은 비슷한 시기 태국에서 벌어진 사태 때문이었다. 노란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나서서 정권이 뒤집히면, 이번에는 빨간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정부를 끌어내린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군부는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갔고 태국의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내려앉은 상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수많은 나라에서 민주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좌초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규모 시위가 폭동으로 이어지고 정권이 뒤집히면서 민주적 권위가 쇠약해지면, 군부가 총칼로 안정을 제공한다. 당장 경제 성장을 원하는 중산층은 일단 군부를 지지한다. 하지만 중산층은 서서히 더 많은 자유를 찾아 군부가 아닌 민주 세력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 시점, 다시 말해 1987년에, 성공했다. 물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의 두 축이 견고하게 버텨냄으로써, 그중 한쪽이 군부와 살림살이를 합치는 역사적 퇴행이 벌어졌을 때에도 민주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가 1 대 1로 맞붙는 경우, 민주화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급속하게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선거로 뽑혔지만 군부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압살한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12월5일로 예정된 제2차 민중총궐기에 2008년 촛불시위의 기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뜨거운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다. 큰 집회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경찰과 맞서지만 세상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대규모 집회를 통해 ‘세력 과시’를 하는 일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매번 집회가 열릴 때마다 마치 정해진 식순처럼 경찰버스를 훼손하고 캡사이신 섞인 최루액을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적당히 늦은 시간이 되면 집에 간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가 나오고 경찰의 폭력이 벌어지지만 여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7년째다.

설령 어쩌다가 경찰 버스를 뛰어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을 개척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청와대로 가서 대체 뭘 어쩔 것인가? 대통령이나 그 외 중요 인사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시위대는 경찰의 주장대로 ‘폭도’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청와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반면 그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쪽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대규모 집회를 조직해 세력을 과시하지 않으면 단 한 번의 눈길조차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집회가 커지고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면 모든 언론은 일제히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다. 결국 지금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목소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상대가 짜놓은 외통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않는 것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외신 기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우리 스스로의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더 많은 국민들에게 시위의 쟁점들을 알리고 지지를 끌어내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청와대로 가지 말자. 대신 방향을 돌려,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 2008년 촛불시위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시위대의 방향을 불타버린 남대문으로 돌리면서 한 연설의 내용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단 한 명의 권력자 대신, 수많은 이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행동을 이끌어낼 해법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입력 : 2015.11.29 20:56:16 수정 : 2015.11.29 21:02: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11292056165#csidxdce0acec71fddcda0123b58627a3766

2015-11-19

[북리뷰] 미셸 우엘벡이 말하지 않은 것들

복종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1만4500원

지난 1월 7일, 파리에 위치한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실이 공격당했다. 그 상처가 아물어가나 싶었던 11월 13일 다시금 대형 총기 난사 및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11월의 파리 테러에서는 총 132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을 당했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 사건이 벌어지던 날,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 현지에서 출간되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우엘벡의 친구 한 사람이 당일 IS의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은 세계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혹은, 더 큰 분기점이 될 이번 파리 테러의 전주곡과도 같다. 그 충격 속에서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2년의 프랑스. 소설 속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장 마리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과, 힘을 잃고 표류하는 사회당, 그리고 모하메드 벤 아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이끄는 이슬람박애당이 대선을 앞두고 3파전을 벌인다. 1차 투표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국민전선이 1위, 그리고 이슬람박애당이 2위를 기록한 것이다. 사회당은 정권을 얻기 위해 이슬람박애당과 손을 잡아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들은 장관 자리의 절반, 알짜배기인 재정부와 내무부 등을 넘겨받는 댓가로, 이슬람박애당에게 교육과 결혼에 대한 권한을 넘겨준다.

교육과 결혼. 어찌 보면 비교적 사소한 것 같지만 그 함의는 실로 깊고 중대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를 만나 대화중인 프랑스의 정보 요원은 그 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니 지정학이니 하는 것들은 신기루일 뿐이에요. 아이들을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한다, 그것으로 얘기 끝이죠."(100쪽) 이슬람박애당은 대체 어떤 사회적 변화를 불러오려는 것일까?

