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28

삼성 직원들이 이건희를 납치한다면

프랑스에서는 요즘 '보스내핑(Bossnapping)'이 새로운 시위 문화로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보스내핑이란 상사(Boss)와 납치(Kidnapping)의 합성어이다. 프랑스의 간지나는 노동자들은 촌스럽고 구질구질하게 손에 기름 냄새 묻혀가며 화염병 만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측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회사 사장을 회의실이나 사장실에 감금한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빨갱이 노동운동가들 중 그 누구도 검찰에 의해 기소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월 28일 현재가지 소니, 캐터필러, 3M, 미쉐린 등의 경영진들이 보스내핑당한 바 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 결과 3M은 인원 감축안을 재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소니 측도 실업수당에 대해 재협상에 들어갔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사장을 납치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 유럽 전체를 강타한 경제 위기와 그에 따른 구조조정은 해묵은 전략을 부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AP의 그렉 켈러(Greg Keller)는 보도하고 있다. 물론 직원들이 사장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납치되어 있었던 3M의 매니저 뤽 루슬리(Luc Rousselet)는 기자들에게 "다 괜찮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잘 먹고 잘 쉬고 있었다.


"납치?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우걱우걱..."
(보스내핑당했던 3M의 매니저 뤽 루슬리의 실제 감금 상황, Getty)



이러한 비상식적이며 반사회적인 노동쟁의에 대해, 프랑스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찬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달 시행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보스내핑을 포함한 반사회적 노동쟁의에 대해 응답자 중 55%가 '정당하다'는 입장을 표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는 보스내핑에 대해 단 한 건의 기소도 없었다.

'법의 원칙'만을 놓고 보자면, 아무리 서로 원만하게 감금하고 있다 해도, 납치는 납치고 감금은 감금이다. 형법학 교과서에서는 누군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방문을 걸어잠궜다가 열어줬더라도 감금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학설을 가르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명백한 범법행위도 사회적으로 '용납'되고 있는 것이다. 회사에 대한 노동자들의 협상력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4월 14일 고려대는, 2006년 출교 조치를 당했다가 2년 만에 법원의 판결을 통해 복학했던 고려대학교 학생 7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출교와 퇴학 조치로 인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기간을 무기정학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 고려대의 입장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졸업한 학생들에게도 그 처분을 소급해서 적용한다는 것이다. 빛나는 졸업장을 도로 뺏어서 끝내 찢어야 속이 후련하겠다는 심산이다.

이 학생들이 2006년 출교 처분을 당했던 이유도 넓은 의미에서 '보스내핑'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고려대 병설 보건대학생회의 총학생회 투표권 인정 등을 요구하다가 보직교수 9명을 가로막고 17시간동안 농성을 벌인 것이다. 교수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강제로 박탈당했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느냐를 놓고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그들이니만큼 '보스'로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지닌다고 볼 수도 있고, 학교측은 이 행위를 통해 교수들이 이동할 수 없게 된 현상을 '감금'이라고 해석했으니, 이 사건을 일종의 보스내핑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대는 경찰에 그들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교칙상 존재하지도 않는 처분인 '출교'를 선포했다.

프레시안에 따르면, 이 출교생 7명중 6명은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에 대해 항의집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출교 처분은 바로 그에 대한 보복 징계로서의 성격이 짙다는 논란이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삼성의 눈치를 보느라 학생들에게 보복성 징계를 가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려대 자체의 '위신'을 위해 보복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길은 없다. 중요한 것은 이유야 어찌 됐건, 지금까지도 고려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복성 징계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득권층의 논리가 이렇다. 끝까지 분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거다.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는 대학생들이 이러할진대, 노동자들이 농담으로라도 '보스내핑'을 운운하는 것은 상상할수조차 없는 일이다. 삼성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도 않거니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이건희 전 회장을 납치한다면 이후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초를 겪게 될 터이다. 삼성 직원들이 이건희를 납치한다면,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어 그 노동조합 직원들을 전부 사살한다 해도, 놀랍지 않다.

