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26

Boxing Day (from the OED)

The first week-day after Christmas-day, observed as a holiday on which post-men, errand-boys, and servants of various kinds expect to receive a Christmas-box. So also Boxing-night, Boxing-time.


1833 in A. MATHEWS Mem. C. Mathews (1839) IV. viii. 173 To the completion of his dismay, he arrives in London on boxing-day. 1837 DICKENS Pickw. xxxii. 343 No man ever talked in poetry 'cept a beadle on boxin' day. 1837 {emem} in Bentley's Misc. Mar. 296 The most turbulent sixpenny gallery that ever yelled through a boxing-night. 1849 G. SOANE New Curios. Lit. 317 The feast of Saint Stephen is more generally known amongst us as Boxing-Day. 1871 Hood's ‘Comic Ann.’ 59 It was the Saturday before the Monday Boxing Night. 1877 PEACOCK N. Linc. Gloss. (E.D.S.) Boxing-time, any time between Christmas-day, and the end of the first week in January. 1884 Harper's Mag. Dec. 9/1 In consequence of the multiplicity of business on Christmas-day, the giving of Christmas-boxes was postponed to the 26th, St. Stephen's Day, which became the established Boxing-day.

2007-12-11

투표권 거래에 관하여

투표권 거래에 관하여
2007년 11월 21일 수요일
-N. 그레고리 멘큐

오늘 아침 제프 미론과 나는 마이클 샌들의 정의론 강의에 초청되어, 자유시장의 사회 내 역할에 대해 토론했다. 그 말미에서, 샌들 교수는 매혹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요악하자면),그것은 “만약 당신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그렇게 자발적인 교환을 선호한다면, 당신은 그 결론을 사람들이 그의 투표권을 다른 이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들이 거래에 찬성했다면 양 정당이 그 교환관계 속에서 서로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부효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구속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에 대한 일반적인 논증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그의 투표권을 판매할 때, 그 교환은 선거 과정에 의해 관련되지 않은 제3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내가 생각했던 사례를 여기에 제시하겠다. 그들 각각에게 3달러의 세금을 물리게 될, 9달러짜리 공공재의 제공 여부를 결정하는 세 명의 유권자를 상정해보자. 엔디는 그 공공재가 8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는 반면, 벤과 칼은 그것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다수자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벤과 칼은 반대하고, 그 공공재는 제공되지 않는데, 그것은 [경제학적으로] 효율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엔디가 벤의 투표를 4달러에 구입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는 그 계획이 확실히 통과되도록 할 수 있다. 엔디는 (8달러의 이익에서 3달러의 세금과 4달러의 투표 구입 가격을 뺀) 1달러만큼의 이익을 얻고, 칼은 (세금으로 나가는) 3달러를 손해 보게 된다. 엔디와 벤의 투표 거래는 칼에게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앤디의 가치 평가를 8달러에서 10달러로 높이는 식으로) 사례에 등장하는 투표권 판매의 효용을 높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투표권 매매가 늘 효용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사례를 드는 이유는 오직 외부효과의 존재를 충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자발적인 거래가 낳는 이득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은 민주주의적 투표의 광범위하고 복잡한 상황에 즉각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업데이트: 마이클 샌들이 내게 이 포스트에 대한 코멘트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가 그 거래에서 이득을 볼 수 있더라도, 그러한 교환은 외부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투표권을 사거나 파는 일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맨큐 교수는 주장한다. 우리가 투표권 시장을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결론에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외부효과의 발생이 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어떤 후보나 정책을 지지할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 또한 외부 효과를 발생시킨다. 하지만 정치적 설득마저도 금지해야 한다고 맨큐 교수가 말할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그들 각각에게 3달러의 세금을 물리게 될, 총 9달러의 비용이 드는 공공사업의 시행 여부를 세 명의 유권자가 결정하고 있다. 엔디는 그 사업이 8달러의 값어치를 한다고 평가하지만, 벤과 칼은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책이 공립학교를 위한 세금 부과라고 가정해보자. 두 명의 아이를 공립학교에 보내고 있는 엔디는, 이 세금 증가를 매우 선호한다. 반면 벤과 칼은 모두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지 않은데, 이것은 그들이 학급 규모를 줄이고 학교 도서관을 개선시키며 과학 실험실을 혁신하는 등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는 일에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제 공동체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직접적으로 혜택을 보는 자녀들을 데리고 있건 그렇지 않건, 공립학교의 질에 대해 자신의 역할을 지니고 있다며 엔디가 벤을 설득한다고 가정해보자. 잘 교육된 시민정신은 더욱 건강한 지역 경제 창출에, 혹은 더욱 건강한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벤이 믿게 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그는 그저 훌륭한 공립학교들이 이 지역의 부동산 시장을 촉진시켜서 그의 재산을 늘려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d있다. 이제 그는 그 추가 과세를 통한 정책의 가치를 4달러로 추산한다. 그것은 그가 지불해야 할 3달러의 세금보다 많기 때문에, 그는 추가 과세에 찬성하러 가는 엔디와 합류하게 된다.