"우선 이슬람은 어느 경우에도 남녀공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에게는 몇몇 전문과정만이 개방될 뿐이죠.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초등교육을 마친 뒤 가사교육 학교를 거쳐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극소수의 여자들만이 결혼 전에 문학이나 예술 공부를 이어가고요.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표본이죠."(101쪽)

대기업이 아니라 가족기업 중심으로 경제 체제를 바꾸고,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낸 후 가사수당을 지급하는 등, 우리가 알던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슬람박애당은 서서히 뒤흔든다. 실업률에 시달리는 가난한 남자들에게는 자영업자의 꿈을 불어넣어주고, 사회의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부유한 남자들에게는 일부다처제 도입을 통해 문자 그대로 '성 로비'를 벌인다. 모든 교육 기관이 이슬람 교육 기관이 된 탓에, 개종을 하지 않으면 교수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 프랑수아는 개종하고, 젊은 부인을 맺어주겠다는 약속도 받은 채, 다짐한다. "조금은 이런 식으로 몇 년 전에 내 아버지가 혜택을 입었듯, 내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삶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두번째 삶의 기회가 되리라."(363쪽)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도외시한다. 중년 남자 지식인을 화자로 삼고 있으면서, 중년 남자 지식인이 어떻게 종교화, 보수화 속에서 '태평천하'를 누리는지 신랄하게 풍자하기 위한 기법이다.

<복종>은 이슬람포비아를 느끼는 프랑스 사회를 바라보는 한 위선적인 중년 남성 지식인을 바라보는 우엘벡의 시각을 서사화해 담아낸 작품이다. 바로 그렇게 이 책은 남자 대학 교수의 눈을 통해 이슬람교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갈등 지점을 절묘하게 (비)가시화한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으로 남겨둔다.


2015-11-11

리누스 토발즈는 왜 리눅스를 GPL로 풀었는가?



잊을 만하면 RT되는 이 트윗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1991년 9월 17일, 나는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내가 올린 운영체계를 겨우 몇 명만이 체크하리라 생각했다. 그 운영체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특정 컴파일러를 설치하고, 새로 부팅하여 기존의 파티션을 제거하고, 나의 커널을 컴파일한 다음 셸을 작동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셸 작동이 나의 운영체제를 이용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운영체제의 소스 코드를 프린트해 보면, 그것은 1만 줄을 넘지 못했다. 글자 크기를 작게 하면, 1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물론 지금의 리눅스 코드는 1000만 라인을 넘고 있다.

운영체제를 배포했던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가 실질적으로 무엇인가 만들었다는 것, 단지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상에서는 입소문이 순식간에 번진다. 섹스든 운영체제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사이버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많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지며 날조되게 마련이다. 나의 운영체제 구축에 대한 입소문이 무성해졌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자, 보시오. 내가 실질적으로 거둔 성과요. 나는 당신들을 속이지 않았소. 여기 내가 이룬 성과들이 있소……."
리누스 토발즈, 데이비드 다이아몬드, 안진환 옮김, 『리눅스 그냥 재미로 』(서울: 한겨레출판, 2001), 140-141쪽. 강조는 인용자.

좋은 책인데 현재 절판이니 도서관 등을 통해 읽어보도록 합시다.

2015-11-10

아이유, 아동성애, 아티스트

1.

아이유는 새 음반에 수록된 곡 'Zeze'에서 작사가로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주인공인 제제를 소재로 삼아,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라던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등의 가사를 썼다. 그 음반의 엘범 아트에는 망사스타킹을 신은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아이유가 아동성애를 부추긴다, 아동성폭행 피해자를 도외시하고 있다, 기타등등 아동 인권과 관련한 온갖 악덕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난이 일순 쏟아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이어지는 중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대한민국은 아동학대에 전혀 민감한 나라가 아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학대 사례들을 빼놓고, 그냥 미디어에 반영되는 내용만 봐도 그렇다. 지난 10월 13일 SBS에서 방영된 <육룡이 나르샤>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남자 등장인물 '땅새'의 각성을 위해,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 연희가 강간당하는 장면이 버젓이 밤 10시 공중파 드라마에 나왔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동성애를 금기시하고 아동학대에 민감한 나라였던가? 아이유에게 아동성애 코드를 팔아먹는다고 손가락질하는 분들은, 아이유가 대놓고 '삼촌'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낼 때에는 뭐 하고 계셨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미성년자 강간 장면이 공중파 드라마에 나왔다. 고작 한 달 전 일이다. 'Zeze'처럼 은근한 암시를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는 안 나오던 분노가 왜 이제서야 치밀고 있는가?


2.