'발랄한 시위', '상큼한 투쟁' 등을 약 5초 정도 고민해본 후에 '어때, 이 아이디어 죽이지?'라고 ㅋㅋㅋ거리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특히 『가난뱅이의 역습』의 출간과 성공에 고무받은 사람들이 소수 존재한다. 그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철저하게 '해프닝'에 관대하지 않은 나라라는 것 말이다. 대통령 자리에 올라 있는 누군가를 욕하는 것은 괜찮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권위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이명박이가 어쩌고 저쩌고 씹는 것은 일종의 '국민 레포츠'로 통용되고 있지만, 과연 누군가가 이런 짓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슬란드의 한 술집. 2009년 4월 25일. 전직 은행장들의 사진이 남성용 소변기에 붙어 있다.)
AFP PHOTO OLIVIER MORIN.



신자유주의적 금융정책을 밀어붙였다가 망한 나라 아이슬란드의 한 술집 풍경이다. 남성용 소변기에 경제 위기 주범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그 얼굴에 소변을 조준하면 변기 밖으로 튀지 않을 테니, 청결한 화장실 유지와 국민들의 분풀이를 동시에 행할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광경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1398일 뒤에 어딘가 술집 화장실에 그분의 얼굴이 붙어있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줄까, 아니면 '큰 물의'를 빚게 될까?

보스내핑을 저지르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처벌받지 않는 이유는, 프랑스 사회가 그정도 '해프닝'을 필요악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일부러 가두려고 한 것도 아니고, 문 걸어잠그고 밖에서 난리치다 보니까 감금이 되어버린 경우에 대해, 대학 당국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7명의 학생들을 쫓아다니며 일일이 복수를 하고 있다. '투쟁'의 여건이 완전히 다르다. 록뽄기를 불바다로 만들자고 외치며 전골을 끓여먹고 있으면, 경찰은 차량 소통에 방해가 된다고 전경들을 끌고와서 냄비를 뒤엎고 '가난뱅이'들을 방패로 밀어내고 찍어낼 것이다.

삼성 직원들이 이건희를 납치해서 서로 열 시간 정도 푹 쉬어준 다음, 원만한 합의에 도달하는 광경 따위 상상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이다. 한국에서 '해프닝'을 발생시킨다는 것은 종종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최근 발생한 사건을 통해 반추해보자면,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기획하고 고려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수방관하는 전략을 택하곤 한다. 의외의 사건을 통해 사태가 진전될 수 있을 원초적인 가능성은 이로써 더욱 줄어들었다. 그런 이들이 떠올리는 '엉뚱한 상상'은 십중팔구 중국산 기념품처럼 뻔하고 조잡하다.)

이명박 대 전체 국민의 구도를 상정하고, 그것을 몰상식 대 상식으로 놓는 것이 위험할 수 있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그 상식이 누구의 상식인가?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에서 '상식'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는, 그들 외의 사람들이 '몰상식'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들인 경우가 태반이다. 더구나 '우리는 상식을 위해 싸운다'라는 구호는, 일견 몰상식해보일 수도 있는, 하지만 투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거나 발생해야 하는 일탈 행위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명박산성에 스티로폼을 쌓고 올라가려고 할 때 '비폭력'을 외치던 얼간이들로 인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빼앗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이미 우리가 상식의 덫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위 선진국'에서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몰상식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유럽의 강소국 금융허브에서도, 경제 위기 후 내각의 성전환이 일어났고 변기에는 경제 개혁 전도사들의 사진이 나붙었다. 프랑스가 부럽다고만 하지 말고, 비상식과 일탈에 대한 그들의 똘레랑스를 진지하게 관찰해봐야 하지 않을까. '상식'을 붙들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전략이 되기 어렵다.

2009-04-15

에휴 진짜...

성공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 1784년 3월 3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가오는 사순절의 마지막 3주 동안 수요일마다 정기 회원들을 위한 연주회를 세 차례 가질 예정인데, 벌써 100명이 신청했고 30명의 추가 신청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쓴다. 그 밖에도 두 차례 음악회를 열 생각인데-이 모든 것을 위해 그는 '새로운 작품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전에는 피아노 레슨을 하고, 거의 매일 밤 귀족 저택에서 연주한다고 전한다. 그의 연주회 예약자들-우리는 일부 명단을 가지고 있는데-은 역시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1789년 7월 12일에 그는 미하엘 푸흐베르크라는 상인인 새로운 연주회를 예약했지만 신청자가 단 한 명, 즉 그의 매우 친한 친지인 판 슈비이텐 씨뿐이라 취소했다고 털어놓는다. 맨 꼭대기의 황제를 포함하여 빈 상류 사회 전체가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19)