추가 과세가 낳는 이득에 설득되지 않고 있는 칼은, 그에 반대하는 표를 던지고 선거에서 패배한다. 그의 세금은 그가 그만큼 가치 있다고 보지 않는 정책 때문에 3달러 높아진다. 엔디가 벤을 설득하는 것은 칼에 대한 부정적인 외부 효과를 낳는 것이다.

이러한 예시는 멘큐 교수가 제시했던 투표권 판매에 반대하는 이유, 즉 제3자에게 외부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엔디가 벤의 투표권을 구입하건 설득을 통해 얻어내건, 칼에게 미치는 영향(즉 “부정적 외부효과”)은 같다. 두 경우 모두, 칼은 그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주었을 한 표를 잃고, 3달러의 세금도 낸다. 그러므로 멘큐 교수가 정치적 설득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 한, 칼에 대한 부정적인 외부 효과는 왜 투표권 거래가 금지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무단 번역. 원문은 여기에.

2007-12-08

www.freerice.com

판타스틱에서 청탁받은 특집 원고를 마무리짓기에 앞서, 최근 발견한 재미있고 유익한 사이트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영어 단어 문제를 맞추면 저개발국가에서 기아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쌀 20톨이 기부되는 프로그램인 FreeRice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를 풀 때마다 바뀌어서 나오는 베너 광고 수익이 100% 자선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엔식량개발을 통해 분배된다고 하니 신뢰도에 대한 걱정은 붙들어매도 좋을 듯 싶다.

문제를 맞추면 레벨이 올라가면서 더 어려운 어휘가 나오고, 반대로 틀리면 레벨이 낮아지면서 쉬운 단어가 출제되는데, 틀린다고 해서 이미 기부한 쌀 뺏는 거 아니니 부담 갖지 말고 풀도록 하자. 참고로 나는 계속 10~12레벨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는 반면, 내 여자친구는 어려운 것들을 연달아 풀더니 35레벨까지 올라갔다고 자랑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부된 쌀알의 갯수는 6,890,866,390톨이다. 우리 모두 동참합시다.

2007-12-04

펀드 시대의 경제 기사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위기가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경제적 파장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기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우려의 표시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작은 움직임이라도 발생할라치면 즉각 중앙일간지나 경제신문들이 마치 한국 경제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대던 기존의 보도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예전같았다면 '미국발 경제 위기, 한국호 침몰하는가!' 따위 타이틀이 적어도 두 주일 정도는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것이고,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이 대선의 주된 쟁점으로 떠올랐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식의 움직임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이는 최용식이 경제 역적들아 들어라에서 내놓았던 진단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중동의 저주로 인해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조중동과 양대 경제신문들은 경기의 회복 여부에 대해 함부로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거나, 그것을 거창한 레토릭으로 포장하여 '아젠다'를 설정하거나 하지 못한다. 이것은 상당히 유의미한 변화이다.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사람들이 은행에 저축을 하는 대신 증권사를 통해 국내 증시에 펀드를 통해 간접투자하는 시대가 열림에 따라, 주가로 표현되는 경기의 실제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함부로 경제가 죽어가고 있다는 식의 표현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계층별 소득 격차는 한없이 늘어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소득층의 실제 구매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위기'라고 함부로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한국 경제에 대해 말하자면 분명히 그렇다.