한국의 대중가요에서 미성년자 소녀가 남성들에게 스스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역사는 실로 유구하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이에요"부터 시작해야 할까?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것부터 이야기해보면 그렇다. 비교적 최근 임펙트 있게 다가왔던 것으로 박지윤의 '성인식'을 꼽아볼 수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 그대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 그대 기다렸던만큼 나도 / 오늘을 기다렸어요."

아이유의 기존 행보 역시 이러한, 명백히 아동성애에 가깝지만 대중적으로 별 논란 없이 받아들여지던 시선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이라며 고음을 높이고, "너랑 나랑은 지금 안되지"라며 소녀 아이유를 향한 '삼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굳이 아이유에게 '아동성애 컨셉'이라고 말한다면, 당신들이 아이유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던 그때야말로 '아동성애 컨셉'이 한창 꽃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아이유가 달라졌다. 전작 '모던타임즈'부터 서서히 '삼촌팬을 위한 소녀'가 아닌 무언가의 자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작 '스물셋'에 와서 드디어 논란이 불거졌다. 아이유에게 붙은 죄명은 뜬금없게도 아동성애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한도전의 무도가요제에서 레옹의 마틸다 컨셉을 하고 나왔을 때에는 아무 탈이 없었는데 말이다.


3.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어떤 아동성애'는 별 문제가 안 된다. 반면 '다른 아동성애'는, 실제로 아동성애인지 아닌지와는 큰 상관 없이, 지탄의 대상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한국어판을 낸 출판사에서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며 가상인물의 정신적 순결함을 항변하지 않나, 어떤 소설가라는 분은 아이유의 음반을 전량 폐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유의 아동성애 컨셉은 이미 한 차례 트위터를 포함한 소수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가 무도가요제에서 영화 '레옹'의 마틸다로 분장하고 나왔던 그때의 일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미성년자 여성을 향한 남자들의 성적 욕망'을 인식하고 그에 맞춰 차려입은 아이유를 보며, 몇몇 트위터 사용자와 네티즌들이 불만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지금과 달리 논란이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쁘기만 한데 왜들 저러냐'는 식의 비아냥 섞인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아이유가 스스로를 아동성애적 욕망의 대상으로 포장하여 내놓는 것은, 한국 사회의 도덕적 가이드라인과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혹시 모를까봐 하는 말인데 '레옹'의 마틸다는 미성년자다).

반면 'Zeze'의 가사와 앨범 아트 역시 소수의 네티즌들이 발견하고 불편함을 표현했는데, 이번에는 일이 커졌다. 음반이 나온지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논란이 시작되었고, 애초에 '아동성애'라는 금기 자체가 '할아버지가 고추 따먹는' 이 나라에서 과연 그렇게 굉장한 터부인가 싶기도 했으나, 출판사가 끼어들면서 논의가 한층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사안의 화제성을 놓고 보자면 음반의 수록곡 중 하나일 뿐인 'Zeze'는 무도가요제와 비교할만한 대상이 못 된다. 아동성애로 장사를 한 게 문제라면 논란은 마틸다 코스프레를 할 때 일어났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그러한 종류의 페도필리아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과 그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국 그 차이는 아이유가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놓았느냐, 아니면 제 손으로 쓰는 가사의 '창작자', 즉 어떠한 종류의 주체로 내세웠느냐에서 갈라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젊은 여자 가수 아이유가 자신을 소아성애적 욕망의 '대상'으로 내놓는 것에는 대한민국의 윤리 의식이 발작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4.

아이유에게 잘못이 있다면 단 하나, 성적 욕망의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이유는 지속적으로 '아티스트'를 지향하는 자기 자신을 내세워왔다. 작사와 작곡에 참여하고, 이번 음반은 자신이 프로듀서로 나섰고, 지난 음반에는 음악계의 '선배님'들을 모셨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아동성애 논란이 벌어졌다. 아이유가 노골적으로 마틸다 코스프레를 하며 아동성애 컨셉을 '팔아먹고' 있을 때에는 없던 일이다. 왜일까? 그 아동성애 컨셉을 '소비하던' 대중들에게, 어린 소녀에게 나이 많은 남자가 성욕을 느끼는 것은 사회규범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처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유가 'Zeze'의 가사에서 사용한 은유와 상징들은 어딘가 어설프고 아귀가 안 맞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년을 향한 성인 여성의 욕망인 것처럼 해석되더니만, 난리가 나고 있다.