19) 전환점은 아마 <피가로의 결혼>이었던 것 같다. 모차르트가 직접 골랐던 오페라의 주제는 절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적으로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 귀족은 그 당시 일기에 이 오페라를 관람했고 'ennuyiert'했다고 적고 있다.(Hildesheimer, 앞의 책, 199쪽) 이 말은 흔히 번역되듯이 '지루했다'가 아니라 '화가 났다'를 의미한다. [47쪽]


베토벤은 모차르트보다 15년 늦은 1770년에 태어났다. 모차르트가 헛되이 추구했던 것을 베토벤은, 설령 놀이하듯이 손쉽게는 아니라 하더라도, 별 힘 안 들이고 얻을 수 있었다. 즉 궁정 귀족의 후원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곡 의뢰인의 관습적 취향보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또는 더 정확하게는 그 목소리의 내재적 일관성에 충실한-곡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 베토벤만 해도 이미 음악 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모차르트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힘있는 고용주나 의뢰인을 위해 아랫사람이나 하인으로서 음악을 생산해야만 하는 사회적 속박을 벗어날 수 있었고, 생애의 대부분을 자유 예술가(현재 우리가 일컫는 용어로)로서 미지의 청중을 위해 창조할 수 있었다. 하나의 짧은 인용구가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1801년 베토벤은 친구 베겔러에게 이렇게 쓴다.

작품들은 내게 많은 수입을 안겨주었고, 만족할 정도보다 더 많은 주문이 밀려들고 있네. 한 작품마다 6명 내지 7명의 출판인들이 달라붙는데, 내가 좀 신경만 쓴다면 더 많은 작자들이 덤빌 걸세. 사람들은 이제 나와 흥정하려 하지 않네. 내가 요구하면 그들은 지불하지. 그게 얼마나 행복한 처지인지 자네는 알겠지…….


여기서 베토벤이 성취하였다고 의기양양하게 선언하는 것을 모차르트도 일생 동안 꿈꾸어왔다. 그가 좀더 오래 살겠다는 용기를 잃지 않았더라면 혹시 거기까지 도달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지배적인 사고 규범에 따라 우리가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도, 그가 좀더 넓은 층의 청중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31세의 나이에는 베토벤처럼 출판인들이 그의 작품에 달려들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일생에서 나타나는 그런 차이를 일차적으로 개인차로 돌리고 사회의 구조 변화에 기초한 설명을 무시하도록 강요하는 규범의 압력에 너무 쉽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 성공은 모차르트에게 그의 사후에조차도 부족하지는 않았다. 생시 그에게 결핍되어 있었던 것은 베토벤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고도로 발달한 출판활동이었다(동시에 초대 손님이 아니라 지불하는 청중을 위한 연주회 개최의 확산). 실로 "사람들은 이제 나와 흥정하려 하지 않네. 내가 요구하면 그들은 지불하지"라는 문장처럼 예리하게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에 일어난 결정적인 구조 변화를 밝혀주는 문장도 드물다. [59-60쪽]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trans. 박미애 (서울: 문학동네, 1999).
모차르트 - 10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문학동네



저는 술자리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로 대충 칼럼을 쓰거나 하지 않습니다. 제 말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다 근거가 있어요. 게다가 이런 짓을 몇 년째 하고 있어서 자료도 점점 누적적으로 증가하고 있답니다. 조테로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카드를 약간 꺼내서 보여드리는 거에요. 클래식을 잘 모른다고? 물론 그렇겠죠. 뉴비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니까. 하지만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모차르트의 삶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러니 깝ㄴㄴ 플리즈.

2009-04-14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결정적 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결정적 차이 (경향신문, 2009년 4월 14일)