요컨대 펀드 시대는 경제 기사에 최소한의 냉철함과 이성을 가져다주었다. '조선일보는 반민족적인 친일 신문이다'라는 말보다, '조선일보 보고 투자하면 돈 잃는다'라는 속설이 그 신문의 경제면을 교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안티조선의 초창기에 그 운동의 지지자들은 조선일보를 '봉건적인 신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르크스가 옳다. 그들이 지적하던 조선일보의 어떤 속성은, 최근 급격하게 금융화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에 따라 와해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의 의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언론운동이 특정한 정치 세력의 지지 운동으로 전락한 다음, 그것이 추구하던 최소한의 가치마저도 결국 '투자자'들의 수요로 인하여 성취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시민적 영역과 역량이 극도로 미비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을 뿐이다. 안티조선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시민사회의 언론에 대한 개입이 이 지점에서 멈춰서지 말아야 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자본주의에 휩쓸려 성취되는 민주주의의 과실은 결코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정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더욱 그렇다.

2007-11-23

찍을 사람이 없다고?

BBK 의혹의 사실 규명이 눈앞에 다가오고, 그에 따라 '대세'였던 이명박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과 맞물려, 민주노동당에 호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지만 권영길과 그의 주위를 둘러싼 특정 정파를 혐오하는 이들의 고뇌가 깊어지고 있다. 문국현을 포함한 '범여권' 후보들이 하나같이 선택지로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내기는커녕 비웃음의 대상 정도로 전락해버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권영길이라는 것은, 다소 오버스럽게 말하자면 역사의 비극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고민한다. 그냥 꾹 참고 권영길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표한 상태에서 기권을 할 것인가.

이 문제에서 내가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찍을 사람이 없다는 식의 주장이 지니고 있는 고답성에 대한 것이다. 나의 주변 가까운 사람 중 하나가 민주노동당 경선 이후, 즉 심상정이 주사파의 조직표 2000장에 의해 결선투표에서 고배를 마시고 난 후 문국현 지지로 돌아서며 한 말이 바로 그와 같았다. 자신의 표를 권영길 그 버럭영감에게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번 경선 과정에서 권영길과 그 주변 정치 세력들이 보여준 모습은, 예상할 수 있는 바였지만 바로 그렇기에 보는 이를 속 터지게 했다. 그렇다. 솔직히 찍을 사람이 없긴 하다.

김대중이 4수 했다는 말로 자신의 노욕을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영길과 이회창은 심지어 공통점을 지니기까지 한다. 이번 대선에 나와서는 안 되었을 후보가 둘 있다면 바로 그들인데, 그들은 전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그릇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에는 너무도 극단적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점마저도 흡사하다. 경제 일변도로만 흐르는 현 대선 정국에 일갈을 가했다는 점에서는 이회창의 정치적 감각을 칭찬해줄만 하지만, 햇볕정책의 번복을 당연히 포함하는 강경한 대북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극우파이며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는 선택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명박을 떨어뜨리기 위해 조갑제가 몸소 나서서 특종을 낚아왔다는 것만 봐도 정통 극우파들이 이회창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이내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선 시작하기도 전에 대통령이 되었다가 후보 등록일 이전에 탄핵당할 것만 같은 이명박은 애초에 '찍을 사람'으로서 고려 대상이 아닐 것이고, 갑자기 나타난 이회창에게 지지율 파먹히는 정동영이 가지고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역량 한계도 너무도 명백하니 그에게 표를 준다고 해서 그게 사표가 아니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참여정부의 공과 과를 모두 계승하겠다는 말은 현 시점에서 볼 때 정권재창출을 하지 않겠다는 솔직한 자기고백으로 해석되지 않는 한, 너무도 뻔뻔한 표 구걸일 뿐이니 그에 대해서는 이 이상 특별한 고찰을 하지 말기로 하자. 그러면 이제 남는 것은 전 유한킴벌리 회장 문국현이다.