'Zeze'의 은유는 덜컹거린다. 결국은 밍기뉴라는 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제제라는 소년의 순수함과 영악한 욕망이 오가는 어떤 지점을 잡아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아이유의 목표대로라면 밍기뉴를 넘어서 결국 그가 해석한 제제에게 힘이 확 실려야 하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화자인 밍기뉴가 '성인 여성'이라는 혐의에 힘이 실렸고(꼭 그러라는 법은 없을텐데. 소설에서 가상의 친구인 밍기뉴와 뽀르뚜까 아저씨는 모두 남자 아니던가), 가수로서 지금까지 아동성애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아이유가 순식간에 아동성애적 욕망의 '주체'로 둔갑해버렸다.

동녘출판사의 단호한 입장과 달리, 모든 창작물은 발표되는 순간부터 해석의 무중력 속에 던져진다. 누가 그 작품을 보고 무슨 식으로 읽어낼지 창작자는 미리 다 알 수도 없고, 물론 어떤 효과를 노리기야 하겠지만, 그 결과를 일일이 통제할 수도 없다. 대중이 'Zeze'의 가사에 아동성애의 혐의를 씌우는 것 자체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머리에는 떨쳐낼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가령 조영남은 작품 활동을 넘어 현실의 생활 속에서 별별 '금기'를 다 넘나드는 행보를 보이면서도 '아티스트로서의 면책 특권'을 십분 누리며 살아간다. 반면 아이유는 현실 속에서 아동성애는 커녕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장기하와 연애하며 근면 성실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아이유에게는 조영남에게 허락되는 것과 같은 '아티스트 면책 특권'이 반에 반도 부여되고 있지 않은가?


5.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한, 대한민국은 아동성애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남자들은 '산삼보다 몸에 좋은 고3, 고3보다 몸에 좋은 중3' 같은 소리를 시시덕거리고 있다. 아이유는 그런 욕망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면서 슈퍼스타가 되었고, 지금은 그렇게 스타로서 쌓아올린 자산을 차분히 매각하며 아티스트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빚는 중이다.

아이유의 새로운 행보를 두고, 대중들은 자신들이 소비해왔던 아동성애적 기호들을 새삼 '발견'하며 분노한다. 그러한 해석은 아이유의 의도를 넘어, 스물셋이 된 아이유가 다섯 살짜리 소년 제제에게 '어른의 놀이'를 가르치려 든다는 식의 망상으로 뻗치고 있는 것 같다.

아이유가 '아동성애' 컨셉으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왜곡했다는 대중들의 분노는, 바로 그 아이유를 상대로 같은 욕망을 불태웠던 스스로에 대한 알리바이 만들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나라에서 진정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어린 여자를 향한 나이 많은 남자의 성욕이 아니라, 여자가 감히 욕망의 대상에서 벗어나려 드는 것 뿐이라는 현실이 폭로되고 있는 중이다. 아티스트 아이유의 건투를 빈다.

2015-11-04

[북리뷰] 남성 과잉 사회? 여성 혐오 사회!

남성 과잉 사회
마라 비슨달, 현암사, 1만8천원

<사이언스>의 중국 특파원인 저자는 10대 시절을 아시아에서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중국사를 공부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비슨달의 어머니는 이혼 후 홍유라는 이름의 중국인 하우스메이트와 함께 일종의 공동 육아 체계를 구축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그는 자라면서 중국어를 배우고 마침내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여자와 남자가 평등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꿈을 품고 말이다. "마오쩌둥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에 갈 때까지 나는 그 말을 믿었다."(9쪽)

그가 유학 시절 목격하고, 다시 기자의 신분으로 돌아간 중국의 하늘은, 그러나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어느 교실에 가도 남학생들이 여학생보다, 자연 성비를 넘어 월등히 많은 현상이 목격되었던 것이다. "내 어머니의 아이이자 홍유의 아이였던 나는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처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12쪽)