빈의 중앙묘지에 가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묘지가 있다. 젊은 예술가들과 관광객들은 지금도 끝없이 그들의 위대한 음악에 꽃을 바친다. 하지만 베토벤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그의 묘지와 달리, 모차르트의 묘지는 일종의 기념탑에 가까운 것이다. 모차르트가 실제로 매장된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모든 빈 시민들의 슬픔 속에, 수천 명의 군중의 눈물과 함께 묘역에 들었다. 반면 모차르트는 아내의 냉대와 세상의 멸시 속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고작 15세. 둘 다 천재적인 재능과 초인적인 노력을 겸비한, 전형적인 ‘아웃라이어’이다. 그런데 왜 이리 두 사람의 말년은 확연히 차이가 났던 것일까?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유작 <모차르트-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통해 그 이유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당시는 귀족과 왕족 등 구 지배세력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동시에 시민계급의 힘이 성장하고 있던 일종의 전환기였다. 만년의 베토벤은 곡을 완성하는 즉시 대기하고 있던 출판업자에게 넘겨 악보를 출판했으며 그것을 통해 수입을 얻고 대중들과 직접 접촉했다. 반면 모차르트는 출판업자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요즘 말로 ‘초대권 손님’이었다. 돈을 지불하는 것은 그 손님들을 초대한 귀족이나 왕족이었다. 그런데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한 이후 귀족과 왕족들은 모차르트를 괘씸하다고 여기기 시작했고 그의 연주회에 발길을 끊었다. 우리가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봐 온 모차르트의 비참한 삶은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나버렸다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모차르트가 날개를 꺾인 이유였던 것이다. 예술은 정치적이다. 하지만 예술가가 정치적인 이유로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모차르트가 좀더 오래, 좀더 많은 작품을 써주었더라면 인류의 문화가 얼마나 더 풍성해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 모차르트와 인류의 문화에 대한 고민은 사치에 불과하다.

3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오페라합창단을 정식으로 해체했다. 이미 몇 차례의 해고가 있었고, 그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지만, 대통령이 바뀐 후 새로 취임한 이소영 국립오페라단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그는 “규정에 없는 합창단을 운영할 수 없다”며 해체를 통보했고, 결국 4월은 합창단원들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 되고야 말았다.

국립오페라단은 2002년 합창단을 만들고 단원을 뽑으면서 언제나 ‘상임화’를 약속해왔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없다. 그 희망이 없었더라면, 또한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없었더라면, 한국 최고 수준의 성악가들이 문자 그대로 ‘88만원 세대’로 살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부는 언제나 기대를 배신했고, 이제는 아예 합창단을 없애버렸다. 그 빈자리는 1년 계약직으로 충당하겠다고 한다.

18세기의 빈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서울에서 벌어지는 예술가의 비참함 역시 ‘높으신 분들’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다. 정은숙 전 국립오페라합창단 전임 단장은 노무현 정권의 유력 인사였던 문성근의 형수이다. 진작 합창단을 상임화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부는 계속 그들을 비정규직으로 유지했고, 결국 현 정부의 ‘노무현 지우기’와 함께 합창단은 소멸하고 말았다.

우리는 합창단원들에게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공연해달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모차르트의 비참한 삶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매주 수요일 문화부 앞에서는 시위 겸 콘서트가 벌어진다. 황사 섞인 모래에 성악가들의 성대가 상하고 있다. 이 카나리아들이 피를 토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문화부는 당장 협상에 나서라.

<노정태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2009-04-13

용산의 오줌

4월 5일 일요일. 맑은 날이었다. 용산역 CGV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려던 참이었다. 영화 시간에 맞추기 힘들 것 같아 택시를 탔다. 이태원에서 용산역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차량이 많았고 길은 막혔다. 용산역 바로 앞으로 택시를 타고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나는 몇 천원을 아저씨에게 쥐어주고 차에서 내렸다. 횡단보도까지 가기 위해서는 삼각지역 쪽으로 약간 올라가야 했다. '그 현장'에 꼭 다시 가보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가던 길이었을 뿐이고, '그 현장'이 워낙 교통의 요지에 있을 뿐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서건, 버스 전용차선 위에 놓여 있는 정류장에 가기 위해서건, 그곳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용산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은지 벌써 석달 째. 하지만 정부는 책임 있는 자세를 결코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라고 흔히들 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들과의 '연대'라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쫓기는 사람들, 구석으로 몰려 있는 자들,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촛불소녀처럼 귀엽고 예쁘장하고 '쿨'할 수가 없다.