처음 언급한 대로 '찍을 사람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민주노동당 친화적인 유권자들이 선택지로 삼곤 하는 인물이 바로 문국현이니, 결국 이 글은 찍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문국현을 지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논증하기 위한 것이 된다. 우선, 훌륭한 기업가를 뽑아놓으면 한국에 훌륭한 기업 문화가 정착되고, 성공적인 중소기업 사장을 대통령으로 만들면 중소기업이 알아서 육성되리라는 발상이 얼토당토 않다는 논박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문국현이라는 CEO가 '잠재성장률' 개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이명박의 747 플랜에 맞서 8% 성장률 달성 같은 구호를 내걸었다가 숱한 블로거들로부터 빈축을 샀다는 점도 여기서는 논하지 말기로 하자. 요컨대 자신이 표방하는 바를 다 구현하지 못해도 상관없고, 경제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 있어서 (현직 대통령처럼) 무지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잘 모른다는 사실마저 모르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문국현을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유는 문국현이 단일화를 통해 범여권의 후보로 추대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이명박이 낙마하고 박근혜가 이회창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햇볕정책을 철회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너무도 높아 보인다고 쳐보자. 그 시점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은 창조한국당과 또 한 번의 대통합을 성사시키고, 어찌어찌 역사의 주사위가 야바위처럼 굴러가서 문국현이 단일후보로 추대되었다고 쳐보자. 이런 식이라면 나도 문국현 지지자들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대북정책의 기조가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대한민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정세를 놓고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국현 본인은 절대 단일화에 뜻이 없다고 공언하고 있고, 허지웅의 경우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문국현 지지자들은 문국현이 '기존 정치판'의 난잡한 질서에 '단일화' 따위를 통해 포섭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논조를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길게 보고 문국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문국현 지지는 큰 난점에 부딪친다. 설령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오늘의 문국현이 킹왕짱 후보라고 하더라도, 5년 후의 문국현이 지금의 그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다 아는 그 부산 사나이의 경우를 짚어보자. 현재 불거지고 있는 삼성 비자금 문제에 있어서 특검법 통과를 가장 단호하게 반대하는 집단이 바로 청와대이며, 대통령 노무현은 부산에서 낙방하던 시절부터 삼성의 관리 대상 중 일부였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회의원 지망생이 자신의 사무실을 유지하며 정치 조직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한 개인이 노동을 통해 벌 수 있는 것을 훌쩍 뛰어넘는 금전이 요구된다. 상근자들에게 월급을 100만원씩만 준다고 해도, 다섯 명이면 500만원이고 1년이면 6000만원이 들어간다. 군 의원의 경우가 이런 수준이고, 전국 단위의 대선을 노리고 있다면 그 비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단적인 예로 현대의 왕회장 정주영도 개인적으로 당을 만들어서 대선을 치르려고 했는데, 그 짓 하다보니까 현대그룹이 통째로 삐걱거렸다.

문국현 지지자들의 현실 감각과 이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충돌한다. 그들 또한 문국현이라는 정치인의 정치 생명이 대선 이상 연장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TV광고 한 번 할 만큼의 돈도 없다고 괴로워하는 문국현 홈페이지의 호소문이 괜히 올라와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문국현이 이번 대선을 깨끗하게 통과하고 다음 대선을 노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희망'의 허황됨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문국현 순수주의자'들의 나이브함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한국 정치의 현실을 바꾸자고 하면서, 이렇게 철저하게 현실을 도외시하는 지지자 무리를 우리는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다.