우리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재의 30대가 가장 극심하게 겪고 있는 성비 불균형이 바로 그것이다. "1989년 한국에서 성 감별 열풍이 한창일 때 첫아이의 성비는 거의 정상 수치인 104였지만 둘째의 출생 성비는 113, 셋째는 185, 넷째는 209였다. 한 부부가 딸보다 아들을 낳을 확률이 1대2를 넘어선 것이다."(50쪽) 남자는 많고 여자는 없는 사회, 남성 과잉 사회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남성 과잉 사회, 혹은 여아 집단 선별 낙태가 벌어지게 된 이유를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부터 조명한다. 성비가 무너진 나라에서는 태아 선별 낙태 기술이 도입되기 전부터 태어난 여아를 살해하곤 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화하던 초기부터 발견된 바, "120만 명이 거주하는 한 정착지에서 매년 약 2만 명의 여아가 죽는 것으로 나타"(99쪽)나기도 했던 것이다. 1960-1970년대 미국의 대중들을 사로잡은 '인구 폭탄'에 대한 공포가 그 위에 불을 붙였다. 프린스턴 대학의 식물학자 폴 에를리히가 쓴 책 <인구 폭탄>이 200만 부 넘게 팔리면서, 무지막지하게 불어난 인구, 특히 아시아인들이 미국으로 넘어올 것이라는 대중적 공포가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초음파 검사기가 양산 후 보급되기 시작했다. 1억 6천만 명이 넘는 여아들이 '사라져'버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량학살의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성비가 무너진 사회의 성차별적 문화보다는, 인구 조절과 통제라는 대의를 내세우고 여아 선별 낙태를 방조하거나 심지어 지원한 미국의 정책과 과학자들을 향한 비난에 더 큰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같은 기술이 서구와 아시아에 동시에 보급되었을 때, 유독 아시아의 성비만이 크게 균형을 잃었다는 것은, 이 문제가 기술 차원의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술 보급 전까지는 태어난 여아를 죽이던 문화권에서, 이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미리 '처리'해버린 후, 수십년 후 자기 아들이 장가가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며 한탄하고 있다. 저자와 달리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문화권 속에 살고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를 내야 마땅하다.

여성 혐오는 남성 과잉의 원인이다. 남자들이 '결혼 시장에서 소외되어' 여성 혐오를 한다는 설명은, 그 남자들에게 감정이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는 해주겠지만,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여아 살해 풍습이 신기술을 만나 폭발하는 매커니즘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 야만을 직시하라. 그래야 문제가 보이고, 올바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5.11.17ㅣ주간경향 115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1-02

[별별시선]국민은 선진국, 대통령은 후진국

요즘 반성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레고리 헨더슨이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간파한 바와 같이 이 나라는 초중앙집중적 1극 사회이며 그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다. 그러므로 ‘에이,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나라가 회까닥 뒤집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그러한 퇴행적 변화를 진정으로 바라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개인적 숙원 사업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에, 교육부 관료들은 알아서 기는 쪽을 택한다. 문제는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로 시행되고 있는 이 사업이, 해방 후 70년간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염원해온 공통의 의지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념과 진영을 막론하고, 시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모든 한국인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의 대립 구도를 검토해보자. 이것은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쪽에 방점을 찍을지를 놓고 벌어지는 입장 대립이다. 발전된 산업국가를 만드는 것이 먼저인지, 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를 만드는 게 먼저인지가 논점일 뿐이지, 양자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선진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선진국을 만들자. 해방 후 70년, 대한민국이 품어온 가장 근본적인 목적의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선진국인가?’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갈라졌다. ‘어떻게 선진국을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의사결정과 집행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가치를 잠시 접어두자는 것이 산업화 세력의 논리인 것이다. 반대로 민주화 세력은 민주적인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이 나라가 더 이상 선진화의 길을 걷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대통령만은 다르다. 그는 ‘내 아버지가 독재자라고 욕을 먹는다면, 굳이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해방 이전, 개항 이후부터 한반도를 지배해온 선진화 아젠다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건 이 나라는 과거에 비해 더 나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직 박근혜만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높일 수 있다면 이 나라가 다시 후진국이 되어도 좋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40% 선에서 오가고 있음에도, 이것이 박근혜 한 사람의 문제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야권에서 갈등의 축을 ‘친일 독재 미화 반대’로 잡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착시 현상이다. 산업화 대 민주화의 대립을 고스란히 반복하면, 당연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력의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국정화에 찬성하지 않지만 야권의 정치적 레토릭에 동의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가 제기하는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이다. 그는 아버지 박정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온 나라의 수준이 후진국으로 떨어진다 해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한, 방글라데시, 수단, 터키 등 소위 후진국으로 여겨지는 국가들만이 선택하고 있는 그 길을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나갈 수가 없다.

국민은 선진국을 지향하는데, 대통령은 후진국으로 역주행한다. 박근혜는 해방 후 70년을 관통하는 선진국 건설의 의지와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정작 박정희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면서도 이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인물임에도 말이다. 조국 선진화의 길은 여기서 끝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부디 아버지의 명예를 올바른 방법으로 지켜주기 바란다.


입력 : 2015.11.02 20:48:40 수정 : 2015.11.02 2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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