눈보다 코를 통해 그곳이 그곳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장까지 10미터도 더 남아있었지만, 오래도록 쌓여온 소변의 지린내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은 결국 침을 뱉고 오줌을 갈기고 똥을 뿌릴 수밖에 없을 터이다. 가진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합판을 대충 못으로 박아 만든 '화장실'은 전경 버스의 타이어쪽을 향해 있었다. 전경 버스에 오줌을 싸는 사람의 양 옆을 가려주는 정도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그 곳에는 '연대'해주는 '촛불시민'도 없었고, 심지어 경찰 병력도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버스 한 대 정도의 전경들이 멀찍이 떨어져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족들은 의자에 줄줄이 앉아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명'과 '삶'은 결코 같지 않았다. 남편이 생명을 빼앗기자 아내는 삶을 잃었다. 아버지의 목숨을 짓뭉개놓고도 사과하지 않는 국가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딸의 삶 또한 제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 두 문장에 과거형 시제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차마 '연대'라는 단어를 쉽게 꺼낼 수가 없다. 그 '화장실' 앞을 지나 횡단보도로 향하며, 용산 참사 유족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어떤 훈수쟁이는 '더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용산의 시민이여...'라고 지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용산 참사를 기억합시다! 블로거들이 연대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글쎄요. 모르겠어요. 나는 차마 '연대'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내가 그 암모니아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이른바 '교양 있는 시민'으로서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연함이, 자연스러움이 부끄럽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늘과 내일 있을 용산참사 유가족 돕기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Live Aid)-희망'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모금액 전액이 용산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사용되는 이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줬으면 좋겠다.

가진 것은 오줌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그 행사가 열린다. 용산의 슬픔은 퀴퀴하게 썩어가고 있는데, 쾌적한 공연장에서 춤과 노래를 즐긴다니. 이것이 모순된 행동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앞에 주어지는 재현된 고통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무언가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용산 참사'가 주제인 공연을 보는 것은, 껄끄럽겠지만, 나쁜 일이 아니다.

용산의 그 '화장실'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부끄럽고, 불편하고, 당혹스럽다. 콘서트에 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 불편함은 결코 당장 해소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우리를 거북하게 하는 진실 그 자체를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용산참사 유가족 돕기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Live Aid)-희망'

* 공연정보

23일: 이승환, 이상은, 오! 브라더스, 윈디 시티, 흐른

24일: 블랙홀, 브로콜리 너마저, 갤럭시 익스프레스, 킹스턴 루디스타

관람료: 1일 2만원

* 공연 수익금 전액은 용산참사 유가족에게 전달될 예정.

(02)749-0883, 후원 계좌:하나은행/159-910003-67004(예금주-문화연대).

2009-04-08

돌출 행동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하여

1. 돌출 행동 - 미국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다보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기 십상이다. 특히 모종의 정치적인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집단의 경우, 그로 인한 갈등은 쉽게 커지고 종종 조직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그 집단이 어떤 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단체라면, 게다가 내부에서 구성원을 통제할만한 적절한 권위적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단체라면, 돌출 행동으로 인한 위험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레디앙에 기고된 목수정의 글이 공개되면서 벌어진 파장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돌출 행동'으로 설정해보자. 여기서는 글이 공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글을 보낸 목수정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레디앙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지 등 세부적인 '팩트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도록 하겠다.

정명훈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목수정의 글이 레디앙을 통해 공개되면서, 레디앙 독자의견,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그리고 이글루스(외의 다른 블로고스피어에서 이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에서 목수정은 극심한 반대 여론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반대 의견들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목수정이 괜히 정명훈을 건드린 탓에 합창단원들의 복직이 더욱 힘들어졌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초점이 합창단에서 목수정으로 옮겨지면서 정작 그들의 목소리는 묻혀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진보 블로거'들은 이 사안에 대해 입을 다물고 넘어가기로 작정한 듯하다. 목수정을 옹호하자니 여론에 휩쓸릴 것 같을 뿐더러 논거를 만들어주기도 쉽지 않고, 옹호하지 않자니 같은 당원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이런 입장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캡콜드님 같은 경우 목수정의 행동 원인을 '지사정신'으로 단정하고, 자신은 언제나 그것을 비판해 왔으며, 굳이 연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내용의 포스트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전략, 잠잠해질 때까지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 전략은 과연 현명한 전략일까? 그 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미국 민권운동의 대부, 사울 알린스키가 바로 그 소수 중 한 사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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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소위 급진주의자들 중 다수가 보여주는 정치적 무감각과 기회상실의 한 예가 시카고 7인의 재판*중에 일어난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주말 동안 전국 각지로부터 온 150여 명의 변호사가 호프만 판사가 내린 변호사 4인에 대한 구속조치에 항의하는 연방정부 빌딩 앞의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시카고로 모여들었다. . . . (중략) . . . 10시경이 되자 성난 변호사들은 연방정부 건물 주변을 행진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는 수백 명의 급진주의적 학생들, 몇 명의 흑표범단원들 그리고 백여 명 이상의 푸른 헬멧을 쓴 시카고 경찰들이 모여들었다.