문국현은 '빤짝 스타'로서 대선판을 잡아먹을 정도의 야수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이에 대해서는 김수민이 쓴 이 글을 참조하라).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지탱해줄 수 있을만한 조직이 없기 때문에, 다음 대선까지의 그 오랜 세월동안 깨끗한 신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곱게 지키고 있을 수도 없다. 한국 정치의 현 상황이라는 거대한 기근 앞에서, 문국현은 그저 한 점의 생선회와도 같은 정치인일 뿐이다. 그거 한 점 집어먹는다고 배가 부를 리 만무하지만, 지금 소비하지 않으면 곧 상해버릴 수밖에 없다. 얼려놓고 어쩌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자신을 중도세력이라고 믿는 많은 이들이 좌파들에게 늘 하던 말을 이제 돌려줄 때가 왔다. 문국현을 찍는 것은 그만큼의 사표를 만드는 일일 뿐이다.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이인제 사표와 같은, 역사적 역효과를 낼 수도 없는 그저 사표로서 사표일 뿐인 그런 사표가 바로 문국현 지지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국현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한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문국현에게 '투자'한다는 등의 메타포를 즐겨 사용한다. 하지만 문국현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문국현 자신조차도 종종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한미 FTA에 대한 그의 입장은 무엇인가? 달러화 약세로 대변되는 세계 질서의 개편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문국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그 잘난 '사람중심 진짜경제' 말고 문국현이 가지고 있는 정책적인 틀거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 후보의 '사상'에 대해 장기적인 투자를 하겠다는 것이 문국현 지지자들의 논리이지만, 본래의 개념상 장기투자는 자신이 잘 아는 우량기업에 대해 하는 것이지 어디서 듣보잡 컴퍼니의 투자설명회 듣고 와서 집문서 밀어 넣는 그런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문국현 또한 '찍어줄 사람'은 아니다.

찍어줄 만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는 이 대선 정국을 확인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찍을 사람이 없다'는 담론의 성격에 대한 본래의 고찰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굵은 이데올로기적 장애물이었다. 정당정치의 실패가,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떨어지자 독자 출마하여 한나라당을 말아먹은 이인제를 낳았고, 그러한 이인제짓을 막기 위한 공선법, 흔히 말하는 '이인제법'을 낳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제에 당한 이회창에게 다시 이인제짓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최장집의 분석은 언제나 그렇듯이 너무도 타당하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원동력이 바로 '찍을 사람이 없다'는 궁시렁거림에 있다는 것이다.

정당정치를 지지하고 싶다면, 비록 후보자의 개인적 성격이 매우 강력하게 드러나는 대선 정국이라 하더라도,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 비록 그 정당이 자신이 바라는 이념적 지향을 100%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키신저의 말마따나, 그 100%의 이상으로 향하기 위한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현재 한국의 우파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이회창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6~70대의 반공주의자들. 이명박을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4~50대 경제주의자들. 그리고 범여권을 두루 포괄하는 3~40대 '386 세대'들. 이들이 한국 정치의 모든 지분을 셋으로 나누어 가질 수 없도록, 최소한의 좌파 정치의 몫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우나 고우나 일단 민주노동당을 찍어야 한다. 심상정이 후보 경선에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을 찍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박근혜를 지지하고 있지만 눈물을 머금고 이명박을 찍어주겠다던 한나라당 지지자들만도 못한 당 충성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탈당을 참고 있는 심상정에게 당을 깨라고 종용하는 이들의 정치적 IQ는 과연 얼마나 될지 너무도 궁금하다. 그들은 심상정을 박근혜만도 못한 정치인으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경선에서 졌다면 경선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경선에 승복했다면, 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경선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자신이 실천하지 못하는 정당정치를 오직 거시적인 차원에서만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정치적 요구라고 할 수 없다. 한국에 정당정치가 뿌리내리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면, 일단 민주노동당의 경선 결과에 승복하는 최소한의 연습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권영길이 싫다. 나도 주사파를 혐오한다. 주사파와 손을 잡은 권영길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민주노동당에 우호적인 대부분의 상식인들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 정당정치가 뿌리내리기를 희망하며, 우파가 급격한 세포 분열을 거듭하며 자신의 정치적 지분을 공고히 해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 좌파 정치가 성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영역이 지켜질 수 있기를 진정으로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의 선택은 명백하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나는 심상정이 후보로 나섰다가 떨어진 민주노동당을 찍겠다. 그것이야말로 심상정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이며, 아주 큰 그림을 놓고 볼 때에도 유익하고 건전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택할 수 있는 정치적 행로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