정오가 되기 직전에, 시위 중이던 변호사들 중 40명 정도가 입구 옆의 유리벽 옆에 붙어 있던, 연방정부 건물 내에서의 그와 같은 시위를 금지하는 켐벨 판사의 서명이 들어간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피켓을 들고 연방정부 건물 현관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변호사들이 진입하자마자, 검은 판사복을 입고 연방 보안관, 속기사, 법원 서기를 동행한 켐벨 판사가 로비로 내려왔다. 그들 자신이 한 무리의 경찰과 연방 보안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성난 변호사들에게 에워싸인 켐벨 판사는 바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재판에 착수하였다. 그는 시위대가 즉시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들을 모욕죄로 고발하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이번에는 그들의 모욕죄가 재판정에서 일어났으므로 즉결처분을 틀림없이 내릴 것이라 경고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 사실을 공표하자마자, 군중 속의 한 목소리가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외쳤다.

잠시 동안의 긴장된 침묵 후에 군중의 환호가 이어졌고, 경찰들은 눈에 띄게 어색해졌으며, 켐벨 판사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변호사들 역시 로비를 떠나서 보도에 있던 시위대에게 돌아갔다.

-제이슨 엡스타인, 《거대한 음모의 재판》The Great Conspiracy Trial, Random House, 1970


시위 중이던 변호사들은 전국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자기 손으로 버리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판사로 하여금 논쟁을 계속하도록 만들고 사건의 쟁점이 유지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중 속의 한 목소리가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외친 후에 ①변호사들 중 한 명이 켐벨 판사에게로 걸어나가 그들은 개인에 대한 욕설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②모든 변호사가 한목소리로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함께 외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방법 중 그 어떤 것도 실천하지 않았다. 이는 주도권이 그들에게서 판사에게로 넘어가도록 하였고, 변호사들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pp. 43-45] 사울 D.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박순성 박지우 옮김 (서울: 아르케, 2008)

* [역주] '시카고 7인의 재판(The Chicago Seven Trial)'은 시카고 시 반전시위 주동자들과 관련된 재판을 가리킨다. 베트남 전 반대 시위가 확산되자 상원이 1968년 4월 반폭동법(Anti-Riot Act)을 통과시킨 가운데,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에 맞추어 급진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반전운동이 조직 전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곱 명(처음에는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제외됨)의 급진주의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1969년 9월에섯 1970년 2월까지 진행되었으며, 다섯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1972년 11월 상소심 판결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http://www.law.umkc.edu/faculty/projects/ftrials/Chicago/chicago7.html 참조.
(위 원문자 번호는 인용자가 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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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수정 사건과 '진보 블로거'들의 대응

이 사례와 현재 목수정 사건의 차이가 있다면, 돌출 행동으로 인해 야기된 '잠시 동안의 침묵' 후에 '군중의 환호'가 있느냐 아니면 '군중의 야유'가 있느냐 뿐이다. 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법정에 진출했던 변호사들은 군중 속으로 돌아간 후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라고 외친 누군가를 찾아내 추궁하거나 훈계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의 '진보 블로거'들은 목수정 끌끌끌, 목수정을 지금 왜 옹호하고 그러시나, 노정태님 실망이에요~ 이러고 있다.

여기서 도출된 교훈을 우리의 사례에 대입해보자. 레디앙에 실린 목수정의 기고문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파장이 커졌을 때, 목수정은 다시금 진보신당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울시향 음악감독 정명훈은 엿이나 먹어라!'라며 소리를 꽥꽥 지르고 나섰다.

알린스키에 따르면, 이렇듯 누군가 돌출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며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주님, 저 팩트 골룸들에게 속히 신선도 높은 일용할 떡밥을 주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전략은 그 하이에나들에게 새로운 먹이를 주지 않을 수 있도록, 관련자 전체를 통제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효율적인 것이 된다. 촛불시위 당시 청와대를 틀어막고 있으면서도 정부가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명박의 입을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적인 정당 내에서 그러한 행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온라인에 글을 쓰는 것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게다가 맞으면서 참는 모습은 결코 기존의 지지자들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왕 이명박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때의 경험을 좀 더 되살려보자. 현재 이명박의 지지율은 30%대로 나온다. 반면 촛불시위 당시에는 10% 이하로도 떨어졌다. 왜 그때에는 그렇게 지지율이 떨어졌을까? 이명박에 대한 지지율이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진압과 함께 성장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촛불시위 당시 이탈했던 20%는,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이명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다.

'진보신당 당원이 어떻게 잠재적 유권자를 조롱할 수가 있나'고 많은 이들이 내 지난 포스트를 보고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당하는 진보신당, 진보신당 당원이 당 이름까지 들먹였는데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그따위 진보신당, 댁 같으면 찍어주고 싶겠는가? 완전 호구 집단으로밖에 안 보이지 않을까? 이것은 '정당정치' 이전의 논리이다. 인간의 집단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내가 국외자였다면, 목수정이 다구리당하도록 방치하는 이따위 정당에는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이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팩트 골룸들이 지칠 때까지, 실컷 물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참고 버티겠다는 전략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매저키즘적이며, 결정적으로 진보신당의 지지자 확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목수정을 찍어내라, 진보신당 찍어주마'라고 외치는 자들을 지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여기서 '올바름'이란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익의 문제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진보신당은 당원들의 행동을 일일이 미시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비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돌출 행동의 발생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에 속한다.

따라서 인민재판을 즐기는 자들, 비정규직 문제의 기초도 모르면서 일단 맘에 안 드는 캐릭터가 나오면 까고 보는 '소비자'들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해가 되는 수가 있다. 견인합성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을 빌자면, '쉰 밥 먹고 체하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둘째, 목수정이 다구리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진보신당의 모습은, 앞으로 소수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충성도를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미안한 말이지만, 소수자 운동은 오래 하면 할 수록 '쿨'해질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소외된 자신을 끝없이 확인하면서, 자신이 억압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과 맨몸으로 부딪쳐야만 하는 일이 바로 소수자 운동이기 때문이다.

목수정이 이번에 보여준 '비매너'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출 행동'을 한 누군가를 당원들이 전혀 챙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듯 경험적으로 확인되면, 소수자들은 움추려들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모든 열린우리당 지지자 출신 진보신당 당원들을 폄하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소수자 운동 당사자들이 돌출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들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휘두르게 내버려둔다'는 전략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학적인 행동을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털릴 때까지 털리겠다, 참는 자가 이기는 자다, 이런 식의 대응은 당위적으로도 또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다.

게다가 이번 사안의 경우, 진보정당의 운동을 하면서 벌어질 수 있는 돌출 행동에 대한 '잘못된 이론화'까지 등장한 것이 큰 문제였다. 나 자신도 목수정의 문제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온라인 대중들이 젠더 혐오증에 걸려있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것을 교정할 수 없다는 것도 이미 몸으로 겪어서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폭력적인 반감을 일종의 '귀찮은 부탁에 대한 거절 모델'로 치환시킨 sonnet님의 설명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야만보다 더 나쁜 것은 오직 단 하나, 이성으로 포장된 야만 뿐이다. 사태가 이쯤 꼬였다면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정치적'인 것과 '정치인적'인 것

'진보신당 표 떨어지는 소리 들리네요' 같은 익명의 리플, 그 대중적인 반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해야 할 말을, 옳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노빠'들과 '노빠 혐오자'들이 극적인 타협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이 상황에서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 글자가 빠졌다.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 인식에 바탕하여 정치 행위를 펼쳐나갈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라는 최장집 교수의 견해에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나 소나 다 정치가인 양, 정치인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글러먹은 짓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흔히 말하는 '노빠'진영과 '노까'진영의 타협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블로거들이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데에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 알린스키는 말한다. 침묵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며, 약한 개들은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다 같이 짖어야 한다고.

그게 사실 아닌가? 진보신당은 약한 개들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더욱 한 마리씩 짖다가 잡아먹혀서는 안 된다. 목수정의 기고에 문제가 있었건, 레디앙의 게재에 문제가 있었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 내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것이 전제가 되었을 때, 진보신당의 전체적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은 두 가지일 것이다.

'목수정 씨가 다소 무례하게 서명을 요구했다고 정명훈 씨가 받아들였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음악계의 문제에 정명훈 씨가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진보신당의 차원에서 같은 요구를 그에게 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반드시 당 차원에서 이루어질 필요도 없다.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전면적이고 전폭적인 발언의 포문을 열어젖히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 블로거'들은 입을 닫았다. 입을 닫고 손을 씻고, 뒷짐을 지고 한참 이리 저리 걸어다니다가 '어어, 목수정 저러면 안 되지,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운동 하루 이틀 하나?' 같은 훈수를 찍찍 내갈기기 시작했다. 혹자는 '훈수를 두지 말자, 그리고 이러이러하게 하자'며 일종의 재귀적(再歸的) 훈수를 두기도 했다. 훈수 두는 거라면 노빠들이 빠질 수 있나. 젓가락 숟가락 들고 이 케이스에 덤벼들었다.

진보신당 당원들은 언제나 노빠들이 '집권하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훈수를 두는 행위에 치를 떨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보신당 당원들이 서로 훈수를 두고 있다.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걸려 있는 꼴이다. 이 사안에 대해 진걱모, 즉 '진보신당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유독 극심하게 창궐한 이유는 딴 게 아니다. 입을 다물고 눈을 돌리고 비를 피하는 전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미 저들은 물기 시작했고 피 맛을 봤다. 피 맛을 보게 냅두면 냅둘수록 하이에나를 쫓아내는 일은 더욱 힘들어진다. 멍청한 개들은 '쟤만 잡아먹고 물러가겠지, 우리는 살 수 있겠지'라고 말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다. 인정하자. 그 전략은 틀렸다.

합창단을 위한 전면적인 홍보전을 펼칠 요량이었더라도 '참는 자가 이기는 자' 전략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쇠는 뜨거울 때 때려야 하고 떡밥은 쉬기 전에 먹어야 한다.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이고, 이제 온라인 대중들은 다른 떡밥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정말 합창단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홍보 행위를 하고 싶었다면, 목수정으로 인해 이목이 집중되었던 그 때, 목수정을 내버리지 않으면서 그 논의를 진행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정치적'인 행위이며, 빨갱이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평화통일론을 내세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천재성이 드러난 것도 바로 그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였다. 반면 '정치인적'으로 행위하는데 여념이 없는 '진보 블로거'들과 전직 노빠들은, 공교롭게도 이명박과 같은 생각을 한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


4. 엎질러진 물, 돌출 행동의 수습

돌출 행동이 벌어진 시점에서 그것을 없던 일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숲에서 곰을 만났을 때, 먼 거리에서 쫓아내지 못한다면, 절대 도망가지 말고 싸우라는 내용이 미국의 국립공원 안내 표지판에 써있다고 한다. 곰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어떤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그 곰을 쫓아내거나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게 '대중적인 반감'으로 인해 반드시 실패하기만 하는 전략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목수정이 이른바 '뉴비 비호감'이라면, 비호감 중의 비호감, 비호감계의 모차르트, 강의석의 경우를 반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작년 국군의 날 강의석이 탱크 앞에 시원하게 벗고 곧휴를 드러내며 과자로 만든 총을 쏘고 '군대?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라는 퍼포먼스를 저질렀을 때, 진보신당 계열 블로거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의석의 사진을 올려놓으며 '나는 강의석의 퍼포먼스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물론 강의석 본인이 워낙 비호감일 뿐더러, 한국 남성들의 군대 문제에 대한 정서적 저항감도 매우 극심해서, 욕을 아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충분히 'damage control'이 되었다. 상대방이 살살 봐줘서가 아니라, 이쪽에서 확실히 세게 나갔기 때문이다.

'강의석의 저러한 행동은 평화 운동에 도움이 안 되고...'같은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묻혔고, 강의석은 살아났다. 50000쯤 먹을 욕을 24380 정도만 먹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강의석같은 역사와 전통의 비호감이 저지른 극도의 비호감질도 이토록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할진대, 어찌 목수정같은 극히 알려지지도 않았던 사람의 입장에 대한 옹호가 불가능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강의석을 옹호하던 사람들 모두 강의석을 결코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텐데?

돌출 행동이 저질러지면 누군가는 수습을 해야 한다. 혹자는 목수정을 고문관에 비유하기도 하더라만, 어차피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고 고문관질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목수정을 옹호하면서도 합창단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명확하게 알고 넘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나 또한 이 사태에 개입한 시점이 너무 늦었다. 우리는 모두 틀렸다. 나는 이 말을 함으로써, 알량하게도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잠을 자고자 한